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간 휴대폰 시장 평정했던 노키아 몰락의 비밀

입력 2012.05.19 03:03

이카루스 패러독스(기존 성공의 틀에 매여 혁신 못하는 1등 기업의 역설) 노키아 떨어뜨리다
"노키아는 1등 기업 몰락 과정의 전형… 비용관리에만 신경 쓰다 혁신을 죽였다"
노키아 글로벌 컨설팅 부서장 역임한 토미 에이호넌 인터뷰

이달 4일 영국 런던 쇼핑 번화가인 옥스퍼드 스트리트. 약 99㎡(30평) 규모의 휴대폰 유통매장인 카폰웨어하우스(Carphone Warehouse)에 들어서자 벽면을 가득 메운 삼성 갤럭시S2, 애플 아이폰4S 같은 상품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 진열된 58대의 스마트폰 가운데 노키아폰은 단 두대. 그것도 최근 노키아가 야심작으로 내놓은 윈도폰 루미아(Lumia) 시리즈였으나, 이 제품에 관심을 보이는 소비자들은 거의 전무(全無)했다.

해가 지지 않을 듯한 기세로 20년 가까이 세계 1위 휴대폰 메이커로 군림했던 '휴대폰 왕국' 노키아의 몰락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5년 전 글로벌 스마트폰시장의 절반을 차지했던 노키아의 올 1분기 점유율은 8%로 급감했다.

선진국 시장에서는 애플 아이폰과 삼성 등의 구글 안드로이드폰에, 중·후진국에서는 중국 ZTE, 화웨이 등 신흥 제품에 각각 치여 협공당하고 있는 탓이다. 노키아는 올 1분기 피처폰(일반휴대폰)을 포함한 전체 순위에서도 14년 만에 2위로 밀려났다.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피치는 아예 노키아의 신용등급을 투기(정크·junk)등급으로 강등했다. 주가는 10여년 전의 20분의 1로 줄었고, 시장 조사기관 '밀워드브라운'이 매긴 노키아의 브랜드 순위는 2008년 세계 9위에서 지난해 81위로 추락했다. 정확히 3년 만에 벌어진 '사건'이다.

1998년 모토로라를 누르고 세계 1위 휴대폰 기업이 된 노키아는 경이로운 '성공 기업'의 대명사였다. 한때 북유럽 핀란드 전체 수출액의 23%를 혼자 일궈낸 '국민 기업'이자 520만 핀란드 국민들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던 노키아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처지가 된 데 대해 많은 분석이 있지만, 공통된 결론은 1등 기업의 영원한 숙제, 즉 '이카루스의 패러독스(Icarus Paradox)'를 피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루스'는 깃털로 만든 날개를 밀랍으로 몸에 붙인 다음 하늘을 날지만, 너무 높이 올라 태양의 뜨거운 열에 밀랍이 녹아 바다에 추락해버린 비운(悲運)의 주인공이다. 기업으로 치면 현장의 혁신능력을 상실한 채 스스로 만든 덫에 빠져 망한다는 얘기다.

그래픽=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한때 세계 휴대폰 시장 절반까지 차지… 많은 MBA서 성공 사례로 제시됐지만…
과거 성공의 공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하드웨어 위주의 비즈니스 틀 고수
1위 뺏기고 주가 10년 새 20분의 1 토막

노키아는 '1등 기업의 저주'에 맞서 발버둥쳤다. 1996년부터 스마트폰을 꾸준히 선보였고 애플 아이폰 출시 2년 전인 2005년에는 터치스크린폰도 내놓았다. 그러나 '터치스크린폰은 소비자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고 연구를 중단했다. 애플 아이폰이 세상을 평정한 후인 2008년 말 노키아는 터치스크린폰 제품을 다시 내놓았지만 너무 늦었다. 노키아폰의 운영체계였던 심비안은 구글 안드로이드나 아이폰보다 정교함이 훨씬 떨어졌다.

'통화 위주 휴대폰을 핵심으로 하고 인터넷 같은 서비스는 덧붙이면 된다'는 기존 비즈니스 성공 틀에 사로잡혀 외부 변화에 둔감했던 게 결정적으로 발목을 잡았던 셈이다.

