分社의 마법… '늙은 HP'를 둘로 쪼개자 다시 성장 행진이 시작됐다

입력 2017.05.12 15:35

'실리콘밸리 1호 기업' HP Inc… 디온 와이슬러 CEO
육중한 거인의 변신… 첫 3D 프린터 출시
삼성 프린터 사업 인수 속전속결

2012년 초 실리콘밸리 팰로앨토에 위치한 HP 본사의 현장 간담회장. 미국 최대 PC 생산업체인 이곳에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멕 휘트먼(Whitman)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직원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과 눈 마주치길 꺼렸고, 항의라도 하듯 일부러 큰 소리로 전화를 걸기 시작하는 직원마저 눈에 띄었다.

당시 말단 직원들이 CEO와의 첫 만남에서 보여준 냉담한 반응은 추락하는 HP의 한 단면이었다. PC·프린터 등 전통 사업 분야에선 중국의 저가 공세에 밀려 2011년 이후 매년 매출이 10% 이상 줄었고, 스마트폰·태블릿PC 등 성장 분야에선 기술 흐름을 읽지 못해 기껏 신제품을 출시해도 소비자 반응은 싸늘하기 일쑤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前) 경영진이 성 추문에 휩싸이면서 회사 이미지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사회도 파벌 싸움에 빠졌다. 사설탐정까지 고용해 상대 파벌의 약점을 캐내려는 모습이 언론에 노출됐다. 78년 전 빌 휼렛과 데이브 패커드가 팰로앨토 한 차고에서 시작했던 이 실리콘밸리 원조(元祖) 기업이 이류로 추락하고 있었다.

삼성전자 프린터 사업부 인수를 계기로 한국을 찾은 디온 와이슬러
삼성전자 프린터 사업부 인수를 계기로 한국을 찾은 디온 와이슬러 HP Inc 최고경영자(CEO)가 분사 이후 전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핵심(core)·성장(growth)·미래(future)로 나눴다고 강조하면서, “시장을 매우 세밀하게 분석해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틈새시장을 개척하고 있다”고 말했다. / 남민우 기자
휘트먼은 중병에 걸린 HP를 되살리는 유일한 해법이 회사를 둘로 쪼개는 것이라고 봤다. 전통 제조 사업 부문과 신성장 부문으로 회사를 분사해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지 않고 각자도생(各自圖生·제각기 살 길을 도모함)식으로 가야만, 전통과 신성장 양쪽 모두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판단이었다. 이에 그는 2014년 10월 회사를 PC·프린터 등을 파는 'HP Inc'와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파는 '휼렛패커드 엔터프라이즈'로 분사(分社)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HP의 마지막 생존 카드로 여겨졌던 분사 계획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증권가 시각도 적지 않았다. PC 시장 규모가 매년 5~6%씩 줄어드는 등 경영 환경이 악화 일로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HP의 전통 사업 영역을 물려받은 HP Inc는 지난 1분기 중국 레노보를 앞지르고 5년 만에 전 세계 PC 시장 점유율(IDC 집계·PC 출하 기준) 1위 자리를 되찾으며 명예 회복에 나서고 있다. PC·프린터 업계 침체 속에서도 매출 또한 1년 전보다 5% 늘어나는 등 실적 회복세도 꾸준하다.

저가 제품으로 무장한 중국 기업은 물론, 아마존·애플과 같은 신흥 대기업에도 대항해야 하는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서 HP는 어떻게 부활의 발판을 마련한 것일까. WEEKLY BIZ는 최근 한국을 방문한 디온 와이슬러(Weisler·50) HP Inc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분사 이후 숨 가빴던 그의 여정을 들어봤다.

1. 分社 계기로 의사 결정 빨라져

hp lnc
―2년 전 분사한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됐다고 보는지.

"변화를 기회로 만들 수 있도록 속전속결할 수 있게 된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사실 분사 계획을 발표할 당시엔 분사를 마뜩잖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분사 이후 정말 나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해냈다. 작년 5월 첫 3D 프린터 출시, 작년 10월 삼성전자 프린터 사업부 인수 등이 대표적이다. 과거의 HP에선 절대 불가능한 속도와 규모다."

―분사 이전 HP는 어떤 회사였나.

"분사 이전 늙고 무기력한 이사회는 정말이지 답답할 지경이었다. 스마트폰, 수퍼컴퓨터, 기업용 소프트웨어 등 너무 넓은 분야를 맡다 보니,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우리의 사업 포트폴리오는 엉망이 됐다."

