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에 독점 납품하던 부품업체에 불이 나 생산라인이 전소됐다
60여개 협력업체들이 조건 없이 힘을 합쳐 대체 부품을 만들었고, 두달 뒤 정상을 되찾자 그들은 생산을 중단하고 본연의 사업으로 돌아갔다
우리나라 기업 내에서 구매부서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MBA 학생들에게 기업 핵심 부서가 어디인지 물으면 연구개발, 재무 혹은 마케팅이라고 답한다. 국내 경영대학원에 '구매'를 정규 과목으로 개설한 곳을 찾기도 쉽지 않다.
반면 언론에서 구매부서는 연일 화제가 된다. 구매부서는 기업 비자금 조사를 위해 검찰이 기습적으로 수색을 하는 첫째 부서이고, 대기업의 횡포나 불공정거래 때문에 논란이 될 때도 사회적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는 곳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기업에서 구매의 중요성과 역할은 낮게 인지돼 있고, 사회적으로 부정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기업구매에 대한 이런 인식은 구매가 기업의 수익성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0년 우리나라 제조업체 4200여곳의 총 제조원가 중 구매원가(재료비·외주가공 등)가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달한다. 노무비는 6.2%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제조업체의 평균 순이익률이 5.8%임을 감안하면, 구매원가 1% 감축이 10.5%의 순이익 증가를 가져온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판매를 10.5% 늘렸을 때 나타나는 순이익 상승률과 맞먹는다.
기업활동에 필요한 물품과 용역을 최소 예산으로 구입하는 것이 구매부서의 주요 사명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그 기업은 아직 20세기의 구태의연한 구매관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필요한 새로운 구매경영 패러다임은 가치사슬을 구성하는 공급업체와 협업해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하고 기업의 시장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원가절감의 구매에서 가치창출의 구매로, 수동적·지원적 구매에서 능동적·전략적 구매로 탈바꿈하고, 공급업체와 제로 섬(zero-sum) 관계를 모두가 이익을 누리는 포지티브 섬(positive-sum)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상생지수를 발표하는 플래닝 퍼스펙티브스(Planning Perspectives)사(社)에 의하면 지난 수년간 자동차 부품업체가 가장 선호하는 완성차 회사는 미국 회사가 아닌 일본 도요타였다. 시장경쟁, 법적 계약, 성과 중심의 서구식 구매관리 방식에 익숙한 미국 업체들이 규범과 신의, 사회적 관계를 중요시하는 도요타를 가장 거래하고 싶은 회사로 꼽은 것이다.
도요타와 협력업체 사이의 강한 유대관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1997년 아이신 정기(精機)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이다. 도요타 부품사업부에서 분사한 자동차 부품업체인 아이신 정기는 당시 도요타 전 차종에 사용되는 유압조절용 밸브를 독점 공급하고 있었다. 그해 2월 1일 아이신 정기의 카리야 부품공장에서 불이 나 4시간 분량의 물류 재고만 남기고 유압조절 밸브 생산라인이 전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체 생산처를 찾기 위해 아이신 정기는 도요타의 모든 협력업체에 도움을 요청했다.
흥미로운 것은 구체적인 계약 조건에 대한 협상도 없이 많은 협력업체가 아이신을 돕기 위해 나섰고, 심지어 (도요타를 돕기 위해) 업체 간 경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60여개 협력업체가 유압조절 밸브 대체 생산에 자원했고, 일부 업체들은 이를 위해 고객사의 신규 주문을 거절하기도 했다. 결국 3일 만에 협력업체 중 한 곳에서 부품 생산에 성공했다. 도요타는 10일 만에 생산 물량을 100% 회복할 수 있었다. 아이신이 생산설비를 재정비한 2개월 뒤 협력업체들은 해당 부품 생산을 전면 중단하고 본연의 사업으로 돌아갔다.
도요타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도요타와 협력업체, 그리고 협력업체들 사이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깊은 유대관계에 있었다.
이런 구매경영 패러다임은 자동차 같은 전통 산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애플을 보자. 아이폰의 성공은 혁신적인 제품뿐만 아니라 혁신적인 앱스토어의 활용 덕분에 가능했다. 공급망과 협력업체 관점에서 보면, 애플은 앱스토어를 개방하고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앱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일반인들이 스스로 필요한 앱을 만들고 그것을 쉽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앱을 대중화하고, 이를 전 세계에 순식간에 유통시킬 수 있는 공급망을 공유한 것이다. 애플은 전 세계 수십만, 수백만이 될지 모를 소프트웨어 개발업자를 협력업체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구현하는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의 정신을 실천했다.
기업들이 아웃소싱을 확대하고 전 세계적으로 공급망이 복잡하게 변화하면서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 구매기업과 공급업체 간의 협력관계에 존재하게 됐다. 그러나 선진국들과 비교할 때, 한국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는 눈에 띈다. 2·3차의 소규모 공급업체들이 체감하는 거래관계의 갈등은 심각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공헌을 위해서도 구매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