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는 최고 인재를 골라 믿고 맡겼다, 최고 CEO가 훨훨 날았다… 환상의 이중주

입력 2016.01.23 03:04

[Cover Story] 포드·BMW도 포기한 재규어·랜드로버, 타타그룹 손에서 부활한 비결

이달 초 재규어·랜드로버자동차가 2015년 실적을 발표했다.

놀랄 만했다. 전 세계 판매량이 5년 전과 비교해 2배로 증가했다. 재규어는 10년 만에 최고 판매 실적을 올렸고, 랜드로버는 사상 처음으로 40만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최대 판매처인 중국 시장의 성장 속도가 주춤한 가운데서 올린 성과였다.

재규어·랜드로버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파산 직전으로 알려졌던 브랜드다. '참신한 디자인의 영국산 스포츠카'로 입지를 쌓았던 재규어와 '지프의 귀족'이라는 별명이 붙은 스포츠유틸리티자동차(SUV) 브랜드 랜드로버는 영국산 고급차라는 이미지에도 1960년대 이후 경영난과 인수·합병(M&A)에 시달렸다. 재규어는 1966년 브리티시모터홀딩스에 인수된 지 몇 년 후 국유화됐고, 1989년 미국 포드에 팔렸다.
타타그룹에 인수된 후 재규어 랜드로버의 매출
랜드로버는 1967년 레이랜드자동차에 매각됐다가 국영기업에 흡수당했고, 1994년에는 독일 BMW에 인수됐다. BMW는 랜드로버를 부활시키는 데 실패하고, 장기부채와 함께 2000년 포드에 헐값에 매각했다.

포드의 고급 자동차 사업부인 프리미엄오토모티브그룹은 재규어·랜드로버를 한 사업부로 묶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 품질 대비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 일본차와 독일 고급차 브랜드에 밀렸다.

BMW와 포드가 회생 불가 판단을 내린 재규어·랜드로버를 탐낸 곳은 인도의 타타그룹이었다. 적자 상태였던 재규어·랜드로버를 2008년 인수했다. 투자자들과 자동차업계 전문가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당시 타타자동차는 고급 자동차 브랜드와 해외시장에 대한 경험이 미미한, 2000달러(약 250만원)짜리 '인도 국민차'를 만드는 회사였다. 당시 영국 경제전문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인수 소식을 전하며 "타타그룹의 전략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상황이 180도 달라지는 데는 1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타타그룹에 인수될 당시 4억파운드가 넘는 순손실을 낸 재규어·랜드로버는 지난해 20억3800만파운드(약 3조5000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해마다 매출 증가율이 두 자릿수였고, 전체 판매량은 최근 6년 연속 증가했다.

랄프 스페스 재규어·랜드로버 CEO
랄프 스페스 재규어·랜드로버 CEO
이런 반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마법과 같은 실력을 지닌 경영자가 깜짝 등장한 걸까? 그렇게 대답하기는 힘들 것 같다. 재규어·랜드로버의 구원투수로 2010년 투입된 랄프 스페스(Speth·61) 최고경영자(CEO)는 공학 박사 학위를 가진 자동차통(通)이긴 하지만 아주 새로운 얼굴은 아니다. 그는 BMW에서 20년 동안 근무하며 랜드로버의 부사장까지 맡았고, 2007년 포드의 프리미엄오토모티브그룹에서 생산 부문을 총괄했다. 타타그룹이 스페스를 수장으로 임명한 이유는 그가 고급 자동차 브랜드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고, 재규어와 랜드로버의 상황에 밝았기 때문이다. 있던 회사를 산 후에 있던 사람을 CEO에 올렸을 뿐인데도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 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취임 이후 처음 한국을 찾은 그를 서울 한남동 전시장에서 만났다. 빨간 넥타이를 맨 스페스 CEO는 활달한 걸음걸이로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기자를 만나자마자 전시된 재규어 'XJ'와 랜드로버 '레인지로버'를 가리키며 "디자인이 아주 멋지지 않나"라며 반응을 살피더니, 차의 특징과 디자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재규어·랜드로버가 부활한 비결을 물었다.

―취임 이후 5년 동안 재규어·랜드로버의 실적이 큰 폭으로 개선됐습니다.

"우선 (취임 당시인) 5년 전은 국제 경제와 자동차업계 상황이 아주 특수했다는 점을 이해해줬으면 합니다. 제가 취임하기 직전에 미국에서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터졌고, 재규어와 랜드로버 모두 실적이 부진했습니다. 타타그룹에 막 인수됐을 때 회사는 거의 파산 직전이었죠. 회사를 살리는 데 필요한 것은 충분한 투자와 회사 상황에 딱 맞는 경영 전략, 그리고 새로운 방향의 구조조정이라고 봤습니다. 자동차 시장에서 재규어와 랜드로버라는 브랜드의 명성과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핵심이었죠."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주셨나요?

"한마디로 회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먼저 생산 단계부터 소비자의 욕구를 고민하는 '소비자 최우선 계획(consumer first initiative)'을 세웠습니다. 이전까지 재규어·랜드로버는 해외시장을 나라별로 꼼꼼하게 공략하지 못했어요. 현지 소비자들의 특성과 요구 사항을 찾고 제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했습니다. 출시된 지 오래된 차종은 리뉴얼하거나 단종시켰고, 새로운 디자인과 모델로 제품 구성을 바꿨습니다.

