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보다 엔지니어를 더 대접해주는 언론… WP는 변했고 독자는 고객이 됐다

입력 2015.07.18 03:04 | 수정 2015.07.18 03:05

"다 뜯어 고쳐라" 베조스式 개조 실험 2년… 디지털 기업된 워싱턴포스트

'모든 것을 파는' 아마존의 최고경영자 제프 베조스(Bezos)의 마법이 보수적인 전통 언론에도 과연 통할까. 2013년 8월 베조스가 2억5000만달러에 '워터게이트' 특종으로 유명한 유력지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할 때, 세계 미디어 업계 종사자들은 반신반의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는 '전통 종이신문'을 고집하며 변화하는 환경을 따라잡지 못해, 판매 부수 급감으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7년 동안 워싱턴포스트를 이끌다 작년 9월 해임된 캐서린 웨이머스(Weymouth) 전 발행인이 "나는 '인쇄형 인간(print person)'"이라고 말할 만큼 '혁신'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베조스를 사주(社主)로 맞은 지 2년이 조금 안 된 지금, 워싱턴포스트는 미디어 업계 혁신의 아이콘으로 변신했다. 올해 IT(정보기술) 전문지 패스트컴퍼니가 뽑은 '올해의 혁신 미디어 기업'에 선정되는가 하면, 지난 6월에는 홈페이지의 순 방문자 수가 전년 대비 68% 증가한 5440만명을 기록했다. 최근엔 자체 개발한 소프트웨어까지 기업에 판매하며 '디지털 회사'를 자처한다. 베조스의 어떤 마법이 이를 가능케 했을까.

워싱턴포스트
워싱턴포스트는 올해 태블릿 기기에서 보기 좋도록 이미지 품질을 강화한 새로운 디자인의 앱을 선보였다. 사진은 지난 15일 아이패드에서 앱을 실행한 모습. /그래픽=박상훈 기자
지난달 26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북쪽으로 네 블록 떨어진 15번가 대로에 자리한 워싱턴포스트 본사를 찾았다. 누런 종이 상자를 겹겹이 쌓아올린 듯 투박한 건물은 '혁신'을 말하기엔 좀 예스러워 보였다. 이곳에서 스티브 힐스(Hills) 사장과 만나 '베조스 이후'의 워싱턴포스트 이야기를 들어봤다.

'독자' 대신 '고객'

워싱턴포스트 사람들은 이제 '독자(reader)'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 대신 '고객(customer)' '소비자(consumer)'란 단어를 쓴다. 인쇄된 지면에 쓰인 이야기를 읽던 '독자'들이 이제는 사진을 감상하고, 동영상을 시청하고, 기사나 사안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코멘트로 달며, 다양한 경로로 언론 콘텐츠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크리스 코라티(Coratti) 대변인은 "오늘날 언론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은 단순한 '독자'로 한정할 수 없다"고 했다.

힐스 사장은 "우리는 콘텐츠에 관한 '고객의 경험'을 가장 중시한다"고 강조한다. 고객의 경험을 중심에 놓다 보면 다양한 디지털 기기마다 어떤 디자인이 가장 잘 어울리는지, 고객이 얼마나 쉽고 빠르게, 편리하게 원하는 콘텐츠를 찾을 수 있는지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수시로 홈페이지를 개편하고, 다양한 디지털 기기 환경에 적합한 앱을 선보인다.

특히 중시하는 것은 양질의 '영상'이다. 힐스 사장은 지난 5월 열린 국제뉴스미디어협회(INMA) 총회에서 동영상을 미래 미디어의 핵심 키워드로 제시했다. 본사 5층 편집국에는 세 개의 스튜디오와 영상 편집실이 마련돼 있다. 이곳에서 워싱턴포스트 홈페이지의 동영상 서비스인 포스트 TV (POST TV)에 나가는 영상을 '세련되게' 편집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워싱턴포스트
워싱턴포스트 본사 5층 편집국 중앙에는 다른 매체에서 처리하는 뉴스를 모니터링하기 위한 화면과 각종 설비가 원형으로 배치돼 있다. 편집국 어느 자리에 서 있건 이곳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집중된다. /워싱턴 DC=윤예나 조선비즈 기자
어떤 기기에서도 볼 수 있도록

베조스가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한 뒤, 아마존이 판매하는 전자책 단말기 킨들(Kindle)과 연대를 강화할 것으로 점치는 사람도 많았다. 아마존 생태계에 뉴스 콘텐츠를 통합하려는 시도로 본 것이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는 킨들부터 웨어러블(입는) 기기인 '애플워치'까지 다양한 기기로 발을 뻗고 있다. 힐스 사장은 "우리가 가진 정보와 콘텐츠를 최대한 다양한 경로로 내보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현재까지 나온 거의 모든 디지털 기기에 적합한 앱을 출시했고 기기마다 최적화된 형태로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고 했다.

