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에 묘목 싸게 팔고, 다 자라면 되사는 종이업체의 묘수… "농부와 기업이 윈·윈" 생산·소비의 선순환 시스템이 경쟁력

입력 2016.08.20 03:05

'태국의 삼성' 고급 복사용지 업체 더블에이 티라윗 리타본 부회장

태국 북부 나콘랏차시마주(州)에서 벼농사를 하는 농부 파타쏭(Pattaesong)씨는 수년 전부터 자신의 논 주변 자투리땅에 제지용 묘목을 심고 있다. 이 묘목이 나중에 성인 나무가 되면 제지 회사에 되팔아 돈을 번다. 벼농사를 짓고 남은 땅을 활용해 부수입을 얻는 것이다. 파타쏭씨 같은 농부들에게 어린나무를 싼 가격에 제공하고 3~5년 후 이것을 몇 배 가격에 되사는 제지 회사가 있다. 태국 방콕에 본사를 둔 고급 복사용지 업체 더블에이(Double A)다. 더블에이가 태국·캄보디아·라오스 등 동남아 국가의 농부들에게 분양하는 제지용 어린나무는 매년 1억 그루에 달한다.

"농부들은 부수입을 얻고, 더블에이는 종이를 만들 수 있는 고급 나무를 얻을 수 있고, 산림이 파괴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선순환이 이뤄지는 셈입니다."

더블에이는 논과 논 사이의 ‘칸나(Khan-na·자투리 땅이란 뜻의 태국어)’에 제지용 나무를 심는다.
더블에이는 논과 논 사이의 ‘칸나(Khan-na·자투리 땅이란 뜻의 태국어)’에 제지용 나무를 심는다. / 더블에이 제공
더블에이는 국내에선 A4 복사 용지로 잘 알려진 종이업체다. 사무실에선 쉽게 볼 수 있는 A4 용지로, 국내 제지 시장에선 브랜드 인지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더블에이가 '태국의 삼성'이라 불릴 정도로 태국에서 성공한 기업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더블에이는 자국에선 지역사회와 손잡으면서 국민을 돕는 기업이란 이미지를 심었고, 해외에선 저가 노선보다 고급 제품 전략을 택해 '프리미엄' 복사 용지로 브랜드 힘을 키웠다. 전 세계 130개국에 진출해있는 이 회사의 매출은 220억바트(약 6000억원·2015년)로 글로벌 복사 용지 시장에선 12위권이다.

더블에이에서 제지 사업을 총괄하는 티라윗 리타본(Leetavorn·59) 부회장은 "지속 가능한 생산과 소비가 선순환을 이루는 비즈니스 모델이 경쟁 우위를 갖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유니레버·얼라이드 도메크 등 글로벌 기업들을 거쳐 지난 2005년부터 더블에이에 몸담고 있다. 지난달 방한한 리타본 부회장을 만났다.

티라윗 리타본 더블에이 부회장은 “‘칸나 비즈니스 모델’은 기업 이윤을 창출함과 동시에 환경을 보호하고 지역 사회에 혜택을 준다”고 말했다.
티라윗 리타본 더블에이 부회장은 “‘칸나 비즈니스 모델’은 기업 이윤을 창출함과 동시에 환경을 보호하고 지역 사회에 혜택을 준다”고 말했다.
―나무를 다른 사람의 땅에 심었다가 몇 년 후에 다시 사서 종이로 만든다는 사업 모델이 독특합니다.

"태국에서 쌀농사 짓는 논에 가보셨어요? 논두렁 옆에 기다랗게 난 자투리땅이 있습니다. 그런 자투리땅을 태국어로 '칸나(Khan-na)'라고 불러요. 이런 칸나들은 쓰임새 없이 놀고 있는 땅이었는데, 바로 여기에 제지용으로 품종 개량한 고급 묘목을 심기 시작한 것입니다. 태국은 인구 4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대부분 쌀농사를 짓습니다. 태국은 세계적인 쌀 수출국입니다(2015년 기준·1위 인도, 2위 태국). 만일 더블에이가 농부들로부터 논을 사서 거기에 나무를 심으면, 쌀 생산을 위한 땅을 빼앗아버리는 셈이 되죠. 더블에이는 벼 농가와 상생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태국이나 캄보디아처럼 일 년 내내 더운 국가에선 3~5년이면 성목(成木·다 자란 나무)이 됩니다. 더블에이는 이렇게 재배한 나무를 '페이퍼 트리'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100% 페이퍼 트리만을 이용해 복사 용지를 만듭니다."

