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살리려면 부채 걱정 말고 재정정책 확대하라

입력 2016.10.08 03:05

[Cover Story] 위클리비즈 10주년 기념 경제·경영 글로벌 콘퍼런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하자 미국 정부는 그림자 금융(규제를 받지 않는 제2금융권) 때문에 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금융시장이 붕괴했고, 주택 시장은 거품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택 시장의 거품이 잦아들고, 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면, 소비자 부채가 해결되고 경제가 정상 궤도로 돌아갈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8년 뒤, 미 경제는 레이건 정부 이후 가장 긴 침체기를 겪고 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경제 위기가 계속되다 보니 사람들은 일시적인 호황이 와도 비정상적인 거품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Krugman·63) 미 뉴욕시립대 교수는 6일 서울 중구 소공로 더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위클리비즈 10주년 기념 콘퍼런스 '대변혁의 시대, 한국 기업의 길을 묻다'에 참석해 "미 정부가 너무 일찍 경기 부양책을 중단하고 긴축 정책으로 들어간 것이 저(低)성장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긴축 정책을 일찍 사용한 나라부터 장기적인 경기 침체에 빠져들었다"면서 "더 이상 통화정책에 의존한 경제 회복은 불가능하며, 대규모 투자를 통한 재정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최근 주요 선진국들이 제로 금리 등 쓸 수 있는 정책 도구들을 모두 동원하고 있는데도,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만약 중국 경제가 붕괴한다면, 금융시장이 또다시 흔들린다면, (가능성은 희박해도) 도이체방크가 리먼브러더스처럼 된다면 우리는 어떤 정책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겠는가"라며 재정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지낸 앨런 크루거(Krueger·56) 미 프린스턴대 교수도 "금융 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판이 흔들리면서 통화정책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며 크루그먼 교수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크루거 교수는 "미국은 앞으로도 2~3% 경제성장률은 유지할 것"이라며 "이는 오바마 정부가 정권 초기 국민과 의회의 온갖 비판을 들으면서도 7800억달러라는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실행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리더십 전문가인 시드니 핑켈스타인(Finkelstein·58) 미 다트머스대 교수도 "위기일수록 기업뿐 아니라 정부에서도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여성 인력을 발굴하는 것처럼 잠재적인 성장력을 이끌어내는 국가만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석학들은 수출 중심 경제 모델에서 벗어나야만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한국처럼 대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수출 의존도를 낮추고 사회보장제도 등을 확대해 내수를 진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크루거 교수도 "한국이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경제 모델을 바꾸지 않는다면 경제성장은 더딜 수밖에 없다"며 "규제를 풀고, 사회보장을 확대하고, 이민자 수를 늘려 노동 가능 인구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에마쓰 지히로(末松千尋·60) 교토(京都)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을 벗어나려면 기존 대기업 중심의 도쿄(東京)식 경영에서 벗어나 유연화된 기업 모델인 강소 기업 중심의 교토식 경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우 징(劉勁·46) 베이징 창장(長江)경영대학원 부총장은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전과 비교해 절반 수준으로 하락하긴 했지만, 경제구조가 수출 주도형에서 내수 중심, 서비스 중심으로 변화하고 세계적인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로하나 로잔(Rozhan·52) 아스트로 최고경영자(CEO)는 "아스트로가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미디어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 인력 활용이 뛰어났기 때문"이라며 "아시아 국가들이 여성 인력 활용을 늘려야만 경제성장률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위클리비즈 10주년 기념
지난 6일 서울 중구 소공로 더 플라자 호텔에서 개최된 ‘위클리비즈 10주년 기념 경제·경영 글로벌 콘퍼런스’에 참석한 해외 연사들은 저성장·저금리 기조가 전 세계적으로 고착되고 있다는 점에 공감하며, 한국 경제와 기업이 나아갈 길을 토론했다. 왼쪽부터 시드니 핑켈스타인 다트머스대 교수, 앨런 크루거 프린스턴대 교수,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 스에마쓰 지히로 교토대 교수, 로하나 로잔 아스트로 최고경영자(CEO). /이태경·박상훈 기자
"저는 당시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베팅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손으로 이룬 결과를 보고 나니 언제라도 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올해 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제너럴모터스(GM)를 방문해 자동차업계의 회복을 자찬하며 이같이 말했다.

미 경제가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회복세로 돌아선 이유로 자동차업계의 부활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2008년 금융 위기 직후 파산 위기에 처했던 GM과 포드, 크라이슬러 등 빅3 자동차업계는 정부의 대규모 구제금융과 구조조정에 힘입어 화려하게 살아났다.

