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인도식 경영'이다

입력 2016.01.23 03:04

카리스마보단 배려… 변화 위한 변화보단 점진적 변화… 돌파력보단 유연성… 단기 이익보단 장기적 관점

최근 '알파벳'이란 이름으로 재출범한 구글은 작년 8월, 래리 페이지 최고경영자(CEO)를 이을 새 CEO로 인도 출신의 선다 피차이를 내세웠다. 그 3개월 전에는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사장이 역시 자신의 후계자로 인도 출신의 니케시 아로라 부사장을 지명했었다.

마이크로소프트(MS), 노키아, 펩시코, 마스터카드, 어도비에서도 모두 인도 출신의 CEO가 등장했다. 어느 순간 둘러보니 세계 유수 기업들의 수장이 인도인으로 채워져 있었다. 인도의 주요 수출품은 'CEO'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CEO뿐만이 아니다. 인도는 대주주도 수출했다. 인도는 세계 최대 알루미늄 기업인 캐나다의 노벨리스, 유럽 내 2위였던 영국·네덜란드 제철기업 코러스의 주인이 됐는데, 이 기업들은 그 후 큰 잡음 없이 수익성을 회복 중이다.

인도는 전체 인구 중 10%가 절대 빈곤층인 나라다. 아직도 인도 빈민가에서는 매년 100만명씩 아이들이 얼어 죽는다. 어떻게 이런 나라에서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역량이 나오고 글로벌 CEO가 탄생하는 것일까. 경영학자들 사이에선 최근 '인도식 경영'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100년간 전 세계를 휩쓴 경영 방식은 효율을 중시한 '미국식 경영'이었다. 투입 대비 산출량을 중시하는 '프레드릭 테일러'의 이론에서 시작해 잭 웰치 전(前)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에서 완성된 미국식 경영은 전 세계 경영인들이 배워야 할 교과서였다.

그러나 '인도식 경영'은 포용력을 중시하는 대조적인 스타일의 경영이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중시하는 C.K. 프라할라드의 이론에서 출발해 구글과 MS라는 양대 IT그룹의 CEO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세계 1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 원장 역시 인도인이다.
인도 이미지
①카리스마보다 ‘배려의 리더십’

사티아 나델라 MS CEO는 2012년 서버 부문 사장 당시 MS 애저(Azure·클라우드 서비스) 행사를 주관하며 개발자들의 프레젠테이션 시간을 오전 9시에서 오후 1시로 옮겼다. 개발자 대부분이 밤늦게까지 일한다는 점을 배려한 것이다.

나델라와 함께 일했던 한 MS 관계자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그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며 “그 자리까지 올라가려면 피나는 노력을 했을 텐데도 굉장히 겸손하다”고 말했다. 이는 호탕한 목소리와 카리스마, 쇼맨십을 보여주던 스티브 발머 전 CEO와 정반대의 스타일이다.

아닐 굽타 메릴랜드대 스미스경영대학원 학과장은 “두 사람의 차이는 미국식 경영과 인도식 경영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며 “발머의 리더십이 권위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카리스마의 리더십이었다면, 나델라의 리더십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데 좀 더 집중한다”고 말했다.

별명이 ‘조용한 사람’이었던 선다 피차이 구글 CEO 역시 마찬가지다. 피차이는 CEO가 되기 전, 머리사 메이어 야후 CEO가 구글에서 일했을 때 팀원들이 정당한 업무 평가를 받게 하려고 메이어의 사무실 앞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다. 이 모습을 본 직원들이 ‘피차이 사람’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인드라 누이 펩시코 CEO도 직원들을 존중해 주는 CEO로 꼽힌다.

니르말야 쿠마르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인도식 경영’은 직원들 개성이 강하고 자존심이 센 요즘 같은 기업 문화에 적합하다”고 분석했다. 특히 실리콘밸리처럼 개성을 중시하는 곳에서는 과거처럼 ‘권위’로만 접근하면, 직원들이 다른 곳으로 이직해버릴 뿐이라는 것이다.

최근 미국 서던뉴햄프셔대가 미국과 인도의 관리자급 직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인도 출신 관리자들이 조직 내 신뢰도 면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겸손하고 나서지 않으면서도 업무에선 강한 열정을 보여 부하 직원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는다는 평가가 나왔다.

선다 피차이 구글 CEO, 사티아 나델라 MS CEO
선다 피차이 구글 CEO, 사티아 나델라 MS CEO
②개혁을 위한 개혁은 없다

사티아 나델라는 CEO로 임명된 후 "커다란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잭 웰치 추종자들이라면 커다란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 새로운 CEO를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굽타 학과장은 "인도식 경영자들은 변화를 위한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며 "대신 현재의 조건에서 일이 제대로 진행되도록 한 다음 필요한 변화를 만드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방법으로 '포용'을 선택한다.

나델라가 취임 3개월 만에 한 것은 회사 행사에서 애플 제품을 쓰지 않는 금기를 깨뜨린 것이었다. 한 발 더 나가 애플의 기기에서도 작동하는 오피스 소프트웨어를 공개했고, 9인치 이하 디바이스에 윈도 라이선스를 무료로 허용했다.

나델라는 IBM과 리눅스 같은 경쟁 업체와 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전임자인 발머가 경쟁업체를 '적(敵)'으로 간주하고 배척한 것과 정반대 행보다. 그 결과 MS는 모바일기기 판매가 늘고 클라우드 서비스 등 기업 대상 사업에서 큰 성장을 보였다.

