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동네 서점, 마법 같은 이야기

입력 2015.05.23 03:03 | 수정 2015.05.24 16:45

니키 던 사장이 말하는 '마법의 비결'
전 세계 60여개국에 판매망… 런던 주택가 60㎡의 작은 서점 '헤이우드 힐'에선 무슨 일이

런던 버킹엄 궁전 근처의 한적한 주택가. 차선도 구분되지 않은 소로(小路) 앞으로 고작 60㎡쯤 될까 말까 한 작은 서점이 있었다. 근처에 작은 카페와 약국, 그리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걸로 봐서, 딱 봐도 지역 주민들을 위한 동네 서점임이 분명했다. 나무로 된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책 수천권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전형적인 동네 서점‘헤이우드 힐’의 실내. 책장 속과 탁자 위에는 책 수천여권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 런던=윤형준 기자
전형적인 동네 서점‘헤이우드 힐’의 실내. 책장 속과 탁자 위에는 책 수천여권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 런던=윤형준 기자
이 서점의 이름은 '헤이우드 힐(Heywood Hill)'. 겉보기에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동네 서점이지만, 사실 런던에서 책 좀 본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책의 성지(聖地)'로 불린다. 헤이우드 힐은 1936년 창업자 조지 헤이우드 힐의 이름을 따서 세운 서점이다. 1940년대 후반 런던의 지식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함께 읽는 중심지가 되면서 황금기를 맞았다. 지식인들은 이 공간에서 정책 토론을 나누기도 했고, 가십거리를 주고받았으며, 국가의 미래를 논했다. 당시 이 서점의 대표적인 단골 고객이 윈스턴 처칠 전(前) 영국 총리였다고 한다. 처칠은 역사 속의 인물이 됐지만, 여전히 헤이우드 힐은 80년 가까이 런던 대표 서점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요즘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단골 고객의 대표 자리를 잇고 있다.

규모는 자그마한 동네 서점이지만, 활동 무대는 전 세계다. 인터넷 배송을 활용해 전 세계 60여개국에 판매망을 구축하고 있고, 연 100만 파운드(약 17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비슷한 규모의 한국 동네 서점 매출이 연 1억원 내외인 걸 생각하면, 무려 17배가량의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니키 던 사장
니키 던 사장
도대체 이 작은 동네 서점은 무슨 마술을 부렸기에, 전 세계적으로 어렵다는 책 시장에서 이만큼 성공을 거두고 있는 걸까. 지난 2월 서점에서 니키 던(Dunne·44) 사장(CEO)을 만났다. 그는 곱슬거리는 머리칼에 푸근한 인상을 가진 영국 신사였다. 그는 "헤이우드 힐의 성공은 철저한 고객 맞춤형 서비스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저희는 세 가지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첫째는 고객이 요청하는 희귀한 책을 찾아주는 겁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초판본 같은 걸 구해주는 식입니다. 둘째는 북클럽입니다.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고 관심있는 주제를 알려주면, 이에 맞춰서 1년에 10권 정도 꼭 읽어볼 만한 책을 선정해 배송합니다. 참고로 어젯밤 회원 3명이 새로 가입했는데 브라질에서 한 명, 뉴욕에서 한 명, 그리고 런던에서 한 명이었습니다. 저희는 현재 60여개국에 북클럽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요.

마지막은 저희가 직접 고객의 개인 서재를 컨설팅해주는 겁니다. 저희는 맞춤 정장 서비스의 이름을 따서 '비스포크 서재(bespoke library)'라고 부릅니다. 특정 주제를 두고, 여기에 맞는 책을 모아서 방 하나를 통째로 꾸며주는 겁니다. 적게는 수십권, 많게는 수천권까지 들어갑니다. 다만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을 엄선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요즘은 이탈리아의 한 고객으로부터 '항해의 역사'라는 주제로 주문을 받았습니다. 고대 그리스부터, 스페인·포르투갈의 탐험가들까지 다양한 역사책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개인 고객뿐 아니라 호텔도 이 같은 주문을 합니다. 런던에 불가리(Bulgari) 호텔이란 곳이 있는데요, 이곳 스위트룸에 저희 비스포크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이 스위트룸의 첫 번째 고객이 바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투숙 기간 중 특히 서재가 가장 마음에 든다면서 여러 책을 읽었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덕에 이 호텔 매니저가 친필로 감사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어요."