―농부들이 수익을 올린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럼 더블에이는 금전적으로 어떤 이득을 봅니까.

"더블에이는 농부들로부터 시장 가격에 나무를 되삽니다. 우리가 어린나무를 저렴하게 주었다고 해서 몇 년 후 싼값에 사오는 게 아니지요. 농부들은 다 큰 나무를 더블에이에 팔지, 아니면 다른 제지 회사에 팔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더블에이가 (경쟁 업체와) 가격으로 경쟁하려면 그만큼 섭섭지 않게 가격을 쳐줘야 하죠. 그래서 사실 목재를 사는 비용을 절감한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렇지만 더블에이는 묘목이 어느 지역에 언제 분양됐는지, 얼마나 자랐는지, 나무를 언제 베어야 하는지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경쟁 업체보다 한발 앞서서 적절한 시기에 농부들에게 경쟁력 있는 가격을 제시할 수 있죠. 이런 사업 모델은 제지 공장을 운영하는 데 크게 기여를 합니다. 제지 공장은 쉬지 않고 24시간 내내 돌아가기 때문에 고급 복사 용지를 만들기 위한 좋은 목재를 계속해서 공급해줘야 하죠. 목재가 언제, 얼마나 수급될지를 정확히 파악할수록 생산 공장의 효율성도 올라갑니다."

―다른 경쟁 업체들의 사업 모델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예를 들면 미국과 유럽에선 조림지(인위적으로 만든 숲)에서 나무를 벨 때마다 정부의 허가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기업이 숲을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따라 채벌 허가가 나오기도 하고, 나오지 않기도 하지요. 조림지를 운영하는 것은 기업으로선 상당한 비용이 드는 과정입니다. 더블에이는 숲에 들어가서 나무를 베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우위에 있습니다."

대부분 제지 회사는 종이의 주원료가 되는 펄프를 사와 종이를 생산하거나 조림지를 조성해 직접 펄프를 생산한다. 이에 반해 더블에이는 조림지에 투자하는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제지 생산량과 품질을 제어하고 있다.

―특별히 프리미엄 복사지, 즉 고품질 제품에 주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지 시장은 미국·유럽·중국 등 여러 기업이 들어와 있는 시장입니다. 저품질 시장에선 더 싸게 팔아야 (타사와) 경쟁할 수 있기 때문에 품질과 무관하게 대량생산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이, 싸게 생산하기만 하면 회사의 초점이 흐려지고 목표 의식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더블에이는 1991년 회사 창립 때부터 프리미엄 전략을 택하고 다른 기업들과 차별화된 브랜드 힘을 키워 왔습니다. 우리는 꾸준히 '복사기에 걸리지 않고, 색깔이 선명하게 인쇄되며, 양면에도 인쇄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에 부합하는 양질의 종이를 생산하는 데 주력했지요."

리타본 부회장은 "과거 제지 사업은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주를 이뤘지만 이 나라들 기업들이 점점 문을 닫고, 아시아 제지 기업들이 세계 종이의 주요 공급원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태국, 중국 등 아시아 기업들의 기술이 좋아지고 고품질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제지 산업의 축이 아시아로 옮아 오고 있다는 얘기다. 더블에이도 지난 2013년 프랑스 제지펄프 회사인 알리자이를 인수해, 유럽에서 파는 더블에이 제품은 프랑스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태국 농민들은 칸나에 심었던 나무를 되팔아 얻은 부수입을 자녀 교육비나 생활비에 보탠다.
태국 농민들은 칸나에 심었던 나무를 되팔아 얻은 부수입을 자녀 교육비나 생활비에 보탠다.
―프리미엄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더블에이만의 특화된 기술이 있는 겁니까.

