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룰메이킹·오픈·로컬… 세계시장 호령하는 유럽의 '작은 거인'들 4가지 키워드

입력 2015.07.11 03:03

유럽·아시아 기업 잇는 컨설턴트…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저자 안자이 히로유키
H&M·자라·브루넬로 쿠치넬리…유럽 중소기업은 대기업 쫓는 게 아니라 대기업이 자신을 쫓는다는 자부심 있어

저자 안자이 히로유키
저자 안자이 히로유키
"문제는 규모가 아니라 생각의 전환입니다. 대기업과 대치되는 용어로 중소기업이라는 개념을 쓰는 아시아 국가와 달리 유럽의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대등하다는 의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기업을 뒷받침하는 하도급업체가 되기보다는 자기만의 지위를 확고하게 구축하는 길을 택해 성공한 것이지요."

유럽의 중소기업은 자신들이 대기업을 쫓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이 자신들을 쫓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매출 규모가 작을 뿐 영업이익률에서는 밀리지 않는다. 스웨덴의 H&M이나 스페인의 자라(ZARA) 같은 거대 패스트패션(SPA) 의류 시장을 이끌고 있는 기업이 있는 한편,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o Cuicinelli) 같이 적게 팔고 이윤을 많이 남기는 기업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전략을 참고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유럽 중소기업의 강점에 대해 듣기 위해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작은 기업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의 저자 안자이 히로유키(安西洋之·56·사진)를 밀라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분홍색 셔츠에 하얀 바지를 입은 그는 멋을 많이 부리는 이탈리아 남자처럼 보였다. 셔츠 단추는 세 개쯤 풀려 있었고, 팔목에 찬 시계의 숫자마저 분홍색으로 색깔을 맞췄다. 밀라노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는 그는 유럽 기업과 아시아 기업을 잇는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그는 조치(上智)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이스즈자동차에 입사해 유럽 자동차 제조사를 상대로 엔진 등의 주문자 상표 부착상품(OEM)을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면서 유럽 중소기업의 강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히든 챔피언으로 평가받는 18개 기업의 경영자들을 만나면서 그는 공통된 네 가지 성공 키워드를 발견했다. 디자인(design)과 룰메이킹(rule making·규칙 제정 주도), 오픈(open·개방), 로컬(local·지역 중시)이다.

1 디자인

"좋은 물건 만드는 것 넘어 인간다운 윤리적 기업으로"
브루넬로 쿠치넬리, 디자인을 경영 이념으로 확대


'캐시미어의 제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브랜드를 구축한 의류 기업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디자인의 개념을 상품뿐만 아니라 경영 이념으로까지 확대해 적용했습니다. 직원의 행복과 지역 발전을 중시하는 윤리적 경영의 가치를 디자인한 것입니다.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주로 회색 신사복에만 사용되던 캐시미어를 다채로운 남녀 의상에 사용했는데, 2012년에는 밀라노 주식시장에 상장됐고, 2013년에는 직원 1000명, 매출 3억2200만유로가 넘는 수준으로 성장했습니다. 저는 창업주 쿠치넬리를 만났는데, 자신이 실천하는 사업의 핵심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상품이 직원이나 외주 직원을 착취한 결과라고 여겼다면 손님은 우리 제품을 사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직원을 비롯한 사회에 이익을 환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손님이 사는 것입니다."

이 경영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쿠치넬리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주 농민의 손자로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그의 부친은 시멘트 공장 노동자였는데, 매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의 아버지의 표정은 절대 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육체적 피로에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정신적 고통이 더해진 듯했습니다. 어린 쿠치넬리는 노동이 이렇게 사람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민한 결과,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기업을 세우고 싶다고 꿈꾸게 됐습니다. 그는 "연 30퍼센트 매출 증가를 노린다면 타인을 존중하는 경의, 자신을 긍정하는 존엄, 그리고 창조력이라는 가치들을 통해 단순히 이익을 내는 기업이 아니라 모두가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윤리적인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이제 좋은 물건만 만들면 팔리는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생활과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이 요구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디자인이라는 단어의 개념조차 바꿨습니다. 이제 디자인은 제품의 색상이나 형태를 넘어서 조직이나 사회의 콘셉트와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까지 전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디자인이 시각의 세계에서 가치의 세계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기업이 가진 문제 의식에 따라 소비자의 선택이 갈리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2 룰메이킹

