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권 없애자? 범죄자 현금만 잡아내는 비법

    • 마크 길버트(블룸버그 칼럼니스트)

입력 2016.02.27 03:04

고액 인출 기한 주고 디자인 바꾼 새 고액권 도입
선량한 시민 피해 안주고 贊反 양측 모두 만족시켜

미국의 재무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가 최근 100달러짜리 지폐를 없애야 한다는 특이한 주장을 내놨다. 고액권은 부패와 범죄에 악용되기 쉽기 때문에 화폐를 발행해 생기는 이익보다 문제가 더 많다는 것.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도 "500유로짜리 화폐가 불법행위의 수단으로 활용된다고 보는 시각이 늘고 있다"며 고액권 발행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고액권 폐지론'에 숨은 의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ECB의 경우에는 소비와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정책 금리를 마이너스로 떨어뜨리기까지 했는데, 이런 공격적인 통화정책이 현금 보유자에게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보관하기 쉬운 고액권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정부가 근로자의 수입과 지출을 추적하기 위해 현금 자체를 없앨 것이란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온다. 이 사안에 대해 다룬 칼럼을 소개한다.〈편집자

마크 길버트(블룸버그 칼럼니스트)
마크 길버트(블룸버그 칼럼니스트)
'현금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장의 한쪽에는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와 래리 서머스 전(前) 미 재무장관이 서 있다. 범죄와 싸우기 위해 고액 지폐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 진영에선 '고액권 발행 중단론'이 아예 '실물화폐 폐기론'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의심한다.

드라기 총재가 주장한 '500유로권 악용론' 뒤에는 조금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현금이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럽연합 회원국 경제권) 경기를 살리기 위해 ECB가 시행한 마이너스 금리 정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금리를 마이너스까지 낮추면 은행 계좌에 든 돈에는 수수료를 부과할 수 있지만, 침대 매트리스 밑에 숨겨둔 지폐에는 영향을 못 미친다.

고액권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데이비드 스톡맨 전직 미 예산관리국장이다. 그는 "고액 지폐를 없애자는 캠페인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유는 단 하나,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시행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한발 더 나가 그는 "(고액권 폐기는) 중앙은행이 수백만 미국인의 부와 저축을 몰수하기 위한 길을 닦는 일"이라며 "이런 방법으로 도박장 같은 월스트리트 금융가를 규제할 수 있으리라 보지 않는다"고 공격했다.

극단적으로 정책 당국의 의도를 의심하는 자유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스톡맨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왜 하필 지금인가? 드라기 총재는 2002년부터 시중에 유통된 500유로짜리 화폐에 대해 왜 지금에야 우려를 표출하는 걸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설을 통해 "정치인과 중앙은행은 현금 보유자들이 마이너스 금리라는 실험적인 통화정책의 효과를 갉아먹을 것을 우려한다"며 "과거에 화폐 역할을 했던 금과 은을 폐기했듯이 장차 실물통화까지 금지하는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팽팽히 맞서는 두 진영 모두 수긍할 만한 절충안은 있다. 현금을 쌓아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범죄자들이 숨겨둔 현금은 무용지물로 만드는 방법이다. 우선 고액 지폐를 인출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6개월 주고, 자금세탁금지법을 강력하게 적용해 불법 자금에 대한 은행 거래를 금지한다. 그다음 디자인을 바꾼 새 고액권을 도입한다. 그러면 마약상 같은 범죄자들이 은행에 맡겨둔 돈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고액권 교환 정책이 또 시행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서머스 교수는 "50달러 또는 100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닌 화폐를 발행하지 말자"는 국제적인 합의를 원한다. 디자인을 바꾼 고액권을 도입하는 방안도 그가 구상한 것처럼 대대적인 연합이 이뤄져야 효과가 있다. 1000달러짜리 지폐와 맞먹는 고액권인 1000프랑권을 발행하는 스위스만 해도 고액 화폐를 폐기할 가능성을 일축한 상태다. 하지만 고액권 반대론자들이 조금 더 솔직하게 의도를 밝힌다면 예금 인출과 화폐 재발행을 통해 선량한 시민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은 채 범죄자의 자산만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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