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문의 실리콘밸리 이야기] 대기업이 큰돈 주고 벤처인수 안하면 아무리 실리콘밸리 복제하려해도 실패

    • 조성문 · 오라클 프로덕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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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3.07.13 03:05

      핵심은 "피가 돌게 하라"
      대기업이 中企 비싸게 사 우수한 인재·제품 확보한 뒤 돈 벌어 또 좋은 회사 인수
      한국은 지배구조 특성상 적극적 인수 쉽지 않지만 롤모델 만들어 내야

      조성문 · 오라클 프로덕트 매니저
      조성문 · 오라클 프로덕트 매니저
      실리콘밸리 생활 만 4년이 돼간다. 그동안 실리콘밸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국에서 방문하시는 분을 많이 만났다. 이분들의 공통적 질문 핵심은 "실리콘밸리는 뭐가 특별한가?"와 "한국에 실리콘밸리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좋은 기후, 훌륭한 엔지니어링 대학, 인재의 집중, 자금, 생태계 등 얼핏 생각나는 것만 열 가지는 나열할 수 있다.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최소한 세 시간은 필요할 것이기에, 그 질문을 받으면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게다가 여러 요소 중 어느 하나도 다른 나라에서 쉽게 따라 할 수 없다. 특히 1년 중 300일 이상 화창하고, 습도가 낮으며, 온도가 섭씨 20~25도 사이로 유지되는 날씨는 호주·뉴질랜드 일부나 지중해 연안 지역이 아니면 존재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실리콘밸리를 그대로 따라 해 자국에 옮겨 심으려는 움직임은 한국뿐 아니라 영국, 독일, 중국, 이스라엘, 핀란드 가리지 않고 수많은 나라에서 있어 왔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 근접한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과연 실리콘밸리를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열 가지를 한꺼번에 복제할 수 없다면, 실리콘밸리를 기술과 혁신의 성지로 만든 가장 근본적인 이유 하나를 알면 되지 않을까? 실리콘밸리도 물론 시작점이 있다. 스탠퍼드를 졸업한 윌리엄 휼렛과 데이비드 패커드가 프레드릭 터먼 교수의 지도 아래 1939년 HP라는 회사를 세우면서 실리콘밸리의 부흥이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기존 제품보다 값싸고 성능이 좋은 오실레이터(oscillator)를 만들었는데도 자금을 구하기 힘들어했던 것을 생각하면, 매일같이 좋은 아이디어에 수십, 수백억원이 투자되는 오늘날의 실리콘밸리와는 상황이 매우 달랐던 것이 분명하다.

      야후의 마리사 메이어 최고경영자(왼쪽)와 소셜네트워킹서비스‘텀블러’의 창업자 데이비드 카프(오른쪽·26)가 지난 5월 뉴욕에서 야후의 텀블러 인수 발표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야후의 마리사 메이어 최고경영자(왼쪽)와 소셜네트워킹서비스‘텀블러’의 창업자 데이비드 카프(오른쪽·26)가 지난 5월 뉴욕에서 야후의 텀블러 인수 발표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야후는 고교를 중퇴한 카프가 창업한 텀블러를 올해 11억달러(약 1조2380억원)에인수했다. /로이터
      실리콘밸리에 돈과 인재가 몰리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사건이 촉발점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의 실리콘밸리를 만든 것은 단지 그뿐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실리콘밸리에 좋은 자금과 인재가 몰리는 이유는, 내가 보기에는 단 한 가지이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왜 돈이 되는가? 그것은 기업 매각이 자주 일어나고 그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좋은 아이디어로 회사를 만들어 대기업에 매각하거나 주식시장에 상장해 돈을 버는 것을, '빠져나간다'는 의미로 '출구(exit) 전략'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간혹 회사를 판다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곳 실리콘밸리에서는 누군가가 "엑싯(exit)을 했다"고 하면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천 개쯤은 받을 것이다. 큰 성과이고 훌륭한 성공으로 여긴다.

      그럼 한 단계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엑싯이 왜 자주 있고 규모가 큰가? 대기업들이 기꺼이 큰돈을 주고 작은 회사들을 사기 때문이다. 여기에 핵심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시스코, 애플, 오라클, HP 등 역사가 긴 기술 대기업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기술과 인재를 큰돈을 주고 인수한다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 회사인 구글과 페이스북도 매우 적극적으로 스타트업을 인수하고 있다.

      앞서 HP를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예를 들었는데, HP에서 1989년 이래 지금까지 인수한 회사는 총 102개이며, 인수 총액은 무려 80조원에 이른다. 시스코 역시 인수를 활발하게 하는 회사인데, 70조원어치 이상을 사들였다. 그중 90% 이상이 미국 회사였으며, 이 중 많은 회사가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가 속한 회사인 오라클 역시 인수에 매우 적극적이다. 1997년 이래 90개 회사를 인수했으며, 총 50조원 이상을 썼다. 2012년에만 12개를 사들였는데, 그중엔 한화로 2조원이 넘는 탈레오(Taleo)도 포함돼 있다. 2013년 2월에도 2조원 이상을 주고 회사를 샀으며, 지금까지 평균 매달 하나씩 기업을 인수하고 있다.

