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스 시장 40% 차지한 로지텍 회장 "비전? 비전은 잊어라"

입력 2017.03.31 14:55 | 수정 2019.08.18 15:52

'세계 1위 마우스 기업' 이끄는 게리노 드 루카 회장
크지 않은 시장에서도 혁신은 일어난다
PC에 몰린 핵심 인재 마우스 개발에 끌어와 넘볼 수 없는 기술 쌓아

1981년. 미국 스탠퍼드대에 유학을 다녀온 스위스 청년 다니엘 보렐은 제록스(Xerox), 휼렛패커드(HP) 같은 기술 기업들을 보고 창업을 결심한다. 그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분야에 진출하려고 했지만 미국 기업들의 기술이 너무 쟁쟁했다. 대신 보렐은 아직 기술 개발이 덜 된 시장인 마우스에 집중했다. 당시 마우스 가격은 개당 200달러가 넘었고, 두꺼운 코드를 꽂아야 충전이 가능했다. 보렐의 회사는 사람이 쓰기 편하고 가격이 저렴한 마우스를 만드는 데 역량을 쏟았다. HP·컴팩 같은 PC 제조사에 마우스를 주문제작(OEM)해 납품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PC가 확산되면서 회사도 급성장했고 한때 OEM을 포함한 전 세계 마우스 80%를 생산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우스 제조사 로지텍(Logitech)의 성장 스토리다.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 수준의 기술 쌓아라

로지텍은 전 세계 컴퓨터 사용자 절반의 손을 거쳐간 마우스를 만든 스위스 회사다. 현재 게임용(게이밍) 마우스 시장에선 30%대 점유율, 일반 마우스 시장에선 40%대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업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게리노 드 루카(De Luca·64) 로지텍 회장을 스위스 로잔 본사에서 만났다. 이탈리아 출신인 드 루카 회장은 애플 자회사인 클라리스 사장, 애플 유럽 마케팅 부사장 등을 지내며 10년간 애플에 몸담았다가 1998년 로지텍 최고경영자(CEO)로 왔다. 드 루카 CEO 체제에서 로지텍 매출은 연 30%씩 늘었고 글로벌 마우스 시장점유율도 한때 55%까지 올랐다. 그는 한창 회사가 잘나가던 2007년 "한 명의 CEO가 10년 이상 운전대를 잡으면 안 된다"며 회장직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후임 CEO의 경영 실패로 회사 실적이 추락하자, 드 루카 회장이 임시 CEO(2011~2013년)로 복귀해 회사를 재건했다.

―마우스라는 제품이 처음 상용화된 3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마우스 시장 1위를 한 비결은.

"로지텍은 대형 PC 제조사의 OEM으로 시작했다. 1980년대 구매한 PC에 마우스가 덤으로 딸려왔다면, 로고는 달라도 아마 로지텍이 생산한 제품이었을 것이다. 당시 PC 업체들도 컴퓨터 판매 가격을 낮춰야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로지텍도 가장 편리하고 가격이 저렴한 제품을 만드는 데 투자했다.

하지만 낮은 가격만으론 오래가지 못한다.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 수준의 기술과 강력한 브랜드의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로지텍은 초기부터 마우스 분야 기술 혁신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PC가 주력 사업인 업체들은 핵심 인재를 모두 PC에 쓰고 마우스엔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로지텍은 마우스에 핵심 인재를 다 끌어다 썼다. 1990년대 초엔 최초로 무선 마우스를 출시했는데 히트를 치면서 선두 주자로 자리를 굳혔다. 게이밍 마우스도 개발했다. 게이밍 마우스는 일반 제품보다 훨씬 예민하고 정교해 지금도 이 분야에서 기술 혁신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싸워서 이길 시장에서 경쟁하라

―왜 PC 제조나 운영체제 개발이 아니라 마우스, 키보드와 같은 주변기기를 선택했나.

"기업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시장을 골라야 한다. 로지텍은 큰 고래와 정면 승부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로지텍은 삼성전자·애플·마이크로소프트처럼 컴퓨터 산업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와 비교하면 아주 작다. 하지만 로지텍은 항상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곳에 존재하기 위한 방법으로 마우스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시장을 선택했고 마우스라는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회사가 됐다. 로지텍은 지금까지 십억개가 넘는 마우스를 팔았다. 대기업이 돼야만 혁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크지 않은, 그럭저럭한 사이즈의 시장에서도 분명히 혁신은 일어난다. '승산이 있는 싸움을 고르라'는 기업 철학은 로지텍이 내리는 거의 모든 의사결정에 적용된다."