샨타누 나라옌 어도비 CEO도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100만원에 가까운 고가로 판매하는 대신 매달 1만원 안팎의 사용료를 내고 온라인 구독하는 형태로 판매 방식을 바꿨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론상으로 가능한 일일 뿐"이라며 실패를 점쳤고, 반년 동안 어도비 주가가 60% 이상 급락했다. 하지만 결국 이 결정으로 포토샵 프로그램 사용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주가도 회복됐다.

쿠마르 교수는 "인도인 CEO들이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해당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며 성장해 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만큼 회사가 변해야 하는 포인트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노키아 CEO로 발탁된 라지브 수리는 22년간 노키아에 근무했으며, 나델라 MS CEO는 24년간 MS에서만 일했다. 구글의 피차이는 구글 재직 기간이 11년으로 짧은 편이지만 웹 브라우저 크롬, 전자메일인 지메일, 클라우드 서비스인 구글 드라이브 등 다양한 부문을 거쳤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샌디스크 CEO도 제품 개발, 메모리 디자인 등 다양한 업무를 총괄한 끝에 자리에 올랐다.

전문가들은 인도인 CEO들의 포용력이 인도만의 전통적인 생활환경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굽타 학과장은 "인도인 CEO들은 어린 시절을 대부분 인도에서 보내고 대학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 글로벌 기업에 취직한 사람들"이라며 "이들은 인도 내에서 다문화, 다종교, 다언어에 익숙하기 때문에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의사소통하는 것이 편하다"고 말했다.

라지브 수리 노키아 CEO, 니케시 아로라 소프트뱅크 부사장
라지브 수리 노키아 CEO, 니케시 아로라 소프트뱅크 부사장
③위기 때 어울리는 '관리 리더십'

저(低)성장 시대에 인도인 CEO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로 이들이 '위기관리'에 뛰어나다는 점도 꼽힌다.

피차이 구글 CEO는 '설득의 대가'로 불린다. 와츠앱 CEO인 얀 쿰이 회사를 페이스북에 팔려고 하자 래리 페이지가 팔지 말라고 설득하러 가면서 같이 간 사람이 피차이였다. 페이지가 네스트를 인수하고 싶었을 때 네스트 CEO인 토니 파델을 설득하려고 보낸 사람도 피차이였다.

인드라 누이가 펩시코 CEO 자리에 오르게 된 계기도 인도에서 불거진 '농약 콜라' 파문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빌 게이츠 MS 창업자 역시 "변환기에 사티아 나델라보다 MS를 잘 이끌 사람은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아자이 방가 마스터카드 CEO는 네슬레 사장으로 재임할 때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기온 38도의 마을에 초콜릿을 판매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냉장창고를 제작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연구팀은 위기관리의 비결로 '유연성'을 꼽았다. 이들은 영미식 교육을 받아 서구식으로 생각하면서 행동 기준은 인도식이어서 뜻밖의 위기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미국 타임지(紙)는 "열악한 기업 환경과 미흡한 인프라, 제한된 자원으로 인도에서 살려면 잇따라 발생하는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플랜B와 플랜C 등 다양한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며 "이런 인도의 열악한 상황이 글로벌 CEO들을 키우는 환경이 됐다"고 분석했다.

특히 인도 기업들은 1900년대 초반에는 영국 식민주의, 독립 이후에는 사회주의 정책, 1991년 경제개혁 이후에는 10년에 가까운 구조조정을 겪었다. 쿠마르 교수는 "인도 기업들은 이런 거친 환경에서 단련돼 작은 위기쯤은 쉽게 넘길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고 분석했다.

샨타누 나라옌 어도비 CEO
샨타누 나라옌 어도비 CEO
④전문성 갖춘 '롱텀 경영'

블룸버그는 인도인 CEO들은 미래지향적이면서 장기적인 전략에 강하다고 분석했다. 인도인들은 '기업은 사회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으로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더 높은 차원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재규어·랜드로버를 인수한 타타그룹이나 쌍용자동차를 인수한 마힌드라그룹이 적자 상황에서도 꾸준히 투자를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미국식 경영에서는 '수익성'이 신(神)이다. 그러나 인도식 경영에서는 '책임감'이 강조된다. 타타그룹의 비전은 '품질과 인적자원, 사업 방식, 가치 체계와 윤리에서 최고인 기업이 되자'다.

스튜어트 크레이너 싱커스50 창립자는 "최근 인도식 경영이 인기를 끄는 것은 단기적인 성과에 치중했던 미국식 경영에 대한 반감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며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기업가들이 공공에 대한 책임감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는 모습을 보며 대중이 환멸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인도인 CEO 대부분이 현장 엔지니어 출신이라 공학적 전문성에 경영 마인드를 갖췄다는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쿠마르 교수는 "미국 경영대학원에 진학한 후 글로벌 기업에 취직하는 것은 인도 공대를 졸업한 이들이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가장 선호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인도인 CEO들의 '끈끈한 인맥'도 장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노하우와 인맥, 자금을 후배 인도인들에게 나눠주면서 성공을 돕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실리콘밸리에는 강력한 인도인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다"며 "선마이크로시스템스를 세운 비노드 코슬라는 2004년 자신의 이름을 딴 벤처캐피털인 코슬라벤처스를 세워 유망한 기업에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 전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지부를 둔 인도계 사업가·투자자들의 모임인 'TiE'를 조직해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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