글로벌 1등 자리에서 쫓겨나 평범한 회사가 된 모토로라·소니 같은 기업들의 전철(前轍)을 노키아도 따라갈 것인가? 강고한 철옹성 같던 노키아가 쇠락한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 가운데 10년 만에 3분의 1은 사라져버리는 냉혹한 글로벌 비즈니스 정글에서 노키아는 또 하나의 제물이 된 것일까? WeeklyBIZ가 이를 진단한다.

'1등기업 노키아의 쇠퇴'를 주제로 한 인터뷰 제의를 하자 그는 "할 말이 많다. 언제든 오라"는 답신을 보내왔다. 모바일 경영컨설턴트인 토미 에이호넌(Ahonen)이다. 핀란드인인 그는 노키아 본사의 글로벌 컨설팅 부서장으로 3년 동안 일해 전 세계 여느 IT전문가보다 노키아 내부 사정에 정통하다. 지난달 말 홍콩섬 중심가인 셩완(上環)에 있는 자택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노키아 사례는 1등기업의 몰락 과정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범"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가 보는 노키아의 결정적인 패인(敗因)은 '전략적 실수'와 '전술적 실수'를 동시에 범했다는 점이다. '전략적 실수'란 1등기업 유지를 위한 비용관리에만 집중하다 보니 조직의 현실 안주(安住)화와 보수성을 초래했다는 것. '전술적 실수'로는 경영진의 판단 미스를 꼽았다. 세계 유명 MBA(경영대학원)의 성공사례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해온 노키아가 어떻게 사망의 길에 접어들었는지부터 물었다.

조직 비대화로 비용관리 집중→혁신 종말

―노키아는 원래 '혁신 조직'이었는데 왜 경직된 조직이 됐는가.

"노키아의 최전성기인 2006년, 올리 페카 칼라스부오(Kallasvuo)가 CEO가 된 후 관료화 현상이 본격화됐다. 법률·회계전문가인 그는 어떤 사업을 하건 '비용관리'를 제1원칙으로 내세웠다. 그러다 보니 엔지니어보다 재무 파트의 발언권이 세졌다. 주요 시장인 인도에선 휴대폰 수리 조직을 아웃소싱하는 바람에 소비자들이 예전과 같은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일도 벌어졌다. 품질은 좋아지지 않는데 소비자 불만은 쌓여간 것이다."

―글로벌 1등이 되면 '관료화'를 불가피하게 겪게 되나?

"노키아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매우 실행력 강한 '혁신 회사'였다. 예컨대 그럴 듯한 아이디어를 내면 얼마 안 가 이탈리아·미국·싱가포르 등 세계 각지의 노키아 연구소에서 같은 주제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매우 놀라운 조직이었다. 이후 노키아 종업원 수는 두 배가 커져 한때 13만명까지 늘었다. 이 과정에서 관료화는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회사가 비용관리에만 신경을 쓰자 조직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 직원들이 속출했고 특히 창의적인 중간 간부 중 상당수가 퇴사하기 시작했다. 유능한 모바일 인력들은 노키아를 떠나 애플과 삼성, 블랙베리 등으로 몰려갔다."

―애플 아이폰이 2007년에 처음 나왔을 때 노키아의 반응은?

"아이폰을 일종의 '조크(joke)'라고 봤다. 그다지 매력적인 제품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노키아는 아이폰이 나오기 2년 전 터치스크린폰을 내놓았다가 시장에서 실패를 맛봤다. 그래서 터치스크린폰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한손으로 작동시키기 힘든 폰을 왜 만드느냐는 식이었다. 물론 오판(誤判)이었다."

―업계 1등이었다가 쇠락한 소니, 코닥 등과 노키아와의 다른 점이 있다면?

"자동차·TV·필름 등 대부분의 시장에서 1등의 몰락은 항상 존재했다. 그런데 모바일 산업에서 1등의 추락 그래프는 훨씬 더 가파르다. 모바일 제품 시장의 평균 사이클은 15개월인데, 모바일 제품 하나를 개발하는 데 18개월이 걸린다. 만약 이제 막 개발한 제품이 소비자로부터 외면을 받는다면? 이를 만회할 길이 없다. 지금 홍콩·싱가포르·브라질 등 전 세계에서 기존 노키아 사용자들이 삼성·애플·HTC 등으로 휴대폰을 바꾸는 이유다."

