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혁신안이 블록 하나만 못하더라

입력 2016.03.26 03:05

[Cover Story] 레고 왕국 다시 쌓은 크누스토르프 CEO
"5~9세 고객이 회생 아이디어 줘… 팬들은 레고가 쉬워지는 걸 반대했다"

2003년 6월 레고그룹 이사회. 입사한 지 2년도 안 된 36세의 전략 개발 담당자가 백발이 성성한 이사들 앞에 섰다.

매출 하락 상황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은 그는 가차없는 분석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올해 매출은 30% 줄었는데 운영 비용으로만 2억5000만달러를 들여야 합니다. 내년에는 순손실이 지금의 두 배가 될 것입니다. 현재 확보된 신용 한도도 없습니다.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으면 그룹의 토대가 무너질 것입니다."

레고 왕국 다시 쌓은 크누스토르프 CEO
입사 3년차 신참 때 레고 CEO 자리 오른 크누스토르프.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 였다. / 그래픽=김의균 기자, 사진=블룸버그
신참의 독설에 이사진의 불만이 속출했다. 레고는 수십년간 일한 직원들이 수두룩한 곳이다. 한 이사는 "내년쯤 스타워즈 시리즈가 새로 나오고 미국 불황이 끝나면 상황은 개선될 것"이라며 "뭘 제대로 알고나 말하는 것이냐"고 말했다. 신참은 회의실을 나오며 새 직장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듬해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예르겐 비그 크누스토르프(Knudstorp·48)다. 그를 눈여겨본 창업자의 손자 셸드 시르크 크리스티안센이 그에게 직접 경영을 맡긴 것이다. 크누스토르프 CEO는 그때부터 12년째 그룹을 이끌고 있다. 지난해에는 바비인형으로 유명한 마텔을 제치고 레고를 장난감 업체 1위 자리에 올려놨다. 영국 브랜드 평가기관 '브랜드 파이낸스'는 2015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 1위로 레고를 선정했다.

위클리비즈는 2009년 크누스토르프 CEO를 만난 일이 있다. 회사를 흑자(黑字)로 전환시킨 비법, 글로벌 불황에도 선전하는 비결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생존 비법은 상황에 맞게 진화를 거듭하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레고의 매출은 당시의 3배가 넘는다. 지난해 영업 이익률은 34.1%에 달한다. 구글과 애플보다도 높다. 나비 라드주 영국 케임브리지대 저지경영대학원 교수와 데이비드 로버트슨 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교수는 레고를 '기업 혁신의 교과서'라고 평가했다.

이달 1일 크누스토르프 CEO를 만나기 위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자동차로 3시간 걸리는 빌룬드를 다시 찾았다. 기차도 다니지 않는 시골이란 점은 변하지 않았다. 큰 키에 마른 몸, 해리포터 안경을 쓴 크누스토르프 CEO의 모습도 그대로였다.

―레고 그룹은 다른 기업들에 혁신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그런가요? 레고는 오히려 10년 전 혁신 과잉으로 파산 위기에 처했던 회사입니다. 절대로 혁신이 없어서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었어요. 수많은 혁신을 적절하게 배열하고 속도를 조절할 줄 몰랐던 거죠. 레고는 1990년대 성장이 힘들어지자 새로운 임원진을 외부에서 영입하고 여러 가지 신(新)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아동들은 블록 같은 전통적인 장난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외부 컨설턴트의 분석에 따라 전자 장난감 사업을 확대했고, 미국 시장을 뚫기 위해 미니 피규어(mini figures) 대신 근육질 남자 모형 '잭 스톤'을 개발했어요. 액션 피규어(action figure·관절이 움직이는 사람 모양의 캐릭터 인형)가 유행하자 마블로 유명한 해즈브로에서 개발자도 데려와 히어로물 '갤리도어'도 만들었지요. 2~3년마다 레고랜드를 개장하고, 2005년까지 300개의 레고 스토어를 열려고 준비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사업을 하려고 하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잘 실행할 수 없어요. 비용이 많이 드는 신사업은 대차대조표에도 큰 부담을 안깁니다. 당시 레고는 혁신 강박증에 빠져있었지요."

―어떻게 상황을 개선했나요.

"제가 태어난 곳은 빌룬드에서 차로 1시간 떨어진 프레데리시아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레고와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레고의 유산(遺産)을 잘 알았습니다. 레고가 사라지면 사람들은 무엇을 가장 그리워할까요? 블록과 미니 피규어입니다. 그래서 저는 레고의 핵심인 블록에 집중했습니다. 구조조정은 블록과 관계없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기본으로 돌아간 것이지요."

구글 공동창업자 래리 페이지는 레고 팬이다. 구글 로고에 사용되는 빨강·파랑·노랑은 레고의 기본 블록에서 따왔다. 대학 시절 그는 레고로 잉크젯 프린터 케이스를 제작한 적도 있다. 구글 직원을 뽑을 때면 레고 블록으로 창의성을 보기도 한다.

