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광학기기 업체 '칼 자이스' 마이클 카슈케 CEO

입력 2011.10.22 03:01

독일 역사의 거울처럼‐ 165년 역경을 이겨낸 기업
"동·서독 칼 자이스의 통합 원동력? 차이점 묻어두고 공통점을 찾아 거기에 집중"

165년 전통의 독일 광학기업 칼자이스는 독일 근·현대사와 역사의 궤를 같이해 왔다. 마이클 카슈케 CEO는“기술력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 하나의 자이스에 대한 집념이 통합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1945년 6월 24일. 한 달여 전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한 나치 독일의 동부 도시 예나에 미군 트럭 수십대가 나타났다. 창립 100주년을 1년 앞둔 독일 광학기업 칼 자이스(Carl Zeiss)의 핵심 인력 84명과 그 가족들을 실어나르기 위한 차량이었다. 예나에 먼저 들어온 건 미군이었다. 그러나 연합국 간 협의에 따라 예나는 소련 점령지로 편입될 운명이었다. 칼 자이스는 나치 독일에 잠망경과 쌍안경 같은 군수품을 공급하고, 미소(美蘇) 연합국도 칼 자이스 렌즈가 들어간 무기를 사용할 정도로 최고의 광학 기술을 인정받고 있었다. 미국은 이런 칼 자이스를 공산 진영에 통째로 내줄 수 없었고, 주요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서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서독으로 이식된 칼 자이스 기술자들은 소도시 오버코헨(현재 인구 약 8000명)에서 새로운 칼 자이스를 세우고 현미경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예나의 칼 자이스를 국영기업으로 접수하고 사업을 이어갔다.

두 개의 독일과 두 개의 칼 자이스. 분단(分斷)이라는 국가의 정치적 운명 앞에 하나의 기업이 둘로 쪼개졌다. 이들은 1991년 통합을 선언하기 전까지 공존하며 헐뜯고 경쟁했다. 세계 60개국에서 상표권을 둘러싼 법정 싸움을 벌였다.

"(서독) 정부는 물론 칼 자이스 구성원 대부분이 통합을 당연하게 여겼다. 우리는 차이보다 공통점에 집중했다. 통합을 위한 핵심 전략은 동서독 칼 자이스의 기술력과 품질을 되살리는 '퀄리티 드라이브(quality drive)'였다."

지난 6일 오버코헨 본사에서 만난 마이클 카슈케(Kaschke·54) 칼 자이스 CEO는 "어느 지역이 어떤 분야의 '브레인(brain)'을 가지고 있느냐, 그것만이 우리의 관심이었다"고 말했다. 칼 자이스는 90년대 중반부터 강점을 지닌 기술력을 기준으로 동서독 사업 부문을 재배치했다. 1846년부터 렌즈 제조술을 발전시켜 온 예나는 기초 분야인 현미경 사업부와 의료기기 사업부를, 본사가 있는 오버코헨은 주력 분야인 반도체 사업부와 산업 측정기 부문을 맡아 시장 공략에 나섰다.

살아남기 위해 정리해고는 불가피했다.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에 저항하며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동서독 마르크화 교환 비율이 1대 1로 정해지면서 치솟은 동독 지역 노동 비용을 감당할 회사는 없었다. 예나 칼 자이스 6만명 가운데 3000명만 남았다.

의지할 것은 역시 기술력이었다. 카슈케 CEO는 "직장을 떠난 직원들의 자구 노력이 칼 자이스 부활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전직 직원들이 공장 안에 비영리의 기술 재교육 회사를 차리고 기술 교육을 진행했다. 회사 측은 일자리를 주선했다. 예나 칼 자이스 전직 직원 중 상당수가 이 지역에서 새로 창업하거나 광학 관련 중소기업에 취직하고 우리와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2000년 7월 칼 자이스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칼 자이스가 성공의 길에 들어섰다"고 선언했다. 예나 칼 자이스가 통합 이후 첫 흑자(1000만 마르크)를 기록한 해였다. 2009~10년 칼 자이스의 매출은 29억8100만유로. 1990~91년 통합 무렵 매출(11억3700만유로)보다 약 2.6배 증가했다. 직원 수(2만4000명)도 2배 이상 늘었다. 삼성전자가 주고객인 반도체 계측 기기 분야에서 매출과 시장점유율(80%) 모두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독일 통일 21주년 기념일(10월 3일) 직후인 지난 10월 6일 독일 근·현대 역사의 거울과 같은 기업 칼 자이스의 카슈케 CEO를 Weekly BIZ가 만났다.

