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기업 성장 포트폴리오 짜라" 로렌스 카프론 佛 인시아드 교수
1990년대 소매 PC 시장의 선도 기업으로 성장한 컴팩 컴퓨터는 기업용 컴퓨터 생산 업체인 탠덤 컴퓨터와, 마이크로컴퓨터 제조 업체인 디지털 이큅먼트를 잇따라 인수했다. 소매 PC부터 기업용 PC까지 다양한 PC를 판매하는 대형 업체로 성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컴팩은 인수 기업을 통합할 청사진이 없었다. 조각을 억지로 끼워 맞추다 보니 조직 간에 분열 현상이 생겼고, 그러던 사이 소매 PC 시장에서의 경쟁력도 상실했다. 결국 2002년 HP에 인수되면서 사라졌다.

'오바마 폰'으로 유명한 블랙베리(옛 RIM)는 한때 강력한 기능을 내세워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나 아이폰, 갤럭시S 등과의 경쟁에서 패배하면서 2013년 회사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까지 했다. 블랙베리의 실패 원인은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인데,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폐쇄적인 기업 구조를 지적한다. 블랙베리는 창업 후 내부 역량에만 의존해 제품을 개발했다. 다른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거나 M&A를 진행한 적도 없었다. 지난해 8월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구조 조정 작업을 마무리한 블랙베리는 '앞으로는 M&A에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기업이 성장 동력을 찾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자기 회사의 내부적 역량이 뛰어나면 '키우고(build)',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면 다른 기업으로부터 '빌리고(borrow)', 빌리는 것 이상으로 좋은 성과를 낼 것이 확실해지면 아예 상대 기업을 '사는(buy)' 것이다. 키우기 전략에는 R&D, 빌리기 전략에는 제휴나 라이선스, 사들이기 전략에는 M&A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컴팩이나 블랙베리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잘못된 전략을 선택하면 오히려 기업이 큰 상처를 입고 만다.
어떤 방식으로 성장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까. 로렌스 카프론(Laurence Capron ·사진) 프랑스 인시아드(INSEAD) 경영대학원 교수는 이 난제를 풀 한 가지 대책을 내놨다. 그는 인시아드에서 10년 이상 글로벌 기업가들을 대상으로 M&A와 기업 전략에 대한 실무 교육을 총괄하고 있다.
카프론 교수는 기업이 세 가지 수단 중 하나를 고르기에 앞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알고리즘이 하나 있다고 주장한다.
①먼저 기업의 역량을 평가해야 한다. 새로 시작하려는 일이 익숙한 일이고, 인적 자원도 풍족하면 키우기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다. ②그러나 내부 자원이 부족하면 빌리기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새 사업을 통해 얻는 이득이 계산 가능하고, 지식재산권도 침해하지 않는다면 일정 기간 라이선스를 주거나 받아서 사업을 벌이면 된다. 예컨대 외국 제품을 들여와 판매해 이윤을 쌓는 것이 대표적이다. 반면, 이득이 구체적이지 않거나 아예 신제품을 개발하려고 할 때는 파트너와 제휴를 맺고 공동 개발하는 것이 좋다. 다만, 이때는 서로의 지식재산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협력 범위를 최소화하고, 공통의 목적을 구체화해야 한다. ③새 사업을 벌이긴 해야 하는데, 키우기나 빌리기가 안 된다면 최후의 옵션으로 사들이기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다만 섣불리 인수에 나서서는 안 된다. 어떻게 두 회사를 통합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고, 직원들의 동의도 얻어야만 한다.
최근 인시아드에서 카프론 교수를 만나 성장 동력을 찾는 이 알고리즘 공식에 대해 물었다. 카프론 교수는 "결국 성장 동력을 찾을 때도 포트폴리오를 갖추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약간 맥 풀린 듯한 표정을 짓자, 카프론 교수는 단호한 어투로 "말로는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성장 전략의 균형을 갖춰야 한다는 것,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실상은 이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어요. 기업이 가진 '관성' 탓입니다. R&D로 성장한 기업은 습관적으로 R&D를 계속하다 보면 다시 한 번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편 M&A로 성장한 기업은 M&A만 합니다. 익숙지도 않은 R&D를 왜 귀찮게 하려고 들겠어요.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은 기업 문화가 있습니다. 특히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경우 다른 성장 전략을 도입하기 어렵습니다. 예컨대 제약회사 '셰링플라우'는 알레르기 치료제 클레리틴의 성공으로 성장한 기업입니다. 그러나 후속 히트 상품을 내는 데 실패하면서 사세가 기우는데도, M&A나 제휴 전략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내부 연구소 직원들의 반발 때문이었습니다. 왜 자신들을 믿지 못하냐는 겁니다.
