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의 경영학' 배워야 진짜 기업가

입력 2016.03.19 03:06

[Cover Story] 피터 투파노 英 옥스퍼드대 사이드 경영대학원장

피터 투파노 英 옥스퍼드대 사이드 경영대학원장
"무서운 모험 위해 온 힘을 모으리라. 자, 가장 고운 모습으로 세상 사람 현혹하고, 알고 있는 못된 것은 가면으로 가립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의 대사)

지난 2월 마지막 주 영국 옥스퍼드(Oxford)대의 사이드(Saïd) 경영대학원(MBA) 강당. 옥스퍼드대 근현대문학 교수가 강단에 올라 MBA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왕 맥베스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 탐욕을 살펴보는 수업이었다.

MBA의 인문학 강의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경영자의 시야를 넓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리더로서 역량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점을 감안해도 사이드의 MBA 과정에는 인문학 강의가 많다. 문학 강의 외에도 작곡가와 지휘자의 리더십, 역사적 유물에서 얻는 아이디어 등 철학·문학·역사·음악·연극에 대한 강의가 이어진다.

왜 그러는 걸까. 피터 투파노(Tufano·59) 사이드경영대학원장이 밝히는 이유는 다소 의외였다.

"미국과 영국의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 다소 다릅니다. 미국에서 창업하는 기업가들이 유니콘(기업 가치가 10억달러 넘는 비상장 창업 초기 기업) 명단에 올랐는지를 성공 기준으로 본다면, 영국에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효율성에 초점을 맞춘 리더십보다는 인류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하고 배려와 조화를 중시하는 리더십을 중요시한다는 얘기죠. 그러려면 여러 학문을 깊게, 또 넓게 접해야 합니다."

옥스퍼드식 '배려의 경영학'을 설파하는 투파노 원장은 사실 옥스퍼드대 출신은 아니다. 하버드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가르치며 33년 넘게 하버드에 몸담았던 '순혈 하버드파'이다. 하버드 MBA에서 소비자 금융에 대해 강의하고 하버드 MBA 부원장을 지내며 창업지원센터인 '하버드 이노베이션 랩'을 만들었다. 그런 그가 지난 2011년 옥스퍼드대 사이드에 와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옥스퍼드대가 갖춘 정치·철학·문학 등 인문학적 장점을 경영자 과정에 융합하는 것이었다. 저성장 시대에 떠오르고 있는 유연한 리더십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사이드경영대학원은 학교 설립 당시 2000만파운드(334억원)를 기부한 시리아계 사우디 아라비아 기업가 와픽 사이드(76)의 이름을 땄다. 사이드경영대학원 교수실에서 만난 투파노 원장은 개인 교습이라도 해 주듯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김의균 기자
일러스트=김의균 기자
―효율적이고 영웅 의식을 강조하는 리더십 대신 인문학과 결합된 리더십이 떠오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효율적 리더가 좋은 리더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효율성만 강조하는 경영학 관점의 리더십만 알면 편향될 수 있습니다. 리더는 다양한 가치를 고려해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여러 가치가 충돌할 때 어떻게 더 나은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는 리더가 돼야 합니다. 저는 교수 시절부터 칠판에 '1000명이 백만장자가 되도록 돕기보다, 백만명이 1000달러씩 모을 수 있게 돕는 경영자가 되자'고 쓰고 다녔습니다."

―사회적 가치를 이해하는 방식의 하나로 인문학을 강조하신다는 얘기인가요.

"꼭 인문학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앞으로 뛰어난 창업가들은 과학자, 엔지니어, 의사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과 짝을 이룰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혁신이 나오는데, 여러 학문을 폭넓고 깊게 접하는 사람이 유리합니다. 또 설령 숫자만 잘 아는 대단한 금융인, 유명한 창업가, 돈 잘 버는 기업가가 되더라도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수 있고 세상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모를 수 있습니다. 금융, 회계, 마케팅과 같은 것은 기본적으로 갖추되 그 외에 세상을 볼 줄 아는 것이 경영가의 중요한 자질입니다."