칼 자이스의 고향 예나가 잃은 것은 핵심 두뇌 80여명만이 아니었다. 미군은 칼 자이스의 제품 설계도 등 8만부의 서류와 기자재를 트럭째 가져갔다. 오버코헨에서 새로운 칼 자이스가 출발할 때 약속과 달리 이런 물품들을 돌려받지 못했다. 직급에 상관없이 생활비로 150구(舊)마르크가 지급됐지만, 나치의 노동봉사대 숙소 같은 곳에서 난민과 다름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과학자 가운데 일부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미국행을 택했다. 몇몇 박사급 인력들은 자살하기도 했다. 대부분 예나 시절을 그리워했다.

소련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육군 사령관을 예나 칼 자이스의 총책임자로 보낸 소련은 재산을 몰수한 뒤, 지역 내 광학 관련 기업들을 칼 자이스 아래로 하나씩 통합시켜 거대 국영기업체를 만들었다. 명목은 칼 자이스 재건(再建)이었지만, 소련 광학 산업 육성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직원 200여명이 강제노동 명령에 따라 소련으로 연행됐다. 국영기업 초창기에는 생산되는 제품 모두 소련으로 수출됐다. 1953년엔 직원 20명이 동독 공안 당국에 의해 체포되기도 했다. "예나 공장에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하려 한다"는 스파이 혐의였다. 예나 칼 자이스에 남은 직원들은 서독으로 간 동료들을 부러워했다.

1950년대부터 '칼 자이스' 상표권을 놓고 미국과 영국 등 60여개국 법정에서 소송전이 벌어졌다. 대부분 오버코헨 칼 자이스의 승리였지만, 양측은 '자이스 대 자이스'의 대결에 지쳐갔다. 결국 1971년 서방국가에선 오버코헨 칼 자이스, 공산권 국가에선 예나 칼 자이스가 '칼 자이스' 명칭을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일부 유럽국가와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선 양쪽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는 보충설명서를 첨부하는 조건으로 양측 모두 '칼 자이스' 제품을 팔 수 있었다.

기술 경쟁력에 따른 역할 분담

일찍부터 산업국가로 발전한 독일에는 100살 넘은 기업들이 많다. 지멘스는 1847년, 자동차 부품업체 보쉬는 1886년에 설립됐다. 올해 설립 344년째를 맞은 제약·화학회사 머크 같은 회사도 있다. 하지만 카슈케 CEO는 "칼 자이스처럼 독일 분단과 통합의 역사를 빼닮은 기업은 없다"고 말했다.

동서독의 대립이 격화될수록 두 칼 자이스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다. 하지만 공통분모는 있었다. 카슈케 CEO는 "통합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차이에 대한 토론보다 공통점을 발견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라며 "우리 직원들은 기술력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통합의 당위성은 누구나 알았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혼란의 시기였다. 그럴수록 칼 자이스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요소에 포커스를 맞춰야 했다."

통일 무렵 동독 노동자의 생산성은 서독의 30% 수준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직원이 6만명이던 예나 칼 자이스의 기술력은 낮은 노동생산성에 비해 높게 평가받았다. 소련의 크루즈미사일 부품부터 일반 망원경까지 공산권 시장에 고품질 광학 제품을 공급하며 기술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동독 계획경제의 보석(jewel)'이라는 평가(월스트리트저널)를 받기도 했다.

카슈케 CEO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우리의 관심은 '핵심 인력이 어느 곳에 있느냐'였다"고 했다. "칼 자이스는 지식과 기술 기반 기업이다. 기술에 대한 신뢰가 매우 중요하다. 동독 예나는 훌륭한 엔지니어를 상당수 확보하고 있었다. 특히 현미경과 의료용 장비 분야에서 강점을 보였다. 1846년 칼 자이스란 기업이 시작될 때부터 오랫동안 기술 노하우를 축적한 덕분이다."

