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가리발디의 힘… 군대 아닌 이탈리아 국민의 영혼

    • 송동훈 · ‘그랜드 투어’ 저자

입력 2014.03.15 03:06

평생을 바친 통일의 꿈 - 당시 갈라진 이탈리아… 가난과 압제에 시달려… 나폴리·시칠리아 등서… 부르봉 王家에 반기… 학생 등 이끌고 참전
정복한 땅, 王에게 바쳐 - 제노바 해안 출발하며… 이제 우리가 죽든지, 새 나라가 탄생할거다… 그 붉은 셔츠는 이탈리아의 피와 열정

송동훈 · ‘그랜드 투어’ 저자
송동훈 · ‘그랜드 투어’ 저자

제노바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다. 베네치아처럼 환상적이지도 않고, 나폴리처럼 수려하지도 않지만, 오늘날 가장 번창하는 항구다. 역사적으로 이 도시는 베네치아와 쌍벽으로 중세 지중해를 지배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열정을 보여줬고, 모험과 도전은 끝을 몰랐다. 중세 유럽은 그런 제노바를 경이롭게 바라봤다.

지금도 도시는 그때의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내게 제노바는 중세를 지배했던 해양 제국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이 도시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한 남자의 도시고, 그의 마지막 도전이 시작된 곳일 뿐이다. 제노바에 가면 반드시 도심 동쪽으로 해안선을 따라가면 나타나는 콰르토 데이 밀레(quarto dei mille) 지역의 작은 바위와 흔적 없는 해변을 찾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자의 이름은 주세페 가리발디(1807~1882)다. 그는 평생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꿈 단 하나를 위해 살았다. 그 꿈에 모든 것을 바쳤다. 안정적인 삶도, 사랑하는 여인도, 심지어는 왕관조차도.

콰르토 데이 밀레/주세페 가리발디-사진

가리발디는 니스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프랑스 땅이지만, 당시 니스는 이탈리아계 국가인 사르데냐에 속했다. 그가 나서 자라던 시절의 이탈리아는 비참했다. 나라는 여러 작은 군주국으로 쪼개져 있었고, 이들 대부분은 부패한 군주와 외세의 지배 아래 있었다. 지도층은 무능했고, 국민은 가난과 압제에 허덕이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의 혁명전쟁을 통해 일어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불길이 지식인과 선각자의 가슴에서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그들에겐 힘이 없었다. 가리발디 역시 마찬가지였다. '통일 이탈리아'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지만,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에겐 아무 힘이 없었다. 그러나 가리발디는 그 길을 가고자 결심했다.

통일 이탈리아를 향한 길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통일에 반대하는 부패한 지도층과 외세의 앞잡이들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가리발디를 비롯한 리소르지멘토의 지도자들은 항상 도망자 신세였다. 가리발디도 탄압을 피해 남미로 망명해야 했다.

가리발디는 1848년 자유주의 혁명의 물결이 온 유럽에 휘몰아칠 때 귀국했다. 당시 로마에는 자유주의 혁명의 결과로 교황이 쫓겨나고, '로마 공화국'이 세워져 있었다. 가리발디는 이 새롭게 태어난 나라의 치안과 방위를 맡았다.

그러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스가 로마에서 쫓겨난 교황을 복위시키려고 군대를 파견했기 때문이다. 가리발디는 로마의 시민과 학생으로 구성된 의용군을 이끌고 맞섰지만, 처음부터 불가능한 전투였다. 이탈리아를 열망했던 이들의 피가 로마를 적셨고, 가리발디는 훗날을 기약하며 다시 도망길에 올랐다. 지칠 줄 모르는 투지와 통일에 대한 집념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숨죽인 듯 기회를 엿보던 가리발디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프랑스계 부르봉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에서 혁명 조짐이 보인다는 소식이었다. 가리발디는 즉각적 개입을 주장했다. 반면에 통일 운동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사르데냐 왕국은 부정적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가리발디는 통일에 미쳐 현실을 잊은 광인(狂人)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광인에게는 꿈이, 열정이, 용기가 있었다. 그의 외침에 1000여명이 호응했다. 대부분은 학생이거나 지식인이었고, 군인이나 혁명가는 극소수였다. 그들은 피와 열정을 상징하는 붉은 셔츠로 스스로를 무장했다. 1860년 5월 5일 그들은 제노바 외곽의 작은 해변에 모였다. 오늘날의 콰르토 데이 밀레가 바로 그곳이다.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그들은 떠났다. 가리발디는 동지들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죽든지, 이탈리아라는 새로운 나라가 탄생할 것이다."

모두 가리발디의 실패를 확신했다. 확신은 틀렸다. 시칠리아에 상륙한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 부대는 나폴리 왕국의 정규군과 싸워 이겼다.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의 민중이 들고일어나 가리발디를 도왔다. 가리발디는 남부의 지배자가 됐다. 그는 사르데냐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자신이 정복한 땅을 바쳤다. 이 또한 모든 사람을 까무러치게 한 충격적 행동이었다.

그가 떠났던 바로 그 자리에 이탈리아 국기가 외롭게 서 있다. 목숨 걸고 그를 따라 떠났던 1000여명의 이름은 깃대 옆 기념물에 새겨졌다. 가장 진한 감동은 바위 동판에 새겨진 빅토르 위고의 헌시(獻詩)에서 나온다. '가리발디, 그에게는 권력도 군대로 없었다. 그의 모든 힘은 국민의 영혼으로부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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