성공의 핵심 요건은 철저한 큐레이션

헤이우드 힐의 맞춤형 서비스는 결국 '큐레이션(curation·여러 정보를 수집, 선별하고 여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전파하는 것)'이다. 요즘처럼 책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소비자는 어떤 책을 꼭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은 읽지 않아도 될지 잘 모른다. 헤이우드 힐은 서점으로서의 전문성을 살려 고객에게 꼭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하고 있다. 실제로 비스포크는 헤이우드 힐의 주 수입원이다. 지난 2013년 스위스의 한 부호에게 '20세기 근대 미술·디자인'을 주제로 3000여권의 책을 선정해 서재를 꾸며줬는데, 책을 고르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때 가격이 50만 파운드(약 8억5000만원)로 알려졌다. 1년 매출의 절반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좋은 비스포크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한가요?

"결국 모든 책을 꼼꼼히 읽어봐야 합니다. 사소한 표현 하나하나에도 집착해야 해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렇게 해야 정말 읽어야 할 책과 읽지 않아도 될 책을 구분할 수 있죠.

요즘은 정보가 너무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꼭 필요한 정보를 원하는 수요는 점점 늘어날 겁니다. 저희는 저희가 동네 서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서점과 똑같은 방법으로는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겁니다. 대신 저희는 저희만이 가지고 있는 차별화된 경쟁 우위가 있습니다. 고객과의 친분이죠. 저희는 저희 단골 고객이 원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고객이 원하는 것을 추천할 수 있어요.

저는 이 모델이 앞으로 계속 수익이 나는 비즈니스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현재는 1년에 10개 정도 주문을 받는데, 그 숫자는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비스포크의 핵심은 '읽지 말아야 할 책'을 고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권 골라주신다면 무엇일까요?

"(망설임 없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입니다. 최근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책이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맥이 풀릴 만큼 따분합니다(depressingly dull).' 고객에게 책을 추천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글이 아름답거나, 교훈을 남기거나, 감동을 선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그런 요소가 하나도 없습니다."

책은 죽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책 시장이 매우 어렵습니다. 서점도 이 추세에 맞춰 함께 사라져가고 있고요. 헤이우드 힐은 아무리 봐도 동네 서점 같은데, 어떻게 그만큼 성공할 수 있었습니까?

"헤이우드 힐은 처음부터 '사람'의 가치를 높이 샀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 작은 동네 서점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창업자 조지 헤이우드 힐은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친구들 중에는 작가가 여럿 있었습니다. 작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고자 했죠. 창업 당시는 경영이 쉽지 않은 때였다고 합니다. '대공황'의 여파가 남아있었고,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까지 터졌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그런 와중에도 직접 카탈로그까지 만들어가며 서점을 운영했습니다.

그의 노력은 전쟁이 끝나고 보상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고 생계가 여유로워지면서 지식과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헤이우드 힐은 새 지식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죠.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지식인들의 베이스 캠프가 됐습니다.

만약 헤이우드 힐이 그때 서점을 '책 파는 곳'으로만 스스로를 제한했다면, 지금처럼 성공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당시의 경영자였던 작가 낸시 밋포드는 '책을 읽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모임을 장려하고 기꺼이 서점을 모임 공간으로 내어줬습니다. 그게 주효했습니다. 그 결과 고객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을 수 있게 됐거든요.

헤이우드 힐은 고객들의 개인적인 취향을 파악하고 볼만한 책을 추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고객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그 유대 관계가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들의 성원 덕분에 지금까지 성공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 때문에 많은 전통 서점이 문을 닫았습니다.

"아마존이 나타나면서, 전통적인 서점들은 처음으로 새로운 경쟁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지금까지는 서점과 서점의 경쟁이었다면, 이보다 큰 차원의 경쟁이 나타나게 된 셈이죠. 경쟁의 레벨이 달라진 겁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서점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까지와 비슷한 대처 방법으로 경쟁하려고 하죠. 그런 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겁니다.

창의적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저희는 저희가 가진 장점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그래서 2013년 비스포크 서비스를 도입했습니다. 북클럽 활성화를 위해 인터넷으로 주문을 받기 시작했죠. 그 결과, 런던에만 집중돼 있던 저희 고객층은 미국, 홍콩 등 전 세계로 확장됐습니다.

모두들 서점의 미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히려 더 성장하고 있습니다. 방법을 찾으려 하면 방법이 나타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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