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제품으로 연 매출 3000억…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벤처

입력 2017.09.02 08:00 | 수정 2017.10.23 19:40

중견 IT부품 전문회사 크루셜텍 안건준 CEO

중견 IT부품 전문회사 크루셜텍 안건준 CEO
이신영 C미디어 기자
경기도 판교테크노밸리에 있는 '크루셜텍(CrucialTec)'은 매출 3000억원대의 중견 IT 부품 전문회사다. 그런데 이 회사는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의존도가 낮고, 화웨이·레노버, 소니, 구글·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회사와 직거래하는 비중이 훨씬 높다. '세계 최초 개발 제품'도 10여 개 갖고 있다. 2006년 개발해 스마트폰 '블랙베리' 제조사인 RIM에 공급한 휴대폰 광마우스(OTP)와 카메라 플래시 모듈(MFM), 모바일 지문인식 트랙패드(BTP), 디스플레이 일체형 지문인식모듈(DFS)…. OTP는 세계 시장 점유율 97%를 기록했었다.

570여 건의 지식재산권을 갖고 있는 점도 남다르다. 한국 벤처 기업 가운데 드물게 '세계 최초 제품'으로 정면승부 하고 있는 크루셜텍의 안건준(52) 창업자 겸 사장(CEO·사진)을 지난달 27일 본사 10층에서 WEEKLY BIZ가 만났다.

"선제 투자·기술 개발이 성공 열쇠"

안 사장은 "어린 시절 자동차 디자이너가 꿈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의 미술대학 진학 반대로 부산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삼성전자에 7년 근무하면서 30여 개의 특허를 출원해 '사내 특허왕'이 됐다. 1997년 광통신 부품 제조 기업인 렉스텍의 최고기술경영자(CTO)로 스카우트돼 근무하다 2001년 4월 지금의 크루셜텍을 세웠다. 휴대전화 부품 제조가 주력 사업이다.

중견 IT부품 전문회사 크루셜텍 안건준 CEO
―삼성, LG전자 납품에 주력하는 대다수 한국 IT 기업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한국 대기업은 작은 부품 업체에 독점 공급 계약을 요구한다. 그걸 받아들이면 안정된 매출을 올려도 하도급 업체로 전락해 한계 기업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해외시장, 특히 미국에서 인정받은 후 해외 기업 직접 영업에서 살길을 찾았다. 200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MWC의 RIM 부스를 무작정 찾아가 CTO 면담을 요구하는 등 줄곧 적극적이었다."

―무명(無名)이어서 더 어려웠겠다.

"그렇다. 하지만 '남보다 한발 먼저 독보적인 기술을 준비하면, 기회는 열린다'는 신념으로 끈기와 오기를 갖고 부딪쳤다. 2009년 8월 RIM이 블랙베리의 입력 장치를 '트랙볼'에서 우리 제품인 'OTP'로 바꾸면서 숨통이 트였다. 곧이어 차세대 기술인 지문인식모듈(BTP) 개발도 선제적으로 했다. 선제 투자와 선제적 기술 개발이 성공 열쇠가 됐다."

―2012년부터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는데.

"적자 전환은 주 거래처인 블랙베리의 시장 점유율 급락으로 우리 매출까지 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문인식모듈 상용화와 공장 증설을 위해 사내 유보금 등 1000억원을 쏟아부었다. 위기가 오히려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쉽지 않았지만 과감한 결정 덕분에 크루셜텍은 지문인식모듈로 제2 전성기를 맞았다."

―화웨이, 레노버 등 중국 기업과 거래하면서 느끼는 점은.

"중국의 개별 기업 자체 경쟁력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인다. 중국의 힘은 정부로부터 나오는 것 같다. 특히 기업에 특별한 기술만 있으면 정부는 무담보로 많은 돈을 창업지원금으로 제공한다. 중국은 좋은 아이디어와 적절한 기술만 있으면 창업하기 너무 좋은 환경이다."

안 사장은 "중국 정부와 기업이 2인(人) 3각(脚)으로 협업하면서 IT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콘텐츠 등이 결합해 복합 성장하는 게 부럽기도 하고 위협적이다"고 했다.