      직접 만드는 편이 쌀 텐데, 실리콘밸리의 대기업들은 왜 이렇게 비싼 돈을 주고 회사를 인수하는 것일까? 과연 수지 타산이 맞을까? 역사적으로 보면 그런 것 같다. 오라클은 2005년 1월에 피플소프트(Peoplesoft)라는 인사 관리 소프트웨어 회사를 103억달러(약 11조원)라는 거액에 사들였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까지 피플소프트 제품은 오라클의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오라클이 데이터베이스 회사에서 기업용 애플리케이션 회사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만한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인수를 자주 하다 보니, 기업 인수 후 재정, IT, 그리고 사람들을 통합하는 일도 척척 잘한다. 비싸게 사더라도 오라클이 가진 세일즈, 브랜드 인프라를 이용해서 전 세계에 소프트웨어를 팔면서 더 큰 수익을 낼 수 있으므로 충분히 말이 되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초대형 인수·합병 사례
      페이스북이 인스타그램을 인수한 이유

      한편, 수지 타산이 안 맞는데도 거액의 인수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경쟁 상대를 약화시키거나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이다. 페이스북이 무려 1조원이라는 거액을 주고 매출 제로인 직원 열두 명짜리 회사 '인스타그램(Instagram)'을 산 것은 이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한다. 경쟁사인 구글이나 트위터가 인스타그램을 인수할 것을 두려워했고, 또한 인스타그램을 만든 우수한 창업자들을 페이스북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미국은 지식재산권 보호가 철저하기 때문에, 섣불리 남이 만든 기술을 따라 했다가는 기업 이미지를 망치고 수천억원, 수조원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야 하는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비싸게 인수하고, 그렇게 확보한 우수한 제품과 인재를 활용하여 비싼 인수 가격을 합리화할 수 있을 만큼 돈을 잘 벌고, 그렇게 번 돈으로 또 좋은 회사를 인수하는 것. 이것이 이른바 '실리콘밸리 생태계'의 핵심이다. 이렇게 '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나머지 일은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스탠퍼드, 버클리 출신의 우수한 인재들이 우수한 대기업에 성공적으로 기업을 매각하는 것을 꿈꾸며 창업을 하고, 똑같은 꿈을 가진 에인절 투자자들과 벤처 캐피털리스트들이 자금을 댄다. 한국에서는 강남 아파트를 사면 돈을 벌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우수한 스타트업에 투자해야 돈을 번다. 스타트업에 돈이 몰리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실리콘밸리의 에인절 투자자나 벤처 캐피털이 '취미가 고상해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들도 다른 사람 돈을 이용해서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고, 수익을 내지 못하면 망한다. 우수한 스타트업 10개에 투자했을 때, 그중 하나만 크게 성공해도 투자액을 회수하면서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끝없이 자금을 풀고 있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골드러시

      이 모습은 1848년부터 1855년까지 이어졌던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와도 유사한 것 같다. 사금(沙金)이 있으니 사람이 모여들고, 사금을 채취하는 기술이 발달하고, 그 덕분에 산업이 발전하고, 더 우수한 사람들이 몰려든다. 실리콘밸리의 대기업들이 지금처럼 '금'을 보유하고 있는 한, 실리콘밸리는 기술과 혁신의 중심지 자리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 경제와 대기업 지배 구조의 특성상, 이러한 거액의 인수가 적극적으로 일어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거액을 주고 인수하고 싶을 만큼 훌륭한 회사가 한국에 많지 않은 것이 이유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돈을 풀어 실리콘밸리를 따라 하려고 한다면, 그 돈은 엉뚱한 곳으로 새어나갈 가능성이 크다. 또 정부 자금 지원을 축소하는 순간 모든 생태계가 무너져버릴 것이다. 게다가 근원 기술이나 자생력 없이 '정부 지원금'으로 살아남아 생명을 영위하는 회사를 우수 대기업이 큰돈을 주고 인수하고 싶을 리도 없다.

      롤모델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롤모델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구글이 이스라엘 회사 '웨이즈'를 인수한 것처럼, 이스라엘 회사들이 큰 액수로 실리콘밸리에 팔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이라고 못 할 것은 없다. 서울대 차상균 교수가 만든 티아이시스템이 2005년에 독일의 소프트웨어 회사 SAP에 성공적으로 매각된 사례도 있다. 이러한 롤모델이 한국에 더 많이 생겨나야 한다. 그것이 실리콘밸리를 한국에 세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