―경영가는 사업을 통해 이익을 내고 고용을 하면서 사회의 일익을 담당합니다. 사회적 책임감 등을 강조하는 것은 기업 본질과는 관련이 적은 게 아닐까요.

"사회적 스타트업 '오프그리드 일렉트릭(OffGrid Electric)'은 태양열 기술을 이용해 아프리카 대륙의 탄자니아와 르완다에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경영, 경제, 생태, 건설, 에너지 등 여러 분야 창업가들이 저개발국 에너지 공급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고자 뜻을 모아 시작한 사업입니다. 이미 수천만달러를 투자받고 있지요. 사회적 가치를 이루면서도 착실한 기업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회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은 단순히 듣기 좋은 얘기여서가 아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반성 때문이다.

그가 이전 근무했던 하버드 MBA는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주범으로 몰렸던 수많은 투자은행가와 기업가, 투자자가 거쳐간 곳이기도 하다. 금융 위기 직후인 2009년 하버드 MBA는 교수 6명을 모아 학교가 어디서부터 잘못한 것인지, 앞으로 리더십은 어떻게 길러야 할지를 연구했다. 투파노 학장도 그 교수진 중 한 명이었으며, 그때 결론이 사회적 책임과 배려를 강조하는 리더십이었다는 것이다.

"예비 기업인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놓친 부분,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장기적으로 위기에 대응할 능력을 가르치지 못했고 전체를 보는 사고를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기업이나 제품을 국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일부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리더들이 근시안적이고 미시적으로 기업을 이끄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또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을 완전히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하는 관행이 있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국가와 사회에서 공공과 민간의 경계는 상당히 아리송하죠. 사회적 가치를 공공 역할로 떠넘기는 분위기가 위기를 낳은 것입니다."

피터 투파노 英 옥스퍼드대 사이드 경영대학원장
피터 투파노 英 옥스퍼드대 사이드 경영대학원장.
투파노 원장〈사진〉은 스스로도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가다. 그는 2000년 ‘D2D(Doorways To Dream) 펀드’라는 비영리 재단을 만들었다. 개인 소비자들에게 금융 지식을 교육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금융상품을 개발하는 재단이다.

그는 저소득층 저축을 격려하는 ‘복권 연계형 저축(Prize-linked savings)’을 제안해 미국 내 정책화시켰다. 2016년 1분기 현재 미네소타, 미시간, 캔자스 등 16개 주(州)에서 도입된 상태다.

주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예를 들면 예금주가 25달러씩 저축할 때마다 월별, 분기별 복권 추첨에 자동으로 참여하게 된다. 당첨되면 뜻밖에 큰돈을 타는 것이고 낙첨돼도 전혀 잃는 것이 없다. 오히려 꾸준히 저축한 덕분에 이자 수익을 얻는다.

이 상품은 저축률이 워낙 낮은 미국 경제에서 저소득층의 경제력을 키워주는 데 직접 영향을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5년 기준 미국의 가계 저축률은 4.8%로 스위스(15%), 독일(9%), 한국(7%)에 비해 훨씬 낮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 중에서도 바닥권이다. 금융 위기 당시 부채는 많은데 모아둔 돈이 없는 미국 소비자들이 큰 타격을 입으면서 가계저축을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기 위한 정책적 분위기가 형성됐다.

―제안하신 복권 연계형 저축 상품이 최근 미국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제안한 지는 여러 해가 됐습니다. 복권 연계형 저축 상품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영국에선 수십년도 더 된 상품인데 미국에선 법적 장벽이 높았습니다. 원리는 사람들이 돈을 모으도록 격려하기 위해 복권, 상(賞)이라는 요소로 넛지(적절한 행동을 유도하는 것)하는 것입니다. 최근 몇 주 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슬람권 국가 등 여러 국가에서 복권 연계형 저축에 대한 문의가 들어왔습니다. 이런 금융 상품이 다양한 경제 환경에 적용될 수 있다는 걸 뜻합니다.”

―소비자의 행동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경제학에 적용하는 행동경제학의 한 예로 평가됩니다.

