'삼성 저격수' 340억달러 들고 또 한국 시장 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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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7.09.30 16:13

      폴 싱어 엘리엇 매니지먼트 회장
      삼성물산 합병·이재용 수뢰 혐의 등 물고 늘어질 가능성 제기

      세계 최대 광산 업체인 호주 BHP빌리턴(BHP)은 2011년 미국 셰일가스 업계에 발을 들였다. 셰일가스 주생산지인 텍사스주 남부 이글포드 등 4개 지역 땅 3400㎢를 200억달러에 사들였다. 셰일 붐이 불붙고,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 때였다. 2014년 이후 유가 하락은 BHP 발목을 잡았다. 2015~2016 회계연도에 63억달러(약 7조원) 규모의 손실을 입었지만, BHP는 막 시작한 셰일 사업을 포기할 뜻이 없었다. 올해 초 BHP 경영진은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을 만나 미국 투자 확대를 논의하기도 했다.

      폴 싱어 엘리엇 매니지먼트 회장
      블룸버그
      그런데 지난 4월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폴 엘리엇 싱어 회장이 등장하며 판이 달라졌다. 런던 증시에 상장된 BHP 지분 4.1%를 매수한 싱어는 BHP 경영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광산 업체가 주주들에게 최고의 가치를 주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싱어는 BHP가 셰일 투자를 포함한 석유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고, 원래 하던 원자재 사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주식 시장은 싱어의 제안에 반색했다. BHP 주가는 단숨에 4% 이상 올랐다. BHP 경영진은 내릴 때가 있으면 오를 때가 있는 자원 산업의 사이클을 싱어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싱어의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싱어는 지분을 5%로 늘리며 목소리를 키웠고, 우호 세력이 늘어갔다. 결국 지난달 BHP는 셰일가스를 포함한 미국 내 자산을 구조조정하겠다며 백기를 들었다.

      아이칸 뛰어넘고 버핏엔 딴죽 걸고

      폴 싱어 엘리엇 매니지먼트 회장
      변호사 출신인 싱어 회장은 1977년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모은 130만달러로 엘리엇 매니지먼트를 세웠다. 엘리엇은 특정 기업의 지분을 사들여 경영 참여를 요구한 뒤 주식 가치를 끌어올려 이익을 취하는 '행동주의 헤지펀드'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엘리엇이 운용하고 있는 자산은 340억달러에 달한다.

      엘리엇은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대명사가 됐다. 영국 투자 정보업체 액티비스트 인사이트(Activist Insight)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행동주의 펀드로 싱어의 엘리엇 펀드를 2015년과 2016년 두 해 연속 선정했다.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대명사였던 칼 아이칸을 2년 연속 제쳤다. 엘리엇이 지난해 투자한 기업 14개의 평균 시가총액은 266억달러로 각각 현대자동차 시가총액에 맞먹고, 엘리엇을 따라 투자했을 때 26% 수익률을 거둘 수 있었던 것으로 측정됐다. 같은 시기 아이칸 투자의 동행수익률(4.3%)을 훌쩍 뛰어넘는다. 블룸버그는 "지난 18개월 동안 폴 싱어는 언론의 헤드라인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평가했다.

      지난달 싱어는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과 정면 승부를 벌이기도 했다. 버핏이 미국 송전(送電) 회사 온코를 인수하려 하자 싱어는 재빨리 온코의 모(母)회사 에너지퓨처홀딩스의 최대 채권자로 변신했다. 싱어는 버핏의 인수 제안가(90억달러)가 너무 낮다며 딴죽을 걸며 93억달러를 걸고 직접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결국 온코는 94억5000만달러에 제3자인 천연가스 회사 셈프라로 넘어갔다. 10년 전 에너지퓨처에 투자했다가 10억달러의 손실을 본 경험을 온코 인수로 설욕하려 했던 버핏의 인수 계획은 틀어졌다.

