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콘서트] 이태수 인제대 교수의 '낯선 것들과의 만남'

인간이 스스로에게 붙인 생물학적 학명은 '호모 사피엔스'다. 머리를 쓸 줄 아는 영리한 종이라는 자기 이해를 담은 작명이다. 좀 건방진 작명이지만, 어쨌든 모든 생물 종 중 인간만이 영리함에 더해 스스로가 영리하다는 사실까지 알 정도로 복잡한 지능 구조를 가진 유일한 존재인 것만은 틀림없다.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는 영리함을 인간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으로 부각시켜 그려 보여준 최초의 문학작품이다. 이 작품은 기원전 8세기 말 경에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에서 바야흐로 새로운 문명의 역사가 막을 올리는 때다. 오디세이는 그 문명의 성격이 어떤 것일지 선명하게 예감하게 해주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한마디로 '머리 쓰는 것'을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척도로 선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최초의 문명은 BC 1600년경의 미케네 문명이었으나, BC 1200년경 급작스럽게 파괴되었다. 기원전 8세기 다시 그리스 전역에서 도시가 생겼으며, 그리스 반도 이외에 소아시아 지역이나 이탈리아 등지에 식민 도시까지 건설되었다. 새로운 문자도 고안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바로 그 문자로 쓰인 최초의 기록이다.
그런데, 정작 호메로스가 작품의 무대로 설정한 시기는 당대가 아니다. 그로부터 수백년 거슬러 올라간 과거의 잃어버린 문명, 즉 미케네 시대 말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트로이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의 이야기가 작품의 주제다.
오디세이보다 한 세대쯤 전에 나온 호메로스의 또 다른 서사시 '일리아드'는 영웅 아킬레우스의 짧지만 멋진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승리의 대가로 목숨을 잃을 것이 확실한 싸움터에 결연히 나서는 아킬레우스는 진정한 영웅의 전형으로 후세까지 내내 사그라지지 않는 불멸의 명예를 얻게 된다. 그러나 '일리아드'는 단지 영웅을 기리기 위한 작품은 아니다. 영웅을 기리기는 하되 영웅이 얻고자 하는 영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도 아울러 보여준다.
오디세이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웅의 전형에 부여된 윤리적 효력 자체를 문제 삼는다. 이 작품에서 주역으로 등장하는 영웅 오디세우스는 차라리 반(反)영웅이라 해야 마땅한 인물이다. 오디세우스는 거의 모든 면에서 아킬레우스와 대척점을 이룬다. 그는 아킬레우스와는 비교할 수 없이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으로 대규모 정규전의 사령관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그 대신 지모·지략에 능해 적과의 정면 대결로 무공을 떨치기보다는 야간 침투·잠복·첩보 등 비정규전이 장기인데, 그 장기가 때로는 승리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아킬레우스가 적군의 수장 헥토르와 정식으로 맞대결을 벌여 이기지만, 그 승리의 화려함이 트로이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트로이 성의 함락이라는 최종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결국 은밀한 트로이 목마 작전을 생각해내고 주도한 오디세우스의 공이다.
그러나 오디세이는 오디세우스가 십년이나 지속된 트로이전쟁 중에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전쟁이 끝난 뒤 고향 이타카를 찾아가는 오디세우스가 겪게 되는 고난의 여정이 주된 줄거리다. 바로 그 대목에서 아킬레우스가 주연인 '일리아드'와의 차별성이 두드러진다.
아킬레우스에게는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더없이 명예로운 일이고 구차하게 살아서 집에 돌아가는 것은 영웅답지 못한 일이다. 반면 오디세우스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서 집에 돌아가려 든다. 십년이나 걸린 그 여정에서 그는 거느리던 부하도 다 잃고 맨몸의 거지꼴이 되도록 온갖 고생과 굴욕을 다 겪는다.