"종이의 품질은 나무가 결정합니다. 더블에이는 더운 기후에서 빨리 성장하는 유칼립투스 나무의 품종을 개량해 제지용 묘목을 심고 있습니다. 더블에이의 묘목은 섬유질 함유량이 높은 게 특징입니다. 섬유질은 종이를 뭉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섬유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죠. 가끔 종이를 평평한 면 위에 올려놓으면 종이 끝이 약간 말리는 경우가 있는데, 본 적 있나요? 복사 용지 끝이 말리는 것은 첫째, 섬유질이 종이에 고르게 분포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섬유질이 고르게 분포되지 않아 수분 함유량이 높은 부분이 생겨서입니다. 만약 사용하는 종이의 수분 분포가 고르지 않으면, 뜨거운 인쇄기 안에 들어갔을 때 종이가 말리기 시작하고 그러면 프린터가 안에서 막히게 됩니다. 1분에 수백 장을 인쇄해야 하는 프린터가 막히면 정말 난리가 나겠죠."

―인터넷이 발달하고 사무 업무가 디지털화하면서 '페이퍼리스(paperless·종이 없는) 사무실'을 추구하는 기업이 많아졌습니다. 앞으로 20년, 30년 후 제지 산업을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저는 완전한 의미의 '페이퍼리스 사무실'은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20여년 전, 미국 IBM이 퍼스널컴퓨터(PC)를 팔기 시작할 때도 사람들은 '더 이상 사무실에서 종이를 쓰지 않게 될 거야'라고 말했죠. 요즘 사무실에서 아직 종이를 사용하나요? 대부분 여전히 종이를 씁니다. 물론 전반적인 종이 소비는 갈수록 감소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저는 종이 소비가 줄어들수록 고품질 종이에 대한 수요는 증가할 것으로 봅니다. 프린팅(인쇄) 산업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프린팅 시장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강력한 기술을 가진 자들만 살아남을 겁니다."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강조하십니다.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생산된 제품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어요. 인도네시아에선 팜유 생산을 위해 매년 나무를 태우는데 이때 발생한 연기가 날아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헤이즈(haze·안개)를 유발합니다. 대기오염이 굉장히 심해지고 건강에도 치명적이지요. 작년에는 유별나게 대기오염이 심각했는데 싱가포르 소비자들 사이에서 '헤이즈 프리(haze-free)' 상품만 사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매년 헤이즈가 발생하는데 문제가 생길 때까지 가만히 있지 말고 직접 행동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싱가포르 환경청에서 헤이즈 주범으로 여겨지는 기업들 명단을 발표했고 마트에선 해당 상품을 모조리 철수시켰죠.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이 소비자들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소비자들의 구매 패턴에까지 이렇게 큰 영향을 준 일은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20~30년 전에도 환경 보호, 지속 가능한 기업에 대한 논의는 있지 않았나요. 예전에는 '헤이즈 프리' 같은 운동이 없었다는 말씀이십니까.

"10년 전만 해도 태국에선 재활용 분리수거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엔 태국 공항에 들어서면 유리·플라스틱·종이·캔 각각 따로 버리게 되어 있죠. 일반 소비자들도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과거엔 헤이즈 프리 같은 운동은 비영리단체(NGO)의 영역이란 인식이 강했는데, 지금은 기업에 투명성과 지속 가능한 생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더블에이 역시 한국 환경단체와 손잡고 '원드림 원트리(One Dream One Tree)' 캠페인에 나섰습니다. 이런 협력이 기업의 투명성을 높여준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더블에이는 아시아 제지 기업으론 처음으로 세계 최대 산림인증단체(PEFC)로부터 글로벌 지속 가능 산림경영 인증을 받았다. 리타본 부회장은 "과거 이런 단체들은 동남아시아 기업과 함께 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며 "이제 그들은 우리를 '숲 밖에서 난 나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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