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적인 치료보다 정서적 배려를 받은 환자가 다시 찾아온다

    • 우종민 인제대 서울백병원 교수

입력 2012.01.28 03:03

우종민 인제대 서울백병원 교수
이물질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느낌은 참 어색하고 불편하다. 더구나 그 이물질이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도 없이 한 번에 콱 들어오면 진한 통증을 느낀다. 내가 어찌해볼 도리가 없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면 마치 발가벗겨진 채 도살장 앞에 서있는 듯한 무기력감마저 느껴진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뭔가 야릇한 상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신마취하에 수술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수술받기 전에 폴리 카테터, 즉 소변줄을 삽입하러 누군가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전신마취를 하면 소변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요도에 소변줄을 꽂고 주머니를 연결한다.

필자는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시절 팔이 심하게 부러져서 재수술을 받으며 고생한 적이 있다. 그때 팔 통증보다 더 괴로웠던 기억은 바로 소변줄이 꽂힐 때의 무기력감이었다. 입대 전 말단 의사로 근무할 때는 나 자신이 하루에도 몇 개씩 소변줄을 꽂으며 병동을 누빈 적이 있다. 그때는 쉭쉭쉭 세 번 만에 소변줄을 삽입하기도 했다. 반대편 병실을 맡은 동료 의사와 누가 빨리 마치는지 가벼운 내기를 하기도 했다. 겉으로는 환자가 느낄 창피함을 최소한으로 줄여드리자는 인도주의적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밀린 업무를 빨리 마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환자가 느끼는 기분이 얼마나 불쾌한지는 정말 몰랐다.

당신의 요도에 소변줄이 삽입되어야 한다. 시간이 짧게 걸리는 대신 아주 짜릿하게 아프길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대신 매순간 통증은 심하지 않은 쪽을 택할 것인가? 당신이 시술하는 입장이라면 어떤 것을 택하겠는가? 그런 당신은 십중팔구 환자에게 고통이 적다고 예상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아랫도리를 오랫동안 내리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말처럼 눈 딱 감고 빨리 해치우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당신의 직관은 틀렸다. 시술 시간이 길다고 해서 이 때문에 통증이 더 심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환자를 계속 안심시켜주고 통증을 점점 줄게 마무리하는 방식이 환자의 만족도를 높인다. 시술 막판에 겪은 통증 수준이 그 시술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끝날 때 통증이 심하면 시술 전체가 다 아팠다고 매도된다. 그래서 짜릿한 통증으로 마무리되면 병원에 오기 싫어진다. 이것이 그동안 의사나 병원이 고객들에게 파고들어가지 못한 이유이다. '시간적 효율을 염두에 둔 배려'가 아니라 '환자의 감정 상태를 염두에 둔 배려'가 필요하다.

1990년대 초, 미국 헨리 포드 병원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의사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쪽에는 진료 시간 전에 사탕을 주었다. 사탕을 입에 넣은 의사들은 기분이 좋아지면서 더 친절해지고 인도주의를 실천하고픈 욕구도 높아졌다. 게다가 진료할 때 수입이 미치는 영향은 낮아졌고, 대조군보다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은 더 높아졌다.

더 중요한 점은 사탕 그룹에 속한 의사들은 환자가 통증을 느낄 만한 시술을 할 때 가장 심한 통증(peak pain)을 겪는 시간을 줄여주려 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중간에 말을 걸어서 주의를 분산하거나, "이제 이렇게 할 것입니다" 하는 예고를 통해 통증을 예상하게 함으로써 불안을 줄여주었다. 엉덩이에 아주 아픈 주사를 맞았더라도 부드러운 손길로 천천히 문질러주어 점점 통증을 잊어버리도록 배려했다. 효율이 배려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배려가 효율을 좌우하는 셈이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은 아프더라도 짧게 끝내는 방식을 택할까?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은 옳다고 믿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시술하는 사람으로서는 자기가 통증을 직접 겪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시간당 통증 강도'보다는 '지속 시간'이 더 중요하다. 환자의 성기를 오래 접하기 민망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계속 지켜보기도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고통을 줄일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누가 누군가를 위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순수한 선의에서 출발했다고 믿었던 많은 행위가 사실은 반대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인간의 직관은 그리 믿을 만하지 못하다.

이런 모순을 줄이려면, 끊임없이 작은 도전을 감행해야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을 만드는 방법도 좋다. 나의 직관이 효율만을 위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편이 상대방의 감정을 배려하는 행위인지 되묻고 또 되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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