현재 미 경제 회복의 25%는 자동차산업 덕분이다. 50만개 이상의 일자리가 자동차와 부품 등 관련 산업에서 나온다. 만약 정부가 도와주지 않아 자동차업계가 파산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상상하기 어려운 경제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정권 초기 자동차업계에 대규모 지원을 결정할 당시에는 환영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혈세를 낭비하는 사회주의자'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지금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 결정을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위클리비즈 10주년 기념 경제·경영 글로벌 콘퍼런스 첫 번째 세션 '새로운 성장 전략과 리더십'에서 석학들은 "저성장에서 벗어나려면 단기적으로는 비판을 받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의를 따르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대담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위클리비즈 10주년 기념
위클리비즈 10주년 기념 경제·경영 글로벌 콘퍼런스에서 제1세션 패널들이 토론하고 있다. 왼쪽부터 성태윤 연세대 교수, 시드니 핑켈스타인 다트머스대 교수, 앨런 크루거 프린스턴대 교수,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 /박상훈 기자
추락하는 비행기 착륙시키는 리더십 필요

앨런 크루거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각국 경제가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인기에 영합하기보다 좀 더 용기 있는 정책을 취할 필요가 있다"며 "위기 상황에서 정부 지도자는 추락하는 비행기를 안전하게 착륙시키는 파일럿 같은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행기가 추락할 때 파일럿은 엔진 등에 무슨 잘못이 있는지 에어버스 등에 연락해 분석하는 건 나중으로 미뤄야 한다"며 "일단 안전하게 착륙시킨 후 추락 이유를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크루거 교수는 오바마 대통령이 의료 개혁에 성공한 이유도 "주변의 비판에 휘둘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그는 이해 관계자들을 만나 '비판은 대응하면 된다. 문제는 해결하면 된다. 일단 추진부터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고 전했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도 오바마 정부가 빠른 경기 부양책으로 경제를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증가하는 부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긴축 정책을 시작해 경제 회복을 막은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사람들 사이에 '부채는 악(惡)'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며 "하지만 금리가 지금처럼 낮은 상황에서 부채는 눈덩이처럼 늘어날 수 있는 위험 요소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은 늘 아르헨티나나 베네수엘라의 예를 들며 부채를 걱정하지만 선진국 중 부채가 증가해 망한 나라는 역사적으로 없었다"고 덧붙였다.

크루그먼 교수는 "최근 각국 경제의 문제점은 내수가 부족하다는 것"이라며 "정부가 지금보다 돈을 더 쓰고, 규제를 더 풀고, 재정정책을 더 많이 펴야만 경제가 회복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유럽중앙은행(ECB)이 2011년 금리를 올렸다가 다시 되돌린 것도 실수"라며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올해 안에 금리를 올릴 것으로 보이지만, 난 이 역시 실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재정정책의 방법으로 사회보장제도의 확대를 주장했다. 그는 "실업 급여나 푸드 스탬프(저소득층 식비 지원 제도) 같은 단기적·임시적 재정정책뿐 아니라 장기적인 사회보장 지출도 늘려야 한다"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면 자연히 다양한 계층에서 소비가 늘어나 내수가 촉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드니 핑켈스타인 미 다트머스대 교수도 "저성장 시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업뿐 아니라 정부의 리더십도 혁신이 필요하다"며 "뉴노멀 시대에는 정부 지도자에게 유연성, 개방적인 태도, 신속한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회 불평등 해결해야 지속적인 경제성장

석학들은 각국 지도자들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로 '불평등 문제'를 꼽았다.

크루거 교수는 "미국이 불평등의 덫에 빠지면서 미국 경제가 소비 중심에서 저축 중심으로 변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부유한 가정 아이들이 더 좋은 직장을 구하는 상황이 고착되다 보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 저소득층 가정이 소비를 줄여 경제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불평등 심화로 창업 비율도 떨어지고, 청년층의 생산 활동도 줄어들었다"며 "불평등 문제 완화를 위해 차량 공유 서비스 우버의 운전자처럼 현행법상 자영업자로 분류돼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도 보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핑켈스타인 교수도 "공유 경제의 발달로 전통적인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 사회가 된 만큼 여성 등 사회적 약자가 직장을 구하고 일할 수 있도록 탄력성이 커져야 한다"고 말했다.

크루그먼 교수도 "최근 거론되는 불평등 문제는 소득 수준에 따라 교육 수준의 차이가 커진다는 것"이라며 "호황기에는 교육을 적게 받은 비숙련 노동자도 쉽게 일자리를 구해 반감이 덜하지만, 불황에는 고등교육 숙련자에 대한 니즈가 증가하기 때문에 교육 격차에 따른 소득 격차가 더욱 벌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정치적으로 악용해 인기를 얻으려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일부 정치인들이 문제"라며 "금융 위기 이후 닥쳐온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들은 분열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불평등 해소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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