경영진의 전술적 실수

에이호넌은 스티븐 엘롭(Elop) 등 노키아 현 경영진의 '전술적 실수'도 지적했다. 노키아 CEO 엘롭은 취임 후 6개월 만인 작년 2월 "노키아 심비안 운영체계를 버리고 MS 윈도폰을 주력으로 삼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노키아폰의 추락은 한층 가속화했다.

―왜 당시 발표가 실수였나.

"정작 엘롭 CEO가 얘기한 MS윈도폰은 그해 10월이 돼서야 나왔다. 윈도폰이 나올 때까지 8개월 동안 공백이었다. 소비자들 입장에선 앞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하는 심비안폰을 누가 사겠는가. 영락없는 '오스본 효과(Osborne effect)'였다.(※1983년 오스본 컴퓨터 회사의 창업주인 아담 오스본은 계획 중인 차세대 휴대용 컴퓨터를 시장에 발표했다. 그러자 소비자들은 앞으로 나올 신형 모델을 구입하려고 구형 모델의 구매를 미뤘다. 그러자 회사에 현금이 돌지 못해 부도가 났고 이를 '오스본 효과'라고 한다.)"

―지금 노키아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은?

"정말 어렵다. 노키아는 너무 많은 공장과 직원을 갖고 있다. 구조조정이 급선무이다. 물론 노키아는 인도와 아프리카·브라질 등지에 로우 엔드(low end·低價)'폰에서 강점이 있다. 하지만 이 분야에 집중하면 PC산업처럼 매우 낮은 이익률을 올릴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하이엔드(high end) 스마트폰에서 경쟁하는 것인데 지금으로선 애플이나 구글 안드로이드폰과 맞서기 힘들다."

헝가리 코마롬에 있는 노키아 휴대전화 공장 직원들이 퇴근시간을 맞아 공장에서 나오고 있다. 휴대전화 시장에서 주도권을 급속도로 잃고 있는 노키아는 올해 2월 이 공장 직원 4400명 가운데 2300명에 대한 해고를 통보했다. / AP
노키아의 전략적 실수 - 회사 규모 커지면서 관료화
재무파트 발언권이 세지자 창의적인 직원들은 떠나가

노키아 자리 누가 차지할까 - 애플, 자동차로 치면 포르쉐
세계 1등은 될 수 없어 전체 시장에선 삼성이 1위

삼성은 도요타, 애플은 포르쉐

―노키아의 자리는 누가 차지할까?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애플은 세계 1등이 될 수 없다. 자동차 산업으로 보면 애플은 포르쉐다. 삼성은 도요타나 다름없다. 도요타가 택시·지프·전기차·패밀리카·스포츠카 등 모든 것을 만드는 것처럼 삼성도 대규모로 스마트폰뿐 아니라 피처폰도 만든다. 스마트폰에서는 삼성과 애플이 비슷할 수 있어도 전체 휴대폰에서는 삼성이 1위다. 애플은 앞으로도 프리미엄폰처럼 가장 돈을 잘 버는 분야에만 집중할 것이다."

―10년 후 모바일 산업계에서 살아남을 회사 3곳을 꼽는다면?

"애플은 10년 후 휴대폰 회사가 아니라 TV, 로봇회사가 돼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안전하게 톱3 안에 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때쯤 아이폰11이 나올까. 모바일에만 집중하는 구글도 안전하다. 2005년 에릭 슈미트는 미래는 인터넷 모바일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결과적으로 다 들어맞았다. 삼성은 회장부터 말단까지 회사 가치를 공유하고 근면성으로 세계 시장을 정복하고 있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지만 확실하지 않다."

토미 에이호넌은 미국 뉴욕의 세인트존스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노키아 등을 거쳐 현재 홍콩에서 모바일 분야 전문 컨설턴트로 활약 중이다. '7번째 매스미디어로서의 모바일(Mobile as 7th of the Mass Media)' '디지털 코리아(Digital Korea)'등 14권의 저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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