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몽마르트르 언덕에 쓴 프랑스의 반성문

    • 송동훈 '그랜드투어' 시리즈 저자

입력 2013.04.13 03:27

몽마르트르의 사크레쾨르 성당, 유럽 최강 프로이센과 싸워 이길수 있다고 집단 최면
결국 1870년 전쟁 패배 후 아픈 기억 씻고자 성당 건립
지금 우리는…, 프랑스를 불태워버렸던 자만과 무지의 불꽃이 北위협 고조되는 요즘 우리 내부에 있지는 않은지…

송동훈 '그랜드투어' 시리즈 저자
몽마르트르(Montmartre)! 나지막하지만 멋스럽기 그지없는 이 언덕은 아직도 옛 파리의 정취를 머금고 있다. 푸른 잔디밭과 앙증맞은 포도원, 정겨운 카페와 화려한 카바레, 특색 있는 소(小)미술관과 무명 화가들이 펼쳐놓은 수많은 캔버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몽마르트르의 백미는 사크레쾨르 성당(Basilique du Sacre-Coeur)이다. 로만-비잔틴 양식으로 지은 이 성당은 여러 돔과 첨탑이 어우러져 마치 타오르는 불꽃 같은 모양이다. 외관이 온통 흰색이어서 푸른 날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사크레쾨르 앞에 서면 파리가 한눈에 펼쳐진다. 노트르담 성당과 파리의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1위를 다투는 곳이라는 평가가 분에 넘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언덕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웠던 한 순간을 기념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60년대에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바다를 지배하던 영국은 별도로 하고, 모든 면에서 프랑스는 러시아·오스트리아 등 다른 제국을 압도했다. 이 막강한 프랑스를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1808~1873)가 다스렸다. 그는 1851년 쿠데타를 통해 황제가 됐는데, 능력과 식견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행운이 따랐다. 그가 권력을 장악할 당시, 프랑스는 계속되는 혁명과 소요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사람들은 질서와 안정을 원했다. 나폴레옹 3세는 강압적 독재 정치를 폈지만, 결과적으로 국민이 원하는 안정을 가져왔다.이런 평화와 질서는 산업의 발전과 물질적 번영으로 이어졌다. 대외적으로도 운이 좋았다. 프랑스는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손잡고 러시아를 물리쳤다.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와 싸워 이겼다.

그러나 성공이 오히려 독(毒)이 됐다. 작은 성공에 도취한 나폴레옹 3세와 프랑스 전체가 자만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동안 이웃 나라인 프로이센에서는 탁월한 리더들이 등장했다. 내각 총리 비스마르크와 참모총장 몰트케 장군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독일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불가피하게 전쟁해야 한다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독일 통일에 대한 강철 같은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철저히 준비했다. 군 복무를 의무화하고, 군 장비를 현대화하고, 우수한 장교 집단을 육성함으로써 프로이센 군대를 유럽 최강으로 탈바꿈시켰다. 모든 준비를 마친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일전을 겨룰 날만을 기다렸다.

전쟁은 1870년 7월에 발발했다. 사소한 외교적 마찰이 빌미가 됐다. 역설적인 것은 전쟁 준비라고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했다는 사실이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심하기는 프랑스 의회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선각자가 프로이센에 대비하려면 국방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낸 법안은 '프랑스 전체를 군대 막사로 만들려 한다'는 의원들의 맹비난 속에 휴지 조각이 돼버렸다. 의회는 한술 더 떠서 상비군 감축 법안을 통과시키는 반역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일부 군 지휘관은 "완전한 (전쟁) 준비가 돼있다"고 허풍을 떨었다. 여기에 속은 국민까지 포함해 온 나라가 자만과 오판에 빠져 우쭐대는 상황에서 프랑스는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집단 최면에 걸린 듯 프랑스 전국 방방곡곡에 "전쟁 만세!" "가자, 베를린으로!"가 울려 퍼졌다.

프랑스가 입으로 떠들고 있을 때 비스마르크의 40만 대군은 폭풍처럼 프랑스를 향해 쇄도했다. 프랑스는 연전연패했다. 나폴레옹 3세는 9월 2일 프랑스 동북부 스당에서 10만 대군과 함께 포로로 사로잡혔다. 그렇게 강국 프랑스는 45일 만에 무너졌다. 프로이센군은 여세를 몰아 파리를 포위하고 항복을 강요했다. 파리 시민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몽마르트르 언덕 위의 사크레쾨르는 전쟁 직후 패배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프랑스인들의 염원이 모여 지어진 성당이다. 성당치고는 드물게 건물 전체를 흰 돌로 장식해 밝은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했다. 그러나 아무리 성당이 아름다워도 참담했던 패배의 역사까지 바꾸거나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다. 전쟁을 계기로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주도권을 독일에 넘겨주고 2등 국가로 내려앉았다. 프랑스는 오늘날까지도 독일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사크레쾨르 성당은 전쟁 직전에 프랑스를 풍미했던 오만과 무지에 대한 처절한 반성문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제를 인정한다면 이때 프랑스의 일이 과연 남의 일이기만 할까. 이 순간 우리 내부 어딘가에선 프랑스를 불태워 버렸던 자만과 무지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지는 않을까. 북한의 전쟁 위협이 고조되는데도 정작 한국은 전쟁 불감증에 빠져 있다는 외신 보도에서 140년 전 프랑스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놓치면 안되는 기사

팝업 닫기

WEEKLY BIZ 추천기사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