무인차처럼 새 기술 나올 때마다 이를 뒷받침하는 룰이 안 정해지면
새 시장은 생겨나지 않아…폐쇄적 법령 제정에 적극 참여해야


속이 빈 프린터 잉크 카트리지에 잉크를 재충전해 파는 영국 중소기업이 있었습니다. 매번 새로운 잉크 카트리지를 팔아야 하는 프린터 제조사 입장에서는 천적인 셈이지요. 당시 일부 프린터에는 정품 이외의 잉크 카트리지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스마트칩이 있었는데, 이 중소기업은 스마트칩이 카트리지의 재사용을 막기 때문에 재활용 정신에 반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률 수정안을 유럽의회에 제안했습니다. 결국 큰 프린터 제조사가 많은 일본과 미국의 로비스트가 협력해 부결을 이끌어냈지만, 다윗이 골리앗에게 도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법규, 관습 등 규칙 없이 시장은 형성되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통화를 하면 한 손이 전화기를 잡고 있어 위험합니다. 이 때문에 여러 국가에서는 운전 중에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통화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블루투스 등 손을 이용하지 않고 통화가 가능한 상품들이 등장했습니다. 내비게이션도 마찬가지로 손으로 작동하는 대신 음성으로 목적지를 찾는 방식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운전 중 내비게이션 조작 행위가 여전히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이를 금지하는 법률이 생길지도 모르지요. 관련 법이 바뀌면 시장은 또 다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컨대 지금 논의되고 있는 무인 운전 시스템, 즉 운전자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안전하게 운행이 가능한 자동차 시스템의 옳고 그름도 기존의 교통법규로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무인 운전 시스템에 관한 지침이나 법 체계가 국가 수준의 의논을 거쳐 명문화되지 않으면 큰 시장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기존에 없던 신제품을 팔기 위해서는 그 제품을 받아들여 줄 룰이 필요한 것입니다. 새로운 기술이 출현할 때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룰이 나오지 않으면 시장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즉 룰 메이킹에 참가한다는 것은 매우 강력한 힘을 얻는 일입니다.

다만 대부분의 룰은 정부와 대기업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중소기업들은 종종 한계와 무력감을 느끼지요.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이 많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의외로 중소·벤처기업도 룰을 만들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국제 룰에 정통한 경제산업연구소 컨설팅 연구원 후지이 도시히코씨에 따르면 본래 중소기업의 요구는 정치가의 관심을 끌기 쉽습니다. 지역의 중소기업을 보호하는 일은 의원의 중요한 임무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한 기업의 이익이 아닌 사회적 정당성이 요구되어야 합니다. 룰메이킹이라는 것은 마음가짐의 문제이므로 기업의 규모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왼쪽부터) 린탈 / 비라인 / 브루넬로 쿠치넬리

3 로컬

맥도널드도 프랑스에선 바게트로 샌드위치 만들어
지역을 무시하는 것은 '글로벌'이란 환상에 속는 것


인터넷과 모바일의 등장으로 대부분의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들은 이제 전 세계인을 상대로 서비스를 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글로벌이라는 유례없이 큰 시장을 대상으로 상품을 내놓기 때문에 같은 장사를 해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많이들 합니다. 하지만 모든 비즈니스는 결국 지역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가치관이 비슷한 소비자라 해도 이들을 그저 몇 가지 인구학적 특성, 국가나 민족, 성별, 연령으로 분류하기만 하면 끝인 시대가 아닙니다. 훨씬 더 세분화된 접근이 필요합니다. 광범위한 접근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는 회사는 대부분 대기업에 한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지역마다 팔리는 상품이 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인터넷 서비스 시장에서는 구글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가장 높지만, 한국같이 외면당하는 시장도 있습니다. 메시지 서비스 시장에서도 일본 등 아시아에서는 라인(Line)이 강세지만, 유럽에서는 와츠앱(WhatsApp)의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시장의 지도는 늘 얼룩덜룩하며 제각각입니다. 이 때문에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 해당 지역의 경향을 고려하는 일은 필수입니다.

