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밖 경영' 김정주 NXC 대표
지난 2월 말 김정주 대표가 3년째 머무르고 있는 미국 뉴욕 소호의 벤처캐피털컬래버레이티브 펀드(Collaborative Fund·대표 크레이그 샤피로) 사무실을 찾아갔다. 김 대표는 33㎡ 남짓한 좁은 사무실에서 미국인 친구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셔츠에 스웨터를 걸쳤고, 탁자 옆에는 때가 묻은 배낭이 놓여 있었다.
커피를 건네며 말을 붙이자 김 대표는 조심스럽게 22년 동안 넥슨을 이끈 경영 노하우와 미래 계획을 털어놓았다. 배낭 속에서 꺼낸 김 대표의 넥슨 경영은 은둔이나 잠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넥슨을 최고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고 치밀하게 설계한 주유(周遊)였고, 넥슨의 100년 후 미래에 필요한 새로운 인재와 투자처를 찾기 위한 심층 탐사였다.
―넥슨은 토종 정보통신(IT) 스타트업이면서도 본체를 일본 도쿄(東京) 증시에 상장해 일본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글로벌 기업입니다. 글로벌 기업을 처음부터 계획했습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어를 잘 못하고 유학한 적이 없어 외국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인지. 1996년에 게임 '바람의 나라'를 출시한 뒤 1년 만에 영어 버전을, 3년 만에 일본어 버전을 만들었습니다. 또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외교관 자녀들이 모인 신림동 숙소를 찾아가 '메이플스토리'도 7개 외국어 버전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돈을 번 건 2005년부터였습니다. 일본에서도 2009년에 돈을 벌기 시작했죠. 제대로 계산했더라면 (해외 진출은) 할 짓 아닌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래도 게임을 만들면 처음부터 (외국어 버전을 만들어) 들고 나갔던 것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도가 넥슨의 글로벌 DNA를 만든 것입니다. 또 그 덕분에 해외에서 전체 매출의 60% 이상을 버는 기업이 됐습니다."
회사 성장의 변곡점마다 승부사다운 '한 방'
김 대표는 2014년 2월 넥슨 일본법인 대표를 최승우에서 오웬 마호니로, 넥슨코리아 대표를 서민에서 박지원으로 교체, 게임업계를 놀라게 했다. 최 전 대표는 1999년에 넥슨에 합류해 글로벌화에 큰 역할을 했고, 서 전 대표는 입사 사번 10번 안에 들 정도로 김 대표와 동고동락한 창업 동지였다. 하지만 김 대표는 성장의 변곡점마다 기존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외부 인물로 새 경영진을 짠 후 전권을 주는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다.
―'은둔의 경영자'라는데, 오히려 '바람의 경영자' 같습니다. 공식 직함도 없이 회사 밖을 돌면서 글로벌 게임 회사를 키웠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1994년에 강남의 한 오피스텔에서 창업했습니다. 2000년 새 빌딩으로 이사하면서부터 회사에 책상도 두지 않고 밖을 돌았습니다. (회사에서) 내가 경영했다면 중간에 망했을 것 같습니다. 초창기부터 넥슨엔 좋은 사람이 많았고, 그들에게 전권을 줬습니다. 지금도 월간 보고서는 물론 회사 경영 관련 보고서를 전혀 보지 않습니다.
―시스템으로 경영을 하고 발탁한 인재에게는 권한 이양을 확실히 했다는 뜻 같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경영에서 손을 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규모에 상관없이 제가 결정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전혀 엉뚱해서 말도 안 되는 일이거나 누가 봐도 웃긴 일이지만 (회사) 영역 밖에서 뭔가 하게 되는 일이 있죠. 손을 놓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창업자가) 결정해야 되는 일이 있으면 제가 결정합니다."
―2009년 '던전앤파이터' 개발사 네오플을 3852억원에 인수한 것은 '신의 한 수'로 꼽힙니다. 그런 대형 인수합병안은 직접 결정하십니까.
"인수합병(M&A)해서 성공하면 100명 정도가 자기 공이라고 얘기합니다. M&A 결과가 시원찮으면 모두 '김정주 탓'이라고 하죠. 당시 데이비드 리 넥슨 일본법인 대표가 인수 아이디어를 냈고, 네오플 허민 대표를 만나서 최종 설득하는 것은 내 몫이었습니다. 허 대표는 게임업계를 떠나 다른 사업을 하는데, 1000억원을 허 대표에게 투자했습니다. 허 대표가 술을 마시지 않아서 서울에 가면 영화를 보면서 같이 놉니다. 그런 일이 내 일이지요."
―밖을 돌면서 또 무엇을 하나요.
"관심 가는 회사가 있으면 먼저 이메일로 만남을 청하고 약속이 되면 직접 갑니다. 이전에 유명 게임 회사들에 넥슨한테 게임을 달라고 조르기도 했습니다. 잘나가는 게임을 줄 리가 없었죠. 계속 만나면서 버리는 게임이라도 달라고 해서 성사시켰습니다. (넥슨의 성장 덕분에) 이제 메이저 게임 회사들이 겨우 만나주는 정도가 됐습니다. 몇 해 전 이브 온라인(Eve Online) 축제가 열리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를 찾아갔습니다. 이브 온라인은 게임을 시작하면 적어도 일주일 이상 자리에 꼭 앉아 있어야 할 정도로 몰입도가 높은 게임입니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석 달 동안 고립되는 아이슬란드 환경에 꼭 맞는 게임이었어요. 이브 온라인처럼 특색 있는 게임을 (투자 대상으로) 눈여겨보고 친분을 맺곤 합니다."
