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유로 절하되면 달러 가치 오르는 법… 양적 완화는 '제로섬 게임'

    • 어데어 터너 전 (前) 영국 금융감독청(FSA) 청장

입력 2015.10.10 03:04

中 불황에 주변국도 침체… 발등 불 떨어진 日·유로존
양적 완화 생각하겠지만 자국 통화 가치 낮추면 다른 나라 통화 가치 절상돼
부채 늘어난 세계 각국… 회복은커녕 경쟁력 악화

최근 2년간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조만간 미국 금리가 오를 것이라고 오판(誤判)하는 실수를 반복했다. 잘못된 판단 때문에 앞으로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세계경제의 불황을 가속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우리는 '줄어들지 않는 거대한 빚'이라는 덫에 걸렸다. 세계경제가 통화정책만으로 충분히 살아나지 않는 상황에서, 각국이 취할 수 있는 정책에는 한계가 있다. 세계경제 침체가 부동산 거품과 건설 경기 불황에서 나오는 부채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일본 경제가 호황일 때, 일본의 부동산 가격은 4년 동안 4배 가까이 뛰었다. 땅값만 2.5배 증가했다. 하지만 1990년대 부동산 거품이 꺼지자 빚이 많은 기업들은 파산하기 시작했다. 금리가 제로에 가깝게 떨어졌지만, 기업 파산을 막을 순 없었다. 정부에서는 기업들의 파산을 막기 위해 공적 자금을 투입했고, 이는 정부 부채 증가로 이어졌다.

기업 부채가 줄어드는 속도는 느린 반면, 정부 부채가 느는 속도는 아주 빨랐다.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업 부채비율은 140%에서 100%로 떨어졌지만, 정부 부채는 현재 230%를 초과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2008년 월스트리트발(發) 글로벌 금융 위기 때도 미국과 일부 유럽 국가에서 같은 패턴이 반복됐다. 2008년 이전에는 기업들이 부동산 호황을 맞아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가 투자해 수익을 냈다. 그 과정에서 각 기업의 부채비율이 높아졌다. 경제 위기 초반에는 정부의 구제금융만으로 부실한 기업들을 살릴 수가 있었다. 경제 위기도 고비를 넘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정부 부채의 증가 속도는 기업 부채의 감소 속도보다 빠르다.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선진국의 민간 부문 부채비율은 167%에서 163%로 겨우 4%포인트 하락했지만, 같은 기간 정부 부채는 79%에서 105%까지 증가했다. 부채 증가는 정부뿐 아니라 민간 부문도 허리띠를 조이는 결과를 불러오고, 이는 '불황'으로 이어진다.

중국에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됐다. 2008년 이전까지 중국 경제는 각 기업이 은행으로부터 과도한 대출을 받아 과잉투자를 하는 '신용 인플레이션'에 의존했다. 물론 외부에서 볼 때는 문제가 없었다. 중국의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비율은 2007년 10%에 달했다. 미국의 소비 증가는 중국이 수출 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경제 불황으로 외부 수요가 줄자, 중국 경제성장률과 실업률도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건설 경기를 부양해 경기를 살리고자 했다. 당시 여기에 투입된 투자자본은 GDP 대비 42%에서 48%까지 증가했으며, 중국 정부의 부채비율도 GDP 대비 140%에서 220%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중국 경제의 호황기가 끝나자, 중소도시의 아파트들은 텅 빈 채로 남겨졌으며, 신도시들은 끝내 개발되지 못했다. 지방정부들의 부채비율은 증가했고, 국영기업들의 재무 상태도 악화됐다.

중국의 경제 침체에 대한 공포는 외부에서 보는 것과 달리 내부에서는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중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상승하고, 가계 소비는 증가했다. 서비스 분야 호황으로 일자리는 1년에 1000만개씩 생긴다.

하지만 중국의 건설 경기 침체와 기업 생산 감소는 세계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다. 당장 중국의 수입이 14% 감소하면서, 브라질 같은 원자재 수출국의 경제는 침체됐다.

중국의 경기 침체는 바로 옆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기 침체로 이어진다. 올해 2분기 싱가포르의 경제성장세는 처음으로 둔화됐으며, 올해 8월 대만의 기업 생산은 전년 동기 대비 5.5%나 하락했다. 또한 같은 달 한국의 수출 역시 전년 동기 대비 15%까지 하락했다.

일본의 경우에는 중국의 경기 침체 전, 내년 물가상승률 목표치를 2%에 맞춰놨는데, 현재 분위기에서는 달성이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2분기 GDP 성장률은 하락했고, 올 8월 인플레이션 역시 악화됐다. 아마도 일본 은행은 대규모 양적 완화 정책을 고려하고 있을 것이다.

유로존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로존이 무조건 양적 완화 정책에 돌입하기에는 부담이 있다. 유로존을 이끄는 독일이 GDP 대비 7% 수준의 경상수지 흑자와 수출 성장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유럽중앙은행(ECB)이 추가로 양적 완화 정책을 시행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중국 경기 침체로 독일 경제가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경제는 중국의 경기 침체에 치명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사실 양적 완화 정책만으로 세계경제를 되살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다른 국가들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어, 유사한 정책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양적 완화는 투자와 소비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하지만 양적 완화로 내수 소비가 증가할지는 불확실하다. 최근 ECB가 실시한 양적 완화 정책을 봐도, 이것이 기업 투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마리오 드라기(Draghi) ECB 총재와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양적 완화 정책을 통한 환율 경쟁력 상승(통화가치 하락) 효과를 강조한다. 하지만 일본과 유로존이 양적 완화 정책을 시행해 자국 통화가치를 낮추는 것은, 중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도 따라 하고 싶도록 만들 뿐이다.

전 세계적으로 통화 완화 정책은 '제로섬게임(zero-sum game·한쪽이 이익을 보면 다른 한쪽은 손해를 보는 게임)'이다. 엔화와 유로화 가치가 절하되면 미 달러화 가치가 오른다. 달러화 가치는 작년 5월 이후 15% 이상 절상됐다. 이런 달러 강세는 미국 정부가 2008년 위기 당시 저(低)금리로 일으켜 놓은 내수 증가 효과를 상쇄하는 역할을 했다.

영국 역시 파운드화 강세로 수출 경쟁력 악화에 직면했다. 현재 영국은 경상수지 적자가 GDP 대비 4%에 달한다. 영국의 예산책임청(OBR·2010년 설립된 독립된 예산감시기구)은 가계 소비가 증가해야만 2020년까지 경제성장이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2008년 이후 7년간, 세계 각국의 부채는 이전보다 높아졌고, 양적 완화 정책은 글로벌 경기 침체를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빚을 감가상각(減價償却)하거나, 제로 금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급진적인 정책만이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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