유럽인들은 글로벌이라는 말에 집착하지 않더군요. 보통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들은 해외로 나가려 하고, 세계시장에 많은 관심을 보이지만 최근 유럽 젊은이들은 오히려 지역으로 회귀하려는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유럽은 언어와 문화가 다양한 사회이므로 그 안에 하나의 커뮤니티를 만들어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무턱대고 글로벌에 집착하는 일은 무의미하거나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물론 유럽 안의 사람으로만 교류를 좁히는 것은 아닙니다. 인터넷이나 유학생 동료를 통해 유럽 밖의 사람들과도 열심히 정보를 교환하는데, 다만 실천의 장에서는 지역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특정 지역에 모든 정보가 모이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뉴욕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세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는 말에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습니다. 뉴욕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뉴욕이라는 지역에 있는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일 뿐입니다. '글로벌 도시'라는 것은 전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역을 무시하는 사람은 '글로벌이라는 환상'에 속는 것일 뿐입니다.

물론 정보 혁명과 세계화로 세계가 균일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국가별 전통 의상을 입던 때와 다르게 글로벌 의류 브랜드의 옷을 입지요. 이 때문에 대부분 대기업은 전 세계 시장을 타깃으로 비슷한 소비 패턴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한데 묶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세계시장을 상대로 뛰어드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실천의 장으로서 지역을 중시하는 사고 방식이 중요합니다. 맥도널드 같은 글로벌 대기업 역시 프랑스에서는 바게트로 만든 샌드위치를 팝니다. 이처럼 지역의 경향을 최대한 이해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4 오픈

공동창조·집단지성…개방형 플랫폼에 점점 인재 많이 몰려…
유명 대학 나왔다고 꼭 좋은 아이디어 내지 않아

일반인으로부터 아이디어를 모으는 개방형 플랫폼은 중소기업에서 출발했습니다. 대기업처럼 연구·개발(R&D) 및 마케팅에 많은 자원을 투입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2006년에 설립된 프랑스의 중소기업 아이카(eYeka)는 창의력이 풍부한 사람들을 연결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합니다. 현재 160개국 27만명이 크리에이터란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고 지난해 기준으로 콘테스트 형식의 작품 모집에 7만4000개에 가까운 아이디어 제안이 올라왔습니다. 즉 이용자들을 끌어들여 우수한 광고 아이디어에 상금을 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창조적인 소비자는 전체 소비자의 1%라고 알려졌습니다. 아이카에 등록된 크리에이터가 바로 이 1%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작업을 공동창조(co-creation)라고 부르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지혜를 모아 하나의 콘셉트나 프로젝트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집단지성이라고도 하지요. 개방적인 플랫폼에는 점점 더 많은 인재가 모이고 있기 때문에 결과물의 질(質)도 더 좋아질 것입니다. 단순히 상금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일하고 동종 업계 사람들과 교류를 즐기는 크리에이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대형 광고회사에 지원하는 창의적인 인재는 점점 줄고 있습니다. 대형 광고회사에 소속되면 의뢰인의 요구에 초점을 맞추고 기업의 눈치를 살피느라 원하는 업무를 할 수 없게 되지요. 창의성이 중요한 인재들이 이런 업무 환경을 견디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방형 플랫폼에서는 원하는 업무를 골라서 도전할 수 있고, 결과에 따라 많은 돈을 벌 수도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수준의 인재들이 몰리는 것입니다. 마케팅에 많은 돈을 쓸 수 없는 중소기업에 유리한 상황이 되어가는 셈입니다.

또 개방적인 플랫폼을 통하면 국가와 지역에 상관없이 다양한 인력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아이카에서는 아프리카의 세네갈이나 동유럽의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크리에이터의 작품이 주목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대도시인 뉴욕이나 상하이에 살고 있거나, 유명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꼭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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