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만㎢ 땅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 군사 천재였지만 경영 철학 부재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입력 2017.08.18 16:41

가는 곳마다 전승… 약탈과 살육 일삼아
정복자였을 뿐 위대한 경영자 못 돼

알렉산더대왕
유럽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을 세계 제일의 정복 제왕으로 꼽는다. 알렉산더와 광개토대왕 모두 타고난 군사 천재인 데다 소년 시절부터 직접 전투에 참여한 지휘자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한 부대가 작전을 한 다음 다른 부대가 이어 작전을 하는 전법을 썼다.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의 군대와 격돌한 전투를 예로 들어 보자. 5m 정도 길이의 긴 창으로 무장한 창병(槍兵)들이 사각형의 대오로 적 전차 부대의 중앙 공격에 맞선다. 좌우 측면에 배치된 기병대의 공격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우측 기병들이 적의 기병들을 유인해 교전하면, 그 교전의 중앙을 알렉산더가 지휘하는 기병들이 기습 공격해 적 기병대를 혼란에 빠뜨려 틈을 만든다. 후속 병력이 그 틈 사이를 뚫고 우회, 적 후방 본진으로 파고들어가 적 본부를 괴멸시킨다. 요약하면 창병 부대→우측 기병대→알렉산더의 지휘 기병대→후속 병력이 순차적으로 직렬 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병렬 전법과 달리, 공격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공격 집중력이 최대화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알렉산더의 헤타이로이 기병대는 말 위에서 한 번 창을 쓰면 창을 놓아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말에서 떨어져야만 했다. 기마술이 서툰 알렉산더 기병대와 사각형 대오로 경직된 창병 부대의 군대는 거의 같은 시대에 말 달리면서 활과 칼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유목민인 흉노족 군대와 맞섰다면 패배하였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알렉산더 군대가 기마에 서툰 아열대 지방의 군대와만 전투했기 때문에 승리했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세상을 하나로 만든다는 만인동포관(萬人同胞觀)에 의거, 인류 융합 정책을 구상했다. 마케도니아 군사들을 페르시아 여인들과 결혼시켰고,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의 융합을 꾀했다. 그 결과 동서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했다. 그러나 그 정책으로 마케도니아 백성들은 그를 외면했고 장기간에 걸친 살육 정복 전쟁에 그의 군대마저 그를 두려워하고 싫어했다.

알렉산더는 과로와 말라리아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페르시아 정복 후 300명이 넘는 여인과 황음무도함에 빠진 그는 조직 관리를 거의 하지 못했고, 사후 계승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의 사후, 정복한 대영토는 4개국으로 쪼개졌다. 군사에 천부적 재능이 있어 12년 동안 515만㎢(현 미국 영토의 52%)에 달하는 넓은 땅을 정복했지만, 경영 철학과 도덕성 부재로 장기 존속하는 강국을 만들지 못했다. 정복자였을 뿐 위대한 경영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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