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지도자, 무엇으로 나라를 다스리는가

    • 송동훈 '그랜드투어' 시리즈 저자

입력 2013.03.23 03:07

엘리자베스 1세, 480년 前 그리니치에서 태어나…
이복자매 메리의 위협 딛고 잉글랜드 왕위에 올라
종교 다르다고 차별 않고 民意 벗어난 정치도 안 해
그동안 없던 과감한 포용에 국민들 자발적 복종·충성
잉글랜드가 大英제국 건설 후 의도했든, 우연의 일치든 세계 표준時로 그리니치 결정

송동훈 '그랜드투어' 시리즈 저자
'그리니치(Greenwich)'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많은 사람이 천문대를 떠올릴 것이다. 좀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 세계 시간의 기준이 되는 본초자오선(本初子午線·Prime Meridian·경도 0)이 그리니치에 있는 천문대를 통과한다는 것도 알 것이다. 그러나 그리니치가 정확하게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니치는 런던 초입의 템스 강변에 위치해 있다. 시원스럽게 펼쳐진 공원이고, 공원 뒤쪽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천문대가 자리 잡고 있는데 생각보다 작다.

이 조그만 그리니치천문대가 세계 시간의 기준이 된 건 1884년의 일이다. 그때까지 서로 다른 생활권에서 각자의 시간관념 속에서 살아온 인류가 19세기 후반 교통과 통신의 발달과 제국주의의 확대에 힘입어 시간대를 통일할 필요성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영국이 세계 시간대의 중심이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우문(愚問)이다. 예나 지금이나 표준을 정하는 건 패권 국가의 권리이고, 당시는 '팍스 브리태니커(Pax Britanica)'가 절정을 구가하던 시대였으니까. 오히려 이곳에서 우리가 자문(自問)해야 할 것은 '어떻게 영국같이 조그만 섬나라가 시계 시간의 표준을 정할 만큼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느냐'가 아닐까. 그 해답의 실마리 역시 그리니치에 있다.

그리니치천문대 / 스페인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엘리자베스 1세의 초 상화. 그녀의 오른쪽 어깨 뒤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향해 돌진하 는 영국 함대가 그려져 있다. 여왕의 오른손 아래 놓인 지구의가 미래에 다가올 대영제국의 세계 지배를 예언하는 듯하다. 당시 궁정 화가였던 조지 가워(George Gower)의 작품.
지금으로부터 480년 전 이곳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영국 왕이었던 헨리 8세. 그는 딸에게 엘리자베스(Elizabeth)란 이름을 붙여줬다. 엘리자베스 1세(1533~1603)가 바로 그녀다. 엘리자베스는 공주로 태어났지만, 동화 속 주인공처럼 성장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세 살 때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를 잃었다. 대를 이을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헨리 8세가 딸밖에 낳지 못한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앤 불린을 참수형에 처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약혼했고, 열흘 후에는 새장가를 들었다. 더 나아가 아버지는 법으로 딸의 상속권을 박탈해 버렸다. 그녀는 불과 세 살에 서출이 됐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자랐다.

그녀의 위상은 보잘것없었다. 이복 자매인 메리가 여왕으로 있던 시절(1553~1558)에는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광신적인 가톨릭 신도였던 메리와 그녀의 측근들이 신교 성향의 엘리자베스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는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런던탑에 유폐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신중함과 현명함으로 살아 돌아왔고, 후사를 남기지 못한 메리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당시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는 독립국이었다)의 왕위에 올랐다.

그녀가 즉위했던 1558년만 해도 잉글랜드는 유럽의 2류 국가에 불과했고 패권은 스페인이 쥐고 있었다. 그러나 45년에 걸친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가 끝났을 때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잉글랜드는 신흥 강국이 됐고, 스페인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녀의 무엇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르고, 세상의 역사를 바꿨을까?

해답은 바로 흔들리지 않는 용기와 백성을 향한 따뜻한 포용이었다. 그녀를 역사에서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우뚝 서게 한 장점은 용기였다. 당시 유럽 대륙의 절반과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지배자였던 스페인이 잉글랜드의 자유와 독립을 위협했을 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모험가, 상인, 민병으로 군대를 급조해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맞섰다. 객관적으론 상대가 안 되는 전쟁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직접 갑옷을 차려입고 전선을 시찰하며 군인들을 독려했다. "나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너희와 함께 살고 죽겠다. 나의 왕국과 백성을 위해 싸울 것이다. 비록 연약한 여자이지만 내게는 잉글랜드 왕의 심장과 용기가 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는 패배했고, 잉글랜드는 살아남았다.

그녀는 백성 모두를 껴안으려 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지 않았다. 백성의 뜻에 어긋난 무리한 정치를 펴지도 않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워 백성의 삶을 고단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디서나 백성과 만나고 어울렸는데, 이는 동시대의 어떤 왕도 시도하지 못했던 과감한 행동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백성을 믿었다.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자발적인 충성과 복종이라는 큰 보답으로 돌아왔다. 그 결과 엘리자베스는 강력한 상비군과 효율적인 관료제 없이도 절대군주로 군림했다.

활력으로 무장한 잉글랜드는 '팍스 브리태니커'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태어난 이곳 그리니치를 세계 시간대의 중심으로 삼았다. 의도했던 것인지 우연한 일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엘리자베스가 보여줬던 사랑과 용기가 오늘날 우리의 리더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이 중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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