그처럼 끈질기게 집으로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에게서 우리는 보통 인간의 전형적인 특성을 확인한다. 인간은 먼옛날부터 기본적으로는 먹을 것을 구하러 집을 떠났다가 먹을 것을 얻으면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해 오며 살아왔다. 그와 같은 출향과 귀향의 반복 패턴은 오늘날까지도 바뀌지 않았다.
트로이에서 십년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에게 집을 멀리 떠난 자에게 닥칠 수 있는 나쁜 일은 다 현실이 되고 말았다. 위험이 가득한 바닷길을 헤매며 집으로 돌아가는 그는 귀향을 위해서만 또 십년 세월을 보내며 갖가지 고난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고향 이타카에서는 자신의 아내와 결혼을 하려는 구혼자들의 행패로 집안이 거덜이 나고 있었다. 그 바람에 고향에 당도하고서도 생사 대결의 시련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타카에 도착한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철저하게 응징하고 아내와 집을 구해내는 것으로 오디세이는 마무리된다. 오디세이에서는 고향에 도착하기 전에 오디세우스가 겪는 고난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전통적으로 더 주목받아왔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하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황당한 이야기지만, 사실상 그 부분이 작품의 핵심 부분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외눈박이 식인 괴물, 바람의 신, 고운 노래로 사람을 홀려 죽음으로 몰아넣는 마녀, 그리고 오디세우스에게 신적인 영생을 약속하며 유혹하는 여신이 등장한다.
오디세우스는 각기 다른 종류의 위험을 지모·지략으로 대처하면서 점차 더 지혜롭고 속 깊은 존재로 성숙되어 간다. 귀향길에서 오디세우스는 영웅의 허울을 다 벗어버린다. 그래서 겉모양은 거지꼴이 되지만, 그 속은 냉탕·온탕과 같은 전혀 상반된 시련들의 극복을 통해 단련된, 전통적인 영웅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강자로 바뀐다.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전사한 '일리아드'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그에 비하면 덜 성숙된 젊은이일 뿐이다. 그런 영웅은 아직 세상을 모르고 고작 인간들끼리 벌이는 싸움판에서 근육의 힘을 뽐내는 철부지와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이 자신보다 훨씬 강한 사자와 같은 포식자와 호기롭게 맨손으로 싸우려 들었다면 인간은 순식간에 멸종해버렸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로서 인간은 거친 자연의 세계에서 근육의 힘 대신 머리를 써야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인간은 기실 오디세우스와 같은 존재였기에 성공적으로 살아 남은 것이다.

무력 대신 지혜에 의존한 그리스 문명
문명이 새롭게 시작되는 시점에서 낯선 세계와의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그리스인들의 마음가짐을 호메로스는 반영웅 오디세우스가 등장하는 서사시를 통해 표현해 주었다. 그 시점에서 그리스인들은 지난날의 영웅들처럼 낯선 세계를 덮어놓고 무력으로 정복하는 것만을 명예롭게 여기지는 않을 만큼 성숙해졌다.
그때부터는 오디세우스를 롤 모델로 삼아 무력 대신 머리를 쓰면서 낯선 세계에 접근하는 것처럼 문명사회를 건설해 나갔다. 해상 활동을 특징으로 하는 그 시절 그들의 문명은, 싸우지 않고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지혜의 처방을 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 지적 지평을 확장시켜 더욱 지혜로워지는 일로 연장되었다. 오디세우스의 일생이 문명의 스케일로 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문명을 계승한 후대의 서양인들은 세계의 대양을 누비며 낯선 세계를 이곳저곳 찾아다녔다. 오늘날은 무한한 우주의 저 먼 곳까지 여정을 늘려갈 생각까지 하고 있다. 아마 끝없는 오디세이가 호모 사피엔스 전체의 변치 않는 특징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는 서양인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고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현대 인간은 더 이상 오디세우스처럼 조심스럽지 않다는 데 있다. 서양 근세가 시작되는 시점에 단테가 쓴 '신곡'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는 세상을 알고자 하는 욕심으로 세상 끝까지 달려가 무모하게도 지옥에 떨어지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오늘날 인간은 그런 오디세우스와 더 닮은 것 같다.
현재 지구 상에서 인간이 벌이고 있는 일을 보면 인류가 지금까지 제법 긴 오디세이를 거쳐 왔으면서도 철부지 같은 허황한 영웅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는 의심이 든다. 오디세우스는 고난을 통해 지혜로워졌다. 오늘날 인간에게는 그런 성숙한 지혜가 아쉽다. 오디세이를 읽는 것만으로 그 아쉬움이 얼마간이라도 줄어들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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