넥슨은 이달 10일 전략 게임인 '도미네이션즈' 개발사인 미국의 빅휴즈게임스 주식을 100%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넥슨은 모바일 게임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인수합병과 저작권 구매 전략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김 대표의 물밑 움직임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넥슨의 글로벌 DNA와 김 대표가 떠도는 것은 동전의 앞뒷면 같습니다. 뉴욕에선 어떤 일을 합니까.
"넥슨이 글로벌 시장에서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하지만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뉴욕에서 미국 시장뿐 아니라, 여기저기 다른 시장을 보고 있습니다. 한국 게임 시장은 이미 굉장히 성숙한 시장이어서 외국에서 더 잘 돼야 회사가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한국 게임 회사 중) 먼저 (해외에) 가서 교두보를 확보하고, 친구도 좀 더 만들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미국 서부(실리콘밸리) 대신 뉴욕을 선택한 것은 유럽과도 가깝고, 테크(기술) 외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지닌 스타트업이 많은 점을 고려했습니다. 이곳(컬래버레이티브 펀드 사무실)은 나에게 도서관입니다. 좋은 사람과 엉뚱한 아이디어를 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걷다가 동네 서점을 보면 보고 싶은 책을 사기도 하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합니다."
김 대표는 현재 머무르고 있는 컬래버레이티브 펀드에 출자를 하고, 파트너 자격으로 펀드의 스타트업 투자에 참여하고 있다. 이 펀드는 식물로 만든 고기(페이크미트), 식용 곤충으로 만든 영양바, 차량공유 서비스 등 다양한 곳에 투자했다. 또 NXC 계열사를 통해 온라인 레고 거래 사이트인 브릭링크, 노르웨이 유모차 회사 스토케에도 투자했다.
―얼마나 더 밖을 돌 생각이고, 다음 행선지는 어디인가요.
"가족과 함께 3~5년마다 한 번은 도시, 한 번은 시골에 사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크며 제주도에 있고 싶어 해서 뉴욕에는 혼자 와 있습니다. 가족이 있는 제주와 뉴욕, 그리고 전 세계 사람을 만나는 출장에 각각 3분의 1씩 쓰는 게 지금 저의 삶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3~5년마다 새로운 곳을 찾을 것 같습니다. 뉴욕에 온 지 벌써 3년이 넘어 슬슬 옮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엔 유럽 남부를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글로벌 게임 시장의 판세와 성장세는 어떻게 보십니까.
"글로벌 저성장은 막을 수 없는 흐름입니다. 그러면 콘텐츠 수요가 커지고 게임의 비중도 확대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는 시간에 콘텐츠를 소비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어느 날 갑자기 콘텐츠 소비의 핵심 플랫폼이 되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렵습니다.
온라인 콘솔 게임의 강자인 액티비전 블리자드가 모바일 게임의 강자인 킹을 샀습니다. EA도 다시 살아나서 모바일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일본 닌텐도가 스마트폰 트렌드에 대응하려면 얼마나 고민이 많겠습니까. 넥슨의 미래를 생각하면 암울합니다. 게임업계는 부침이 심해 넥슨도 매일매일 발버둥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도 수치(경영 목표)를 맞추면서 살아남을 것입니다."
―중국이 게임시장을 주도하면서 한국 게임 산업이 위기를 맞은 것이 아닌가요.
"국내 게임 스튜디오에서 세계적으로 히트 칠 만한 게임을 개발할 능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게임 개발력은 한국이 전 세계에서 최고입니다. 우리나라만큼 좋은 인재들이 게임을 만드는 곳이 없습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해서 이렇게 재미있는 사업을 할 수 있는 게 한국밖엔 없습니다.
한때 한국 신발 산업은 세계 최고의 공장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이키가 100조원(시가총액)대 회사로 크는 동안 모두 하청업체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국내 게임 산업이 협업을 해야 나이키와 같은 가치를 지닌 기업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다행히 넥슨과 게임 회사에 더 좋은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이제 업력이 쌓여서 곧 망할 것 같지 않으니 인재가 들어오는 것이죠. 한국 게임 산업이 세계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100년 이상 지속하는 기업, 100조원대 가치를 지닌 기업을 꿈꾼다고 들었습니다.
"(게임 산업의 경우) 재미있게 게임에 몰입하면서도 게임 회사에 욕을 하곤 합니다. 디즈니랜드에 가보니 아이들이 긴 줄을 서고 고생을 해도 행복해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 디즈니가 부러워서 디즈니 사람을 만나는 등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디즈니는 뻔한 스토리를 가져다가 정말 어린이들이 좋아하도록 만들면서 좋은 회사라는 이미지를 오랫동안 축적해 왔습니다. 디즈니처럼 해야 100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넥슨도 어떻게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좋은 회사라는 느낌을 줄 수 있을지 깊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자 김 대표는 '소주 한잔 하자'면서 배낭을 메고 근처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이야기하느라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자, '내려서 그냥 걷자'면서 뉴욕 밤거리에 나섰다. 바람의 경영자의 세상 돌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궁금했다.
☞넥슨과 김정주 대표
김 대표는 예상을 깨고 넥슨을 2011년 일본 도쿄 증시에 상장시킨 후 미국, 유럽, 대만 등 세계 각지에 진출하면서 글로벌 게임회사 경영 시스템을 갖췄다. 김 대표가 이끄는 NXC는 넥슨의 최대 주주로서 지주회사 역할을 한다. 넥슨 아래 넥슨 아메리카·넥슨 모바일·넥슨 코리아·넥슨 유럽 등을 두고 있다. 넥슨 코리아 아래 네오플·엔도어즈·넥슨 타이완 등이 연결되어 있다. 넥슨은 연결재무제표 기준으로 2015년 1조8086억원 매출을 올렸고 이 중 1조770억원이 한국 이외 지역의 매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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