―PC 산업 성장이란 시류를 잘 탄 것이 아닌가.

"기업의 성패에는 운도 작용한다. 오늘날엔 마우스로 클릭하는 게 당연하지만, 과거엔 키보드로 직접 문자를 입력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는 사람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고, 로지텍은 그 변화의 큰 흐름에서 아주 작은 역할을 맡은 셈이다. 기업이 뛰어들 시장을 고를 때는 자신만의 니치마켓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거대한 바다에서는 고래조차도 작은 존재다. 눈에도 안 띈다. 그러나 작은 연못에 사는 고래는 영향력 있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미래는 예측 못 해… 변화에 빨리 따라가라

로지텍은 컴퓨터 산업 전체로 봤을 때, 시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주류 기업은 아니다. 보조 역할을 하는 '주변기기' 부문의 강자다. 컴퓨터 주변기기는 마우스, 키보드, 스피커, 메모리 저장장치 등을 포함한다. 이런 주변기기를 만드는 업체들의 PC·노트북 시장의 흥행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로지텍은 회사 초창기부터 PC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기술력으로 브랜드를 키웠고 게이밍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다. 성장하는 거인의 어깨에 빠르게 올라타 끊임없이 변화하는 능력을 키워, 그 거인이 쓰러져도 영향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로지텍만의 생존 경영을 해온 셈이다. 드 루카 회장은 이런 생존 경영의 원천은 "빨리 실패하라"는 철학에서 온다고 말했다.

―PC 산업이 저물고 모바일 시대가 오고 있다. 마우스·키보드만으로 먹고살 수는 없다. 로지텍은 어떻게 대비하고 있나.

"소비자들이 쓰는 전자제품은 빠르게 변한다. 아무리 멋지고 획기적인 제품을 발명하더라도 영원히 승승장구할 수 없다. 경쟁사 제품보다 조금 더 오랫동안 인기를 끌 수는 있겠지만, 결국엔 또 새로운 게 나와야 한다. 따라서 소비재를 만드는 기업은 제품 포트폴리오를 유연하게 짜야 한다. 이번 시즌에 성장세를 견인할 선발 주자가 있다면, 그의 기력이 꺾일 때 선발 자리를 대체할 후보 선수를 항상 마련해야 한다. 다음 시즌엔 그 후보 선수가 선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이 총 10~15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면 그중 일부는 성숙도가 높고, 나머진 아직 키우는 수준이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주기의 제품군들이 다 같이 합쳐질 때 위험이 낮아지고 적당한 수준의 이익을 꾸준히 낼 수 있다."

―어느 제품이 앞으로 선발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있나. 리더의 비전이 중요한가.

"비전? 비전은 잊어라. 험난한 비즈니스 환경에선 그 어느 누구도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시도하고 빨리 실패하고 잘 안 되면 얼른 포기하는 것이 비결이다. 처음엔 잘 몰랐던 것을 새롭게 배우고 알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기존에 하고 있던 걸 포기하고서라도 새로운 가능성이 보이면 민첩하게 적응하는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잘 안 되면 빨리 실패하고 넘어가라

―하지만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실적과 성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실패에 관대해져야 한다. 실패도 해본 기업이 할 줄 안다. 기업 리더들은 그동안 경험과 실패를 바탕으로 계속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 또 실패하면 된다. 모든 실험이 다 잘될 거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게 더 많을 것이다. 로지텍도 '얼티밋이어(UE) 스피커'라는 새로운 제품군이 히트를 치기 전에, 몇 년간 음악 관련 제품을 몇 개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재빨리 털고 일어나서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도했고 지금의 UE가 나온 것이다."

―과거 실패작들에 대해 말해달라.

"밤새 이야기해도 시간이 모자랄 거다. 소니 같은 카메라 업체보다 로지텍이 먼저 디지털 카메라를 만든 사실을 알고 있나. 로지텍은 1992년 '포토맨'이라는 카메라를 만든 적이 있다. 사진을 찍고 컴퓨터에 연결해서 볼 수 있는 최초의 카메라였는데, 정말 불편했다. 아무도 원치 않았다. 그냥 망했다. 하지만 로지텍은 꾸준히 실험했고, 오늘날 화상회의 카메라를 팔고 있다."
컴퓨터와 마우스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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