둘째는 CEO들의 특성입니다. CEO들은 대개 자신들이 전부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을 원합니다. R&D든 M&A든 자신이 중심이 돼 기업 전체를 100% 지배하길 원합니다. 그래야 빠르게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건 전략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제휴를 맺고 적은 돈을 들여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을, 굳이 큰돈 들여 인수합니다. M&A에서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대부분 이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집착'입니다. '이 사업은 언젠가는 꼭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도박성 집착, '옛날에 잘나갔던 사업이니깐 믿어볼 만하다'는 과거 지향성 집착 등이 있습니다. 집착을 버려야 시야를 넓힐 수 있습니다."
카프론 교수가 전기통신 분야 기업을 조사한 결과, 성장 전략에서 포트폴리오를 갖춘 기업들은 제휴에만 의존한 기업들보다 이후 5년간 생존할 가능성이 46% 더 높았다. M&A에만 의존한 기업들보다는 26%, 내부 R&D에만 의존한 기업들보다는 12% 더 높았다.
장세진 KAIST 경영대 교수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은 오랫동안 '혼자서 다 하는' 키우기 전략에만 집중해 왔다. 이 때문에 사업을 새로 개발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장 교수는 "최근에는 기술 변화가 빠르고, 글로벌 경쟁도 심해지고 있기 때문에 혼자서 하는 것만으로는 이에 대처하기 어렵게 됐다"며 "해외에서 적극적으로 인수·합병을 벌이고, 외국 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벌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 가지 전략의 포트폴리오를 짜야 한다면 결국은 어느 타이밍에 어느 전략을 쓸지가 핵심이 될 것이다. 각 시점은 어떻게 판단해야 한다는 말일까?

“내부 역량이 뒷받침될 때입니다. 다만, 충분한 자원을 갖춰야 합니다. 인적 자원뿐 아니라 회사가 얼마나 그 분야에 익숙한지도 중요합니다. 예컨대 제약사가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하면 전혀 해본 적 없는 일을 해야 할 겁니다. 그런 경우 성공 가능성은 극히 미미해집니다.”
―그 말대로라면 R&D를 시작하는 조건이 너무 까다롭지 않을까요?
“외부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오는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 업무 이외의 일을 틈틈이 하는 스컹크 워크(sku nk work·자발적으로 신제품 또는 신서비스를 개발하는 일)를 활용하면 됩니다. 예컨대 GE그룹에 속한 일본 요코가와 메디컬 시스템 연구소는 1980년대 기존 프로젝트에서 예산을 조금씩 끌어와 새 MRI 기계와 시스템을 개발했습니다. GE 본사는 이런 시스템 개발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그들의 스컹크 워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현재 GE 헬스케어는 이들의 혁신을 바탕으로 모바일 MRI 시장의 강자가 됐습니다.”
―언제 빌려오는 게 좋습니까?
“첫 번째 답은 외부 역량이 필요한 상황에서 ‘굳이 그 기업을 사올 필요가 없을 때’입니다. 다만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일단 내가 빌려올 역량, 빌려와서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명확해야 합니다. 예컨대 ‘A 회사의 인적 자본을 빌려 우리 회사의 혁신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A 회사의 특허를 빌려 1년간 100억달러를 벌겠다’와 같은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합니다. 특허를 내주고 사용료를 받을 땐 그 지식재산권이 유출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푼돈에 소중한 특허를 날리게 될 테니까요.”
―왜 그때 인수해버리면 안 됩니까?
“인수를 섣불리 추천하지 않는 건 비용 부담 때문입니다. 많은 기업가가 인수 후 통합에 드는 비용과 노력, 인수에 투자하면서 놓치는 기회비용을 과소평가하는데, 이를 면밀히 봐야 합니다. M&A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관적인 시나리오보다 더 많은 시간과 자금이 소요됩니다. 돈을 이렇게 많이 썼다는 것은 결국 M&A하고 나서 회사가 망하는 ‘승자의 저주’에 빠진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M&A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CEO 입장에서 보면 M&A는 성공만 하면 지금까지의 부진한 성과를 덮어주고 보상도 듬뿍 받는 최고의 카드입니다. CEO 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고, 시장 선두로 올라설 수도 있어요. 결과적으로 막대한 돈을 들여서라도 M&A를 하게 되는데, 대금이 커지면 커질수록 승자의 저주에 빠질 확률도 커지죠.
그렇기 때문에 M&A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봐야 합니다. 조직 통합을 위한 사전 전략을 반드시 갖춰야 하고, 상대 기업의 핵심 인재에게는 인센티브를 안겨줘서 붙잡아야 합니다. 신속함이 생명입니다. 속도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인재들은 빠져나갑니다. 자칫하다간 깡통뿐인 조직을 얻게 됩니다. 그걸 성공적인 M&A라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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