레고 매출의 20%는 성인을 상대로 한 것이다. 전 세계 어디에나 레고 마니아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레고의 고객층이 넓어진 것은 1990년대 후반 대중성을 노리고 전 세계 다양한 연령층을 공략할 때가 아니었다. 반대로, 핵심 고객에게 집중했을 때였다.

레고 왕국 다시 쌓은 크누스토르프 CEO
거래처와의 관계 개선이 우선

―최고경영자(CEO)가 되신 후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기존 거래처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레고의 주요 고객은 어린이들입니다. 그러려면 구매 업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레고는 그동안 유통 채널을 확대하며 기존 거래처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했습니다. 전 CEO가 된 후 전 세계를 돌며 주요 협력업체들을 만났습니다. 다니는 곳마다 분노가 쏟아졌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원하는 제품군을 물은 후, 그에 맞게 제품을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제품 개발 기간도 개선했습니다.”

―유통 채널을 복구하는 게 제일 급선무라고 보신 것이군요.

“그다음엔 핵심 고객들과의 관계 회복에 나섰습니다. 레고의 핵심 고객층은 지역적으로는 독일과 네덜란드, 연령으로는 5~9세, 성인층이었습니다. 그동안 레고는 컨설턴트들의 말에 따라 새로운 고객을 영입하기 위해 블록을 쉽게 만들고 디자인을 바꿨습니다. 하지만 기존 고객들은 레고가 쉬워지는 것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습니다. 그래서 ‘레고 대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기존 성인팬 커뮤니티와의 접촉을 늘리고 그들의 의견을 제품에 반영했습니다. 블록을 좋아하는 어린이들로 구성된 ‘키즈 이너 서클(kids inner circle)’을 만들어 그들이 원하는 아이디어도 얻었습니다. 어린이들은 결코 재미없는 제품을 사지 않습니다. 그들은 좋은 디자이너가 돼 주었습니다.”

―레고 블록 부품 수를 줄인 것도 같은 의미인가요.

“원래 레고 개발팀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세트를 만들 수 있는 총 제조비용을 할당받아 진행합니다. 하지만 1990년대 말부터 창의력 확대를 이유로 비용 한도 초과를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비슷한 특수 블록들만 많아진 것이지요. 특수 블록이 늘어난다는 것은 수익성이 낮아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블록 1만4200개를 일일이 검토해 필요 없는 블록을 줄였습니다. 저는 이 방법이 창의성을 감소시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의성은 오히려 주어진 공간이 제한될 때 더욱 촉진된다고 생각합니다. 레고는 블록 자체로도 충분히 혁신적이기 때문이지요.”

최고만이 최선이다

―레고 블록 특허권 만료에 따라 나노 블록 같은 유사 제품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레고만의 차별점은 무엇입니까.

“창업 때부터 내려오던 정신인 ‘최고만이 최선이다’입니다. 레고 블록은 밟으면 깨지지 않고 오히려 발이 아픕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줘도 떼었다 붙였다 하는 기능은 멀쩡합니다. 이 정신은 레고가 나무 장난감을 만들던 시기부터 내려오던 것입니다. 당시 레고 공방에서 일하던 창업자 올레 키르크의 아들 고트프레드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오리 인형에 니스를 세 겹 바르지 않고 두 겹만 발랐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올레는 아들에게 격분하며 기차역으로 가 오리 인형을 모조리 회수한 후 한 겹씩 덧바르도록 지시했습니다.

장난감 업계는 진입 장벽이 거의 없고 고객층이 변덕스럽기로 유명합니다. 제조 비용도 많이 드는 업종입니다. 게다가 핵심 제품인 블록은 특허로 보호되지 않습니다. 이런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공법으로 가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CEO가 됐습니다. 기존 임원진과 문제는 없었나요.

“제가 CEO가 됐을 때 그들은 10년 정도 힘든 시간을 보낸 뒤였기 때문에 경영진 자체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CEO가 된 후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기보다는, 본인이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먼저 물었습니다. 회사의 문제와 본인이 해야 할 일은 직원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는 레고의 전통이 됐습니다. 사업 구조 조정 과정에서 레고랜드 등 수익이 나지 않는 부분들을 접을 때도 직원들의 의견부터 물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직원들이 절 새로운 리더로 인정해 줬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레고 전략을 어떻게 가져가실 것인지요.

“저희는 미래 성장 목표에 대한 정확한 숫자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세계의 더 많은 어린이가 레고를 가지고 놀게 하겠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특히 중국 시장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중국 도심뿐 아니라 외곽에서의 수익도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성숙 시장인 한국과 일본, 홍콩, 대만 등에서의 성장도 확대되고 있어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성숙 시장에서는 저출산으로 어린이들의 수가 적어지고 있습니다.

“레고는 소비재 산업입니다. 더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하면 고객들은 구입 빈도와 금액을 높입니다. 저희 제품 중 프렌즈, 닌자고, 넥소나이츠 등은 모두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제품들은 한 제품을 샀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제품도 또 구매하도록 만듭니다. 레고도 과거엔 세계 경제 흐름 등과 매출이 깊은 상관관계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10년을 보면 글로벌 경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고객들이 물건을 반복적으로 구매할 수 있도록 더 재미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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