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제철소로 출발한 핀란드 피스카스 그룹, 리빙 분야까지 확장한 비결
작년 5월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에 높이 2.8m의 대형 머그잔이 등장했다. 덴마크 왕실 도자기 브랜드로 유명한 로얄코펜하겐이 설립 240주년을 기념해 덴마크에서 공수해온 것이다. 이날 행사에는 주한 덴마크 대사가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당시 이미 로얄코펜하겐의 주인은 덴마크 회사가 아니었다. 피스카스(Fiskars)라는 핀란드 기업이었다.
250여년 전 영국 스태퍼드셔에서 탄생한 웨지우드는 왕실의 후원 속에 영국 도자기의 대명사로 성장했다. 독특한 크림색 도자기는 1700년대 영국 왕 조지 3세의 부인 샬럿의 눈에 들어 '여왕의 도자기'란 이름까지 얻었다. 한데 웨지우드도 더는 영국 브랜드가 아니다. 지금은 피스카스 그룹 산하에 있다.
피스카스 그룹은 367년의 역사를 가진 핀란드 최고(最古) 기업이다. 제철 사업으로 시작해 금속 가공 업체, 생활용품 업체, 고급 리빙 브랜드로 변신을 거듭하며 역사를 이어 왔다. 1929년 대공황 때도, 2000년대 후반 핀란드 국민 기업으로 불린 노키아가 금융 위기의 여파로 무너질 때도 피스카스 그룹은 건재했다. 시대에 맞게 주력 사업을 확장·발전시키는 전략을 통해 그때마다 오히려 힘을 불린 변신과 성장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08년에는 '핀란드에서 가장 존경받는 브랜드' 1~5위에 피스카스 그룹 산하 브랜드가 4개나 이름을 올렸다.
피스카스 그룹은 1649년 같은 이름의 마을에서, 같은 이름의 제철소로 출발했다. 피스카스 마을은 호수와 강을 끼고 있어 제철 산업이 발달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피스카스는 1700년대에는 구리 가공업을 하다가 1822년 약제상 요한 제이콥 율린이 피스카스 제철소와 마을을 사들인 이후 철 가공업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칼·가위·괭이 등 가정·농업용 철 제품 제조업체로 자리 잡은 후에 집 안팎에서 쓰는 생활용품 회사로 영역을 확장했다.
그러나 성장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제자리를 맴도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때 피스카스는 다른 회사를 인수·합병(M&A)하는 전략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회사가 집중 공략한 것은 부가가치가 높은 디자인·리빙 분야였다. 2007년엔 핀란드 유리 공예품 브랜드 이딸라를 사들였고 2013년엔 덴마크의 간판 도자기 브랜드 로얄코펜하겐을 인수했다. 작년 5월엔 영국·아일랜드의 럭셔리 리빙 그룹 WWRD(웨지우드·워터포드·로얄덜튼·로얄알버트·로가스카)를 샀다. 피스카스 그룹은 현재 리빙 브랜드, 기능성 생활용품 브랜드, 아웃도어 브랜드를 아우르는 글로벌 소비재 회사로 진화했다.
―피스카스 그룹은 360년 넘게 회사를 지키고 성장시켰습니다. 비결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우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민첩하게 변화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역사와 전통이 자랑스럽긴 하지만, 미래에 살아남으려면 과거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시대에 맞게 변화하고 사업을 조정하고 소비자와 계속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피스카스 그룹은 여러 차례 변신했어요. 그룹의 모태인 피스카스가 1600년대에 철제 농기구를 만들다가 시간이 흘러 소비재 회사로 바뀐 것은 커다란 변화였죠. 현재 큰 비중을 차지하는 리빙 사업은 2007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리빙 회사들을 인수해 프리미엄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를 더 꼽자면, 재무 건전성을 중시했다는 겁니다. 특히 우리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회사는 재무 건전성을 유지하는 게 경영진의 의무입니다.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도 피스카스 그룹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당시 비핵심 사업을 떼어내고 비용을 줄여 재무 관리를 철저히 했기 때문입니다. 재작년엔 전략상 불필요해진 장비 제조업체 지분을 매각해 주력 사업 확장에 들어갈 비용을 충당했습니다."
―1915년 헬싱키증권거래소에 상장해 상장 역사도 100년이 넘었습니다.
"상장사로서 오랜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계획을 짤 때 장기적인 관점으로 상황을 판단합니다. 이게 다른 회사들과의 차별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투자나 채용을 고려할 때도 당장 눈앞의 이익보다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를 따집니다.
회사의 지배구조는 감독이사회와 집행이사회로 나뉘어 서로 견제가 가능합니다. 율린 가문의 후손 중 4명이 현재 감독이사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회사 경영을 책임지는 집행이사회에는 참가하지 않습니다. 과거부터 회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가문이라도 경영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피스카스 그룹의 성장 전략 중 하나는 지속적인 M&A입니다. 왜 그런 건가요?
"저희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유기적 성장을 중시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잘 관리해야 하죠. 그러나 유기적 성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M&A를 하면 인지도가 높은 강력한 브랜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브랜드를 처음부터 구축하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이미 인정받고 있는 역사 깊은 브랜드를 인수하면 시간도 적게 걸리고 비용 대비 더 많은 효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 M&A를 통해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집니다. 일정 규모를 갖추면 사업을 더 잘할 수 있고, 소비자에게 더 나은 제품을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규모를 등에 업고 해당 산업의 리더로서 시장을 주도하고 판을 새롭게 짤 수도 있습니다."