“미국에선 역사적으로 저축률이 낮았습니다. 은행들이 저소득층 사람들에게 저축 좀 하라고 격려했지만 잘 먹히진 않았지요. 우리는 ‘돈 조금 쓰고, 조금 모으세요(spend some, save some)’라는 슬로건으로 캠페인을 했습니다. 이전까진 저소득층한테 무조건 ‘저축하라(save it)’고 말했지만 돈을 안 쓰고 모으기만 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지요. 사람들에게 지출하고 싶으면 지출하고, 또 저축하고 싶으면 저축하도록 행동의 자유를 준 것이 성공 배경이었다고 봅니다.”

―오래전부터 저소득층의 소비자 금융에 대해 연구해왔습니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겠다는 맥락입니까.

“초임 교수 시절 로스앤젤레스 남부의 가난하고 범죄율 높은 동네를 방문했던 것이 계기였습니다. MBA에 입학할 정도로 축복받고 풍족한 사람들을 위한 금융을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금융 지식이 낮고 제도의 혜택을 거의 못 받는 저소득층을 위한 금융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단순히 자선 활동을 하고 싶다면 그냥 수표를 쓰면 되죠. 하지만 제가 잘 아는 것, 또 잘하는 것이 금융이기 때문에 그런 연구를 한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사이드 경영대학원이 생각하는 ‘주목해야 할 미래 이슈’는 무엇입니까.

“여러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앞으로 25~30년간 사회를 바꾸고 나아가 산업 지형도를 변혁시킬 이슈들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인구 노령화 및 구조변화와 도시화, 빅데이터, 물 부족 등 자원고갈, 기후변화, 미래 직장, 헬스케어 등을 꼽았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서유럽, 중국, 일본처럼 노령화와 인구구조 변화를 겪고 있는 국가들은 헬스케어, 금융 시장, 주택 시장, 소비재 시장 등 전방위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또 물 부족이나 물 관리는 런던을 비롯한 크고 작은 도시가 갖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옥스퍼드대 보들리 도서관.
옥스퍼드대 보들리 도서관.
―미래 이슈에 어떻게 대비하라고 가르치십니까.

“사이드 경영대학원 학생들은 지난 한 해 동안 ‘물’을 주제로 다양한 연구를 펼쳤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선 7000만명가량이 지원단체들이 만들어 준 우물에서 물을 퍼다 마셨다가 비소 중독증을 앓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장기적으로 비소에 노출되면 건강에 얼마나 위험한 영향을 주는지 몰라 일어난 사례이죠. 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건 방글라데시 같은 개발도상국뿐만 아닙니다. 런던 템스강의 경우 수질을 독점 관리하는 업체가 소비자들의 우려보다 주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업 활동을 하면서 문제가 됐습니다. 이런 문제를 파악하고 정부, 민간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대책을 제안했습니다. 위에 언급한 이슈들이 어떤 시사점을 갖는지, 인류에게 정말 임팩트를 남길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일까 고민해야 합니다.”

―저성장 시대를 맞이하면서 세계경제에 대해 암울한 전망이 많습니다.

“어느 시나리오가 펼쳐지든 어떻게 진화할지, 역학 관계가 어떻게 바뀌는지 관찰하고 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교육자라서 그런지 최소 10년 단위의 장기적 관점으로 세계경제를 바라보는 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낙관적입니다. 현재 여러 기업이 개발하고 있는 빅데이터, 배터리 등 핵심 기술들은 앞으로 몇개월이 아니라 수년, 수십년간 세상을 더 진보시킬 것입니다. 우버, 에어비앤비처럼 공유경제 비즈니스들이 한동안 산업을 이끌면서 소비자들에겐 더 편리함을 가져다 주겠죠. 스타트업이나 기업들이 살아남지 못하더라도 기술은 살아남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블록체인(거래 데이터가 공유되는 개방형 방식으로 가상화폐인 비트코인 거래에 적용됨) 기술은 가상화폐를 유행시키지 못하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중요하게 쓰일 겁니다. 이미 영국에선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다이아몬드를 거래하는 업체도 생겨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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