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떨어지면 소비 늘어?… 절약한 돈 빚 갚거나 저축에 사용
과잉설비→물가하락→소비자제 디플레이션 덫 빠질 우려

유가가 다시 한 번 급격히 떨어진다면, 누가 승자가 되고 누가 패자가 될까? 그리고 유가 급락이 경기 후퇴로 이어질까?
원유 수입국은 확실히 유가 하락으로 이득을 볼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도 포함된다. 미국의 원유 국내 생산량은 크게 늘었지만, 아직도 수입 원유가 석유 소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원유를 생산하지 않는 순수 원유 수입국인 서유럽과 아시아 역시 유가 하락으로 혜택을 볼 것이다. '보조금 제도'가 있는 인도와 이집트도 확실히 이득을 볼 것이다. 이 국가들은 소비자들이 고유가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해 유가를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해 왔다. 다만 이 나라들에선 이득의 일부가 상쇄될 것이다. 원유는 미 달러화로 가격이 매겨지는데, 이 국가들의 통화는 달러화에 비해 약세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미국 소비자들은 뜻밖의 횡재를 하고 있다. 2014년 갤런(1갤런=3.78리터)당 3.77달러였던 휘발유 가격은 평균 24% 하락, 갤런당 2.47달러가 됐다. 게다가 여름휴가철을 맞아 자동차 운전이 많아지는 이른바 '드라이빙 시즌'은 거의 다 지나갔다. 9월 첫째 월요일 노동절이 지나면, 휘발유 가격은 더 떨어질 것이다.
대다수 전문가는 유가 하락으로 소비가 늘어나고, 이로 인해 경기가 살아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저유가로 절약된 돈의 대부분은 지금까지 주택을 다시 짓거나 빚을 갚는 데 주로 사용됐다. 소비자들은 어려운 시기에 저축을 늘리는 경향이 있다. 지난 6년 동안 경기가 회복됐지만, 소비자들은 저축을 늘려 왔다.
그러나 여기서 유가가 더 떨어지면, 경기는 오히려 나빠질 수 있다. 유가가 하락하면, 뒤이어 소비자물가가 하락할 것이다. 이미 주요 경제국 34개국 가운데 10개국에서 매년 소비자물가가 하락했다. 디플레이션 기대 심리가 커지면 소비자들은 가격이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구매를 주저하게 된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과잉설비와 재고 문제가 생긴다. 이는 물가 하락을 부추긴다. 물가가 더 하락할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지면, 구매자들은 소비를 미루고 이로 인해 물가가 다시 떨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일본은 디플레이션(경기 침체로 인한 물가 하락) 덫에 빠지면서 지난 20년간 이를 경험했다.
유가 하락의 패자는 산유국과 석유 관련 기업, 그 중에서도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들이다. 미국의 셰일가스 기업들은 저유가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비즈니스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 셰일가스 시추 비용 역시 낮아졌는데, 아직 유가는 셰일가스의 한계 비용을 웃돌고 있기 때문이다. 셰일가스 업체들은 매출 하락을 보충하기 위해 생산을 늘리고 있다.
미국 석유·가스기업 종업원들의 시간당 임금은 미국 근로자 평균의 거의 두 배다. 지난 7월 기준으로 이들의 임금은 시간당 평균 41달러에 달했다. 작년 말 기준으로 석유가스 산업의 일자리는 불과 4% 줄었고, 주간 임금은 겨우 3% 떨어지는 데 그쳤다. 만약 유가가 또다시 주저앉으면, 셰일가스 시추로 호황을 누렸던 노스다코타에 '빈집' 표지판이 곧 등장할 것이다.
유가가 더 떨어지면 아프리카의 산유국인 가나, 앙골라, 나이지리아 등의 고민은 깊어질 것이다. 나이지리아의 경우, 원유 수출이 국가 예산의 70%를 차지한다. 나이지리아가 베네수엘라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베네수엘라의 통화가치는 암시장 거래 기준으로 달러당 103볼리바르에서 701볼리바르로 폭락했다. 볼리바르의 공식 환율은 여전히 달러당 6.29볼리바르다.
러시아는 외국으로부터의 수입과 정부 지출의 상당 부분을 원유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비롯된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 경제는 위축됐다. 러시아 은행들은 해외에서 외채를 갚을 돈을 빌릴 수가 없다. 이 상황에서 유가가 또다시 하락한다면 1998년처럼 러시아의 채무 불이행이 반복될 수 있다. 루블화 가치는 지난 5월 달러당 49루블에서 66루블로 폭락했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 16%를 기록하고 있으며, 경제는 지난 2분기에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4.6% 마이너스성장했다.
외화를 벌 다른 방법이 없다면, 러시아는 유가가 한계비용 아래로 떨어지더라도 원유 생산과 수출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끔찍한 상황으로부터 국내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서 죽음이 임박한 헨리 4세는 왕자에게 "외부의 분쟁으로 사람들을 정신없게 만들라"고 조언했다.
석유 관련 주식은 유가가 약세를 보이면서 이미 크게 하락했다. 대표주인 로열더치셸의 주가는 지난 1년간 35% 떨어졌다. 석유 관련 주식을 보유 중인 투기꾼과 투자자들은 내 예상대로 유가가 배럴당 10~20달러까지 하락하면 더 많은 손해를 볼 것이다.
페르시아 만 국가들의 주식시장은 이미 타격을 받았다. 이 나라들의 주식시장은 낮은 이자로 신용대출을 받아 투자한 개인 투자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유가가 더 약세를 보이면 해당 국가의 주식시장은 아마도 수직 하락할 것이다. 사우디 증시가 그나마 이 지역에서 가장 선방하고 있는데, 올 들어 10%가량 하락했다. 원유 생산 및 수출은 사우디 정부 수입의 90%,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차지한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노동시장과 소비자물가 지표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금리 인상을 미뤄왔다. 대다수 전문가는 올해가 가기 전에 연준이 금리를 인상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필자는 미 연준이 아무리 빨라도 내년에나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미 연준이 올해 금리를 인상한다면 원자재 가격은 폭락할 것이고 중국의 경기 침체와 디플레이션은 현실화될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 모든 요인이 결합되면 글로벌 경기 후퇴가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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