힐스 사장은 "280곳에 이르는 미국 내 지역 언론사와의 제휴(각 지역 신문 유료 구독자는 워싱턴포스트 디지털 콘텐츠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스냅챗이나 플립보드 등 태블릿 기기에 최적화된 앱 운영 회사들과의 제휴도 이런 전략의 하나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제휴를 맺은 회사들의 콘텐츠가 유통되는 모든 경로에 자사 콘텐츠를 공급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아마존의 킨들과 중요한 협력 관계인 건 맞지만, '유일한 관계'가 아니라 '중요한 관계 가운데 하나'"라며 "앞으로도 콘텐츠를 공급할 수 있는 길을 더 넓히기 위해 더 많은 제휴를 맺을 계획"이라고 했다.

소프트웨어 판매하는 '디지털 기업'

워싱턴포스트는 작년 말 자체 제작한 통합 콘텐츠제작관리시스템(CMS) 'ARC'를 판매하는 소프트웨어 회사로 발돋움했다.

기사 작성 도구부터 동영상 제작 도구, 지면 제작 도구, 스케줄 관리까지 다양한 툴을 회사마다 필요에 따라 조합해서 쓸 수 있는 시스템이다. 제휴를 맺고 있는 지역 언론사를 중심으로 판매해 유대 관계를 더 강화하겠다는 전략이다.

매튜 모나한 제품 매니저는 "큰 틀 안에서 필요한 도구만 조합해서 쓸 수 있기 때문에 사용자 입장에서는 훨씬 경제적이며, 개별 도구마다 전문 팀이 꾸려져 있어 접수된 요청 사항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과감한 기술 분야 투자의 결과다. 베조스가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한 뒤 기술 인력은 50여명 늘어나 250명이 됐다. 기술 혁신의 아이콘인 베조스의 이름은 실리콘밸리 못지않게 훌륭한 기술 인력 확보에 힘을 실어줬다. 샤일레시 프라카시(Prak ash) 최고정보책임자(CIO)는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기술이야말로 우리 사업의 핵심"이라면서 "단순히 물건을 내다 파는 기업이 아닌, 콘텐츠를 구축하고 만들어내는 혁신 기술 기업이라는 사실을 증명해낼 것"이라고 했다.

설비 투자에도 적극적이다. 작년 3월에는 뉴욕에 웹·디지털 디자인과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센터를 개설했고, 지난달에는 본사와 멀지 않은 버지니아주(州) 레스턴(Reston)에도 40여명의 개발자가 근무하는 기술개발센터를 열었다. 코라티 대변인은 "지금 짓고 있는 신사옥은 엔지니어와 세일즈팀 직원이 아예 나란히 앉아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설계해 업무 협력을 더 강화하기로 했다"고 했다.

 저널리즘에도 '온라인 DNA'

최근 워싱턴포스트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다양한 스타일의 블로그 개설을 통한 저널리즘 실험이다. 가벼운 기사와 이미지, 그래픽을 중시하는 성향의 '고객'부터 전통적인 언론의 역할을 기대하는 '독자'까지 잡으려는 전략이다. 경쟁사 기사 중 인기 기사를 모아 보여주는 '더 모스트(The Most)', 기자는 물론 독자도 자유롭게 의견을 올리는 '포스트 에브리싱(Post Everthing)', 양질의 사진과 그래픽을 보여주는 '인 사이트(In Sight)'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파워포스트(Powerpost)라는 이름의 정치 정보 전문 코너를 선보였다. 워싱턴포스트가 전통적으로 강한 정치 저널리즘을 특장점으로 내세워, 백악관과 미 의회 중심의 고급 정계 동향, 인터뷰 등을 집중적으로 전하는 코너다.

편집국 인력 역시 블로그 등 온라인 미디어 경험자를 중심으로 채용한다. 이달 초에는 전 세계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연결망을 구축하는 '탤런트 네트워크(Talent Network)' 사업을 발표했다. 이 사업에 참여할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에게는 다양한 디지털 기기에서 통하는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자질과 블로그, 소셜미디어 계정 운영 경험 등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의 실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마틴 바론 워싱턴포스트 편집장은 작년 IT 전문 매체 매셔블 인터뷰에서 "우리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말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디지털 마인드를 갖췄다고도 할 수 없지만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급격한 변화에 현장 기자들은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기자에게 트래픽(온라인 방문자 수) 목표를 주고 이를 달성하도록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기자는 "변화한 미디어 환경에 맞도록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를 실험하는 건 긍정적이지만, 트래픽에 대한 압박이 크다"며 "내가 쓴 기사를 온라인으로 읽어본 사람이 월 100만이 돼야 하는데, 이 때문에 내가 가진 거의 모든 소셜네트워크 창구를 통해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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