      인수·합병 시장에 개입해 가격 높여

      싱어 회장은 지배 구조가 취약한 기업이나 실적이 나빠진 기업에 주로 투자한다. 지배 구조가 약해야 지분을 사들인 뒤 이사회를 흔들기가 쉽고, 실적이 나빠야 기존 경영진의 전략을 문제 삼거나 다른 기관투자자들의 동의를 이끌어내 우군으로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올해 2분기 기준 엘리엇의 미국 내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비중이 높은 10개 기업 중 7개가 2년 연속 적자 기업이다.

      인수·합병 시장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기업도 싱어의 타깃이다. 최근 싱어는 NXP반도체 지분 3.2%를 사들인 뒤 지난해부터 추진돼 오던 퀄컴의 NXP 인수 계획에 반기를 들었다. 퀄컴이 제시한 인수가 470억달러가 너무 낮기 때문에 NXP 이사회가 더 높은 가격을 요구하거나 퀄컴의 합병안을 거부하라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사상 최대의 '빅딜'이라고 평가되던 퀄컴의 NXP 인수가 싱어의 공격으로 시계(視界) 제로 상태에 빠져들었다.

      싱어의 먹성은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2000년 채무 지급 유예를 선언한 아르헨티나의 국채를 원금의 20% 수준의 헐값에 매집한 뒤 원리금 전액을 상환하라는 소송을 내 2013년 승소하기도 했다. 위기에 처한 국가나 기업에 투자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는 점에서 싱어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를 썩은 고기를 먹는 대머리독수리인 '벌처'로 부른다.

      싱어는 평판에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그는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사람들의 평가 따윈 상관없다. 기업의 경영진이 우리가 기업들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우리의 제안에 귀를 기울여주면 된다"고 말했다.

      싱어, 삼성 다시 저격할까

      싱어 회장의 보폭이 커지자 다시 엘리엇이 한국 시장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예상도 나온다.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의 주식을 사들였고, 삼성물산 주식 1주를 제일모직 주식 0.35주와 바꾸는 교환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 이익에 반한다며 공개적으로 합병을 반대했다. 이후 자사주 처분 금지 가처분 신청 등을 제기하며 법정 다툼을 벌였다. 법원이 삼성의 손을 들어줘 결국 합병은 이뤄졌지만 삼성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합병 당시 삼성물산의 주주였던 일성신약(지분 2.11%)이 제기한 합병 무효 소송의 판결이 다음 달 19일 나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두 회사의 합병 과정에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됐다는 판결이 나오면 이를 근거로 엘리엇이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할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정부 정책의 변화로 투자자가 손실을 입었다면 해당 정부가 손실을 물어내야 한다는 소송이다. 그러나 엘리엇의 삼성물산 주식 매집 과정에서 주식 5% 이상을 보유하면 공시해야 한다는 원칙을 어긴 혐의를 받고 있는 데다 ISD 제기 비용 자체가 만만치 않아 엘리엇 입장에서는 소송 제기의 실익이 적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다만 전문가들은 엘리엇이 삼성전자의 나스닥 상장을 강하게 요구해 삼성을 다시 한 번 곤란하게 만들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본다. 삼성전자 주식이 신흥 시장(emerging market)으로 분류되어 있는 한국 거래소에만 상장되어 있어 선진국 투자자들이 삼성전자 주식을 쉽게 사지 못해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해외 기관투자자들의 단골 주문이었다. 엘리엇은 지난해에도 삼성전자가 나스닥에 상장해 투자자들의 삼성그룹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투자 접근성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재용 부회장 재판 과정에서 88억원을 횡령해 뇌물로 줬다는 지난달 1심 법원의 판단이 항소심에서도 유지될 경우 이를 빌미로 삼성에 대한 공격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성전자의 지분 0.5% 이상을 보유한 주주는 주주 제안, 부정행위 이사 해임 청구 등 상법상 권한을 가질 수 있다. 엘리엇은 계열사를 통해 삼성전자 지분 0.6%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