판매와 홍보 전략도 다시 짰습니다. 이전까지는 '좋은 차를 만들면 고객이 스스로 찾아온다'는 식으로 안일한 자세였지만, 자동차 전시장을 확충하고 좋은 딜러(자동차 영업사원)망을 갖추는 데 적극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내 생산을 고수하던 방침도 바꿔, 해외에 공장을 지었습니다. 인도뿐만 아니라 고급차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중국과 브라질에 생산공장을 열었고 2016년 초에는 슬로바키아에도 공장을 건립할 예정입니다."

―새로운 최대주주인 타타그룹의 지침을 따른 건가요?

"타타그룹은 경영 방향이나 방침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타타그룹은 '우리는 프리미엄 자동차에 대해 모르고 당신들(재규어·랜드로버)이 더 잘 알 것'이라는 입장이었습니다. 물론 사업계획이나 실적 등은 타타그룹 이사회에 보고해야 합니다."

―인도 기업에 인수되면서 '영국스러운 고급차'란 브랜드 이미지가 약해진 건 아닌가요?

"재규어·랜드로버의 '영국다움(Britishness)'은 혁신적인 공학기술과 디자인에서 나옵니다. 게다가 증시에 상장된 기업은 전 세계 투자자들이 주식을 사기 때문에 누가 최대주주인지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저는 인도 기업에 인수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타타그룹은 자금 환수를 최대 목표로 하는 투자자가 아니니까요. 타타그룹은 재규어·랜드로버 경영진에게 자율권을 줬을 뿐만 아니라, 회사가 벌어들인 돈을 다시 연구개발(R&D)과 생산설비 확충에 투자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인수 초기에도 많은 자금을 지원해줬고요. 그 덕분에 재규어·랜드로버는 기술을 개발하고 차량 품질을 개선하는 데 충분히 돈을 쓸 수 있었습니다."

재규어·랜드로버의 R&D와 설비투자는 해마다 늘고 있다. 2015 회계연도 기준 투자액은 31억4700만파운드(약 5조4100억원)로, 5년 전과 비교하면 3배 이상이다. 한 자릿수를 기록하던 매출 대비 투자 비율은 14%까지 상승했다. 유럽과 미국으로 쏠렸던 시장 무게중심도 중국과 남미 신흥국으로 분산했다. 중국에선 체리자동차와 합작회사를 세워 랜드로버의 인기 모델을 생산한다. 스페스 CEO는 해외 공장에서 생산하는 자동차의 품질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것이란 우려에 대해 "중국에서 만든 차량은 중국 시장에만 공급한다"며 "소비자가 원할 때 바로 차량을 공급하려면 충분한 생산 능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해외로 확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마다 판매량이 늘고 있는데,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판매 대수를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까? 영국의 롤스로이스나 이탈리아 스포츠카 람보르기니는 희소성을 중시하는 전략을 쓰는데요.

"재규어와 랜드로버는 프리미엄 브랜드입니다. 1년에 수백만 대씩 파는 브랜드는 아니죠. 차를 무작정 진열해 놓는 대형 매장이 아닌 전용 전시장에서 판매하고, 특별한 고객을 위해선 맞춤형 차량도 만듭니다.

하지만 판매량을 제한할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 5년 동안 월급이 동결된다면 어떨지 상상해보세요. 수입은 그대로인데 집세, 전기료, 수도 요금은 오를 겁니다. 그러면 물과 전기를 아끼고 생활습관을 바꿔서 지출을 줄여야 하겠죠?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출이 늘고 회사 규모가 성장하지 않으면 영업 비용을 충당하고 R&D 규모를 유지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재규어·랜드로버도 판매량이 해마다 늘어나고 매출이 증가세를 이어가야 장기적으로도 수익을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정체 상태였던 신차 개발에도 공을 들였다. 스페스 CEO는 취임 이후 재규어의 대표 모델인 'XJ'의 디자인을 손보고 'XE'와 'F-TYPE' 등 새로운 모델을 출시했다. 랜드로버는 '레인지로버 이보크'와 '디스커버리'를 새롭게 선보인 대신 '디펜더'와 '프리랜더'는 단종시켰다. 그는 재규어·랜드로버의 성장담에서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포진해 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재규어의 디자인 총괄 디렉터 이안 칼럼(Callum)은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힌다. 칼럼은 다소 투박하다는 평을 받았던 재규어의 디자인을 화려하면서도 날렵하게 바꿔놓았다. 랜드로버의 수석 디자이너인 제리 맥거번(McGovern)은 전통적인 디자인이 아닌 쿠페형 SUV '레인지로버 이보크'를 선보여 돌풍을 일으켰다.

두 디자이너 역시 내부 출신이다. 칼럼은 1999년부터 재규어에 몸담았고, 1980년대 랜드로버에서 일한 맥거번은 2004년 재합류했다. 스페스 CEO는 외부에서 인력을 영입하려 애쓰기보다 회사를 잘 아는 디자이너에게 힘을 실어줬다. 영국차다운 디자인을 위해선 영국인 디자이너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그는 "5~6년 후에 자동차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10년 뒤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디자인일지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재규어·랜드로버가 지향하는 방향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 차를 타는 고객들의 '경험'을 중시합니다. 좋은 승차감은 기본이고 우리 차를 운전할 때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잉787 같은 대형 비행기에 오락 시스템이 몇 가지나 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8~12종류일 겁니다. 하지만 이제 자동차에도 비행기와 맞먹는 수준의 오락 시스템과 통신 기술이 필요합니다. 내비게이션은 물론이고, 개인용 화면과 이더넷(근거리통신망), 차량을 통제할 수 있는 앱(응용프로그램) 등이 탑재되고 있습니다. 자동차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닌, 다양한 최신 기술이 집약된 소비재로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직원들이 고객의 삶과 생활방식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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