"연대 보증제 폐지해 벤처 활성화해야"

―우리나라에서 벤처 창업을 성공시키려면 뭐가 가장 절실한가.

중견 IT부품 전문회사 크루셜텍 안건준 CEO
"연대보증제 완전 폐지가 시급하다. 현재 은행 등 민간 기금이 전부 연대보증을 요구한다. 연대보증을 없애면 지금보다 10배 이상의 인력이 대기업, 학교, 연구소를 박차고 창업에 나설 것이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연대보증 때문에 힘들다는 창업자를 보지 못했다."

안 사장은 "창업 초기 스타트업에는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듯 과감하게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며 "자생력이 생긴 중견 벤처에는 시장에서 공정한 게임이 되도록 정부가 심판자 역할을 제대로 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기업 연구원을 그만두고 기업을 창업했는데 후회하지 않나.

"대기업 생활이 '공무원의 삶'처럼 느껴졌다. 빠르게 성장하고 싶었고 내게 충분한 역량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창업을 후회하지 않는다."

―올 2월부터 한국벤처기업협회장을 맡고 있는데 요즘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앱 개발 등 손쉬운 아이템으로 창업하는 비중이 높은 게 안타깝다. 이런 스타트업은 지속 가능한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힘들다. 지속 가능한 좋은 일자리는 '기술 창업'에서 나온다. 정부가 IT 제조 벤처 창업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IT 제조 벤처가 왜 중요한가.

"서비스와 소프트웨어로는 해외에서 달러를 벌 수 없기 때문이다. 제조 벤처가 탄탄해야 하드웨어와 융합한 소프트웨어 기업도 성장할 수 있다."

―중국·일본 벤처 기업과 한국을 비교한다면.

"월드 클래스급의 30여 개 대기업과 정치·경제의 중심지이며 세계적 대학이 밀집한 서울 생태계를 잘 활용하면, 한국은 이스라엘보다 좋은 벤처를 탄생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콘텐츠를 융합한 벤처도 나올 것이다. 대기업과 벤처기업의 조화와 상생을 만드는 정부의 지원책과 심판자 역할이 시급하다."

"삼성전자는 애플보다 더 좋은 회사"

―2001년 크루셜텍 창업 당시보다 지금 창업 환경은 개선됐나.
중견 IT부품 전문회사 크루셜텍 안건준 CEO
"그때나 지금이나 실패했을 때 창업팀을 보호해줄 사회 안전망이 없다. 벤처가 우수 인재를 영입할 수 있는 유인책은 20년 전보다 더 없어졌다. 2000년대 중반까지 스톡옵션 행사가 기준으로 연간 5000만원 이하에 대해선 소득세 과세를 하지 않았었다. 벤처 활성화와 우수 인재 영입을 위해 5000만원까지 비과세 정책으로 회귀할 필요가 있다."

―경영 원칙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정신, 즉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이다. 험난한 가시밭길이지만, 이 길을 통과하면 더 많은 것을 손에 쥘 수 있다. '역시 크루셜텍!'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부심이 생긴다. 세상에 없는 걸 만들고 그 제품의 시장까지 만들 때 창업자로서 보람을 느낀다."

―존경하는 경영인이나 기업이 있나.

"기업은 있다. 삼성전자다.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자세, 끊임없이 조직을 강화하고 사업 포트폴리오와 내부 시스템을 만들며 우수 인재를 키우는 그런 능력이 존경스럽다. 삼성전자의 경우, 탄탄한 시스템과 우수 인재 덕분에 한 개인의 문제에 회사 주가가 흔들리는 일이 별로 없다. 여러 측면에서 '삼성이 애플보다 더 좋은 회사'이다."

―정보 습득과 자기 개발은.

"경제 전문지와 기술 전문지 등을 아주 많이 본다. 책은 한 달에 최소 5권 정도 읽는다. 한번 꽂히면 정독을 한다. 밑줄 긋고 해당 페이지의 사진을 찍고 반복해서 읽으며 해당 분야 전문가와 연락해 의견을 듣는다. 1년, 5년 단위의 큰 흐름을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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