로얄코펜하겐 주인이 핀란드로 바뀌었다고 홍보 안 한다… 소비자는 '덴마크 왕실 이미지'를 사니까
2008년 핀란드의 마케팅 전문지 M&M이 시행한 ‘핀란드에서 가장 존경받는 브랜드’ 설문 조사에서 1위를 한 브랜드는 피스카스였다. 1~5위에 피스카스 그룹 산하 브랜드가 총 4개 포함됐다(피스카스, 아라비아, 이딸라, 하크만). 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핀란드의 국민 기업이라 할 만하다.
―취임 이후 연달아 큰 M&A를 성사시켰습니다. 피스카스가 그리는 그룹의 장래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새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전에 해본 적이 없는 사업을 새로 시작한 게 아닙니다. 리빙 분야와 기능성 생활용품 분야 모두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분야의 회사를 인수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것이 부족한지 파악한 후 인수를 진행했습니다. 피스카스의 인수는 언제나 우리의 정체성과 어울리고 부족한 것을 보완해 그룹 전체의 장기 수익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뤄졌습니다.
2013년 로얄코펜하겐 인수는 피스카스 그룹의 역량을 지역적으로 넓히기 위한 것입니다. 이전의 피스카스는 주로 핀란드와 스웨덴의 브랜드였습니다. 덴마크의 로얄코펜하겐 브랜드를 매입하면서 리빙 브랜드 부문에서 북유럽 3국을 아우르는 ‘북유럽 디자인’의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또 로얄코펜하겐의 경우 한국, 일본, 대만에서 인지도가 높습니다. 유럽의 성장이 정체된 상황에서 돌파구로서 아시아나 북미를 생각한 것입니다. 예상한 대로 2014년 그룹 전체 매출에서 로얄코펜하겐을 포함한 리빙 사업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반면 작년의 WWRD 인수는 피스카스 그룹이 인접 업종으로 좀 더 폭을 넓히고 세계시장의 중심 플레이어가 되기 위한 성장 전략으로서 의미가 큽니다. 최근 성장하고 있는 프리미엄 소비재 산업은 한마디로 브랜드 게임입니다. 브랜드를 인수할 때마다 회사가 재창조됩니다. WWRD 브랜드의 럭셔리 제품은 전 세계 최고급 호텔과 레스토랑, 항공기 일등석, 크루즈 등에서 사용됩니다. 이 브랜드들을 한꺼번에 얻으면서 피스카스그룹은 전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입지를 다지게 됐습니다. WWRD의 지역별 매출 비중은 북미가 44%로 가장 높고 그다음이 아태 지역입니다.”
이혁진 베인앤드컴퍼니 파트너는 “피스카스그룹은 시장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동종 업종 간 M&A, 프리미엄 브랜드 강화 전략을 택했다”며 “몸집을 불린 후 유럽을 넘어 북미, 아시아 지역에서까지 시장 지위를 강화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브랜드 위주 매입이라고는 하지만 국가 브랜드 성격을 가진 특수한 브랜드를 집중 매입한 것이 특이합니다. 브랜드 융화의 문제도 있는 데다 각국의 자존심이 걸린 상황이 아닌가요. 소비자들이 받아들일지가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로얄코펜하겐은 덴마크, WWRD는 영국 회사라는 인식을 바꾸지 않으려 합니다. 앞으로도 이 부분을 강조하는 마케팅을 계속 할 것입니다.
소비자가 브랜드의 주인이 핀란드 회사로 바뀌었다는 걸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요? 브랜드의 국적은 주주, 투자자의 관점에서나 중요한 것입니다. 소비자가 값비싼 로얄코펜하겐 그릇을 사는 건 덴마크 왕실 브랜드라는 프리미엄 이미지 때문입니다. 물건을 사는 사람에게 로얄코펜하겐은 계속 덴마크에 뿌리를 둔 덴마크 브랜드여야 합니다.
작년에 인수한 WWRD가 피스카스 그룹에 팔렸다는 걸 아는 영국인이 많을까요? 아닙니다. 예컨대 WWRD의 브랜드 중 하나인 웨지우드 도자기는 전통적으로 영국 브랜드입니다. 소비자가 가진 그런 시각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소비자에게는 웨지우드가 피스카스 그룹의 일부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각 브랜드의 핵심 가치를 유지하고 개성을 살리는 게 우리의 원칙입니다. 될 수 있으면 각국의 사업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인수한 기업들을 모아 브랜드를 통합하고 시너지를 내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피스카스의 브랜드 하나하나의 매출은 그다지 크지 않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물건을 산다는 건 브랜드와 사랑에 빠진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 이딸라의 유리 공예품은 제품 하나를 만드는 데 장인 7명이 힘을 합칩니다. 뜨겁게 달군 유리를 장인이 입으로 불어서 제품을 만들죠. 로얄코펜하겐의 도자기는 손으로 직접 문양을 그리는 수작업으로 만듭니다. 이런 많은 요소가 만들어낸 브랜드 이미지는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는 브랜드 간의 차이점을 없애기보다는 강조하려고 합니다. 다른 명품 브랜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더 큰 모회사에 속해 있다고 해도 그 아래의 브랜드는 모두 별개입니다. 앞으로도 웨지우드는 영국, 로얄코펜하겐은 덴마크, 이딸라는 핀란드 브랜드로 남도록 지켜나갈 겁니다.”
―다양한 브랜드를 인수한 후 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인수할 당시 각 회사의 규모나 조직 구조에 따라 다릅니다. 다만 독립성을 충분히 준다는 원칙은 있습니다. 특히 제품 구성이나 출시와 관련해서는 자유를 보장하려 합니다. 다른 브랜드의 제품이 비슷비슷해진다면 곤란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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