―분사 이후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의사 결정이 빨라지니 재무·인사 등 일선 부서의 기능도 더 원활해졌다. 주력 제품인 PC·프린터의 부품 조달라인에서 불필요한 프로세스를 없애고 대신 제품 개발에 더 많은 에너지가 집중될 수 있도록 했다."

HP의 분사를 진두지휘한 멕 휘트먼은 과거 HP를 종종 '육중한 거인(lumbering colossus)'에 비유하곤 했다. 너무 많은 사업을 한꺼번에 챙기려다 보니 경영진이 뚜렷한 전략을 세우지 못해 큰 손실을 냈다는 것이다. 2011년 영국 정보분석업체 오토노미를 110억달러를 주고 사들였다가, 그중 88억달러어치를 회수 불가능한 손실로 처리한 게 대표적이다.

―분사 이후 어떤 원칙을 갖고 회사를 이끌고 있나.

"'소통은 간결하게, 실행은 꼼꼼하게'가 원칙이다. 모든 전략안(案)은 한 페이지 안에 담는다. 이익이 안 나는데도 단순히 시장점유율 확대를 위한 덩치 불리기는 자제하고 있다."

2. 핵심·성장·미래 3가지로 사업 재분류

hp 매출추이 시장점유율

―분사 이후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을 세워 대응하고 있는가.

"분사 이후 조금 더 선명한 제품 전략을 짜기 위해 우리가 보유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핵심(core), 성장(growth), 그리고 미래(future)라는 3개 카테고리로 다시 한 번 분류했다. 핵심 사업은 PC·프린터 등 HP가 전통적으로 강점을 보였던 사업 부문이다. 성장 사업은 인수·합병 등을 통해 시장점유율을 올린 뒤 2~3년 후 핵심 사업의 매출 감소를 메워줄 분야다. 그리고 미래 사업은 지식재산권 등 우리가 보유한 모든 역량을 극대화해 3~10년 후를 준비하는 분야를 말한다."

―삼성전자 프린터 사업 인수는 어떤 의도로 추진했던 것인가.

"복사기 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을 키우기 위한 포석이었다. 시장 규모 550억달러의 복사기 시장은 HP 입장에선 '성장 사업'이다. HP는 A4 복사기 시장에서는 수십 년째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A3 복사기 시장 점유율은 4%를 밑돈다. 제록스, 렉스마크 등 14개가 넘는 경쟁사들을 앞지르려면 비교적 심플하게 프린터·복사기를 만드는 삼성의 기술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삼성의 복사기를 분해해 부품 개수를 세보면 200개에 불과하다. 반면, 경쟁사 제품은 부품이 천 개가 넘는다. 삼성 프린터 사업부 인수로 시장에서 조금 더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3. 레드오션에서 틈새시장 개척

"HP의 핵심 제품인 노트북·PC 신제품에 열광하는 소비자가 많지 않다"는 말을 꺼내자, 그는 대뜸 발밑에서 두께 30.5mm 노트북을 꺼내 보이며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4년 전 노트북 사업을 맡았을 때 그나마 이게 제일 잘 팔리던 제품(HP Zbook 15)이었어요. 집에 들고 와서 아들 놈에게 '갖고 싶으냐'고 물어보니 아무 말도 없더군요." 심각했던 그의 표정은 두께 10.4mm 은색 노트북(HP Spectre 13)을 꺼내고 나서야 밝아졌다. "결국 세계에서 가장 얇은 노트북을 만들어 내고 나서야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레드오션에서 경쟁할지라도 시장점유율 확대보다는 틈새시장 개척과 제품 혁신만이 생존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방식으로 제품을 차별화하려 하는가.

"우리는 '중간 지대'에서 틈새시장을 찾고 있다. 예를 들어 전문 애니메이터(만화영화제작자)는 고사양 컴퓨터가 필요하다. 반대로 이메일·엑셀 작성 등 비교적 단순한 업무를 하는 직장인은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등 저사양 컴퓨터로도 충분한 경우가 많다.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며) 그런데 이런 고사양과 저사양 기기의 중간 영역은 비어 있다. 이런 경쟁 구도의 중간 지대에 속한 소비자, 즉 PC나 스마트폰 한 대로 고급이나 일반 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하고 싶어 하는 소비자도 많을 것이다. 이들을 만족시킬 하이브리드(잡종)형 제품의 수요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디자인과 제품 기능을 보완해 모니터와 자판이 분리되는 탈착형 노트북이나 스마트폰만큼 작은 크기의 고성능 태블릿PC 등을 출시하며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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