하지만 전망은 밝지 않았다. 1991년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칼 자이스를 진단한 뒤 이렇게 평가했다. '예나 칼 자이스는 자유경쟁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함께 갈 수 없는 기업이다.' 6만명(오버코헨 칼 자이스는 8000명)이나 되는 국영기업 예나 칼 자이스의 직원 수가 부담이었다. 정리해고 방침이 알려지자 1991년 2월 예나 칼 자이스 노동자 2만명이 거리에 나서 시위를 벌였다. "일자리를 보장하라", "오버코헨의 부속물이 되기 싫다"는 이들은 예나를 되살리고 싶어 했다.

카슈케 CEO는 "창업 철학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정리해고가 불가피했다"며 "하지만 구조조정과 노동자 재교육, 일자리 알선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예나 칼 자이스는 1991~95년 직원 수를 3000명으로 줄였다. 사업을 정리하거나 국영기업 지붕 아래 있던 크고 작은 기업들을 분리한 결과였다.

미래에 대한 준비도 잊지 않았다. 예나의 한 공장에 '비영리 자격취득 회사' 사무실을 만들어 전직 직원들을 대상으로 정보통신 관련 기술 재교육을 실시했다. 교관도 일자리를 잃은 전(前) 직원들이었다. 1991년 7월엔 예나 시(市)당국도 '연구, 혁신, 기술향상을 위한 연합체'를 구성해 지역 내 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데 힘을 보탰다.

"95년부터 본격적인 역할 분담 체제가 시작됐다. 남은 직원들의 희생도 컸다. 의료용 장비와 현미경 사업부로 재편된 후 24시간 근무체제를 받아들였고, 1주일에 60시간씩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 19세기 말에 '하루 8시간 노동'을 도입한 회사 직원들로선 엄청난 희생이었다. 5년 동안 크리스마스나 휴가 때 보너스도 받지 않았다."

카슈케 CEO는 "직원들이 '하나의 자이스 정신(One Zeiss Spirit)'을 공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2000년부터 예나 칼 자이스는 흑자로 돌아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산학(産學) 공생 네트워크

칼 자이스는 현재 반도체 사업부, 의료기기 사업부, 일반 광학현미경 사업부, 3차원 산업 측정기 사업부, 안경 렌즈 사업부, 카메라 렌즈나 쌍안경 등을 만드는 소비자 광학기기 사업부 등 6개 사업 부문을 운영하고 있다. 렌즈 제조술이라는 원천 기술을 바탕으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해 왔다.

카슈케 CEO는 "칼 자이스가 165년 동안 기술력을 유지하며 사업을 확장해 온 비결은 19세기 말부터 형성된 대학·연구기관과의 공생(共生) 네트워크"라고 말했다. 칼 자이스 자체가 기업과 대학의 윈-윈 전략의 산물이었다. 예나대학 강사였던 물리학자 에른스트 아베(Abb�[·1840~1905)는 연구와 강의를 위한 현미경이 필요했고, 예나에서 광학기계 제작소를 운영하던 칼 자이스(Zeiss·1816~1888)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과학적 근거에 입각해 렌즈와 현미경을 만들고 싶던 자이스도 아베의 광학 이론을 필요로 했다.

현재 칼 자이스는 전 세계 45개국에 제조 공장을 두고 있다. 개별 사업부마다 각 지역의 유명 대학과 연구기관에 자금을 지원하고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산학(産學) 협력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기업은 언제든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흡수할 수 있는 학자, 전문가 집단, 교육 시스템과 공생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대학과의 협력은 신진 연구 인력을 선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미래와도 직결돼 있다. 공동 연구 과정에서 잠재력 있는 인재를 스크린 할 수 있고, 적절한 시점에 이들을 채용해 칼 자이스 인력으로 만드는 전략이다."

"직원이 직원을 훈련시킨다(Employees train employees)." 카슈케 CEO는 칼 자이스 인재 육성 철학을 이렇게 소개했다. "유능한 인재를 확보한 뒤 교육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데이터 프로세싱, 물리학과 전기전자 분야, 렌즈 광택(polishing), 리더십, 경영학 등 200개의 프로그램이 사내(社內) 대학처럼 운영되고 있다."

경험으로 배운 기술 노하우는 그동안 세계 최초의 플라네타리움(천체투영기·1923년), 미세 수술이 가능한 최초의 수술현미경(1953년), 최초의 고정밀 3차원 좌표 측정기(1973년) 등의 성과를 낳았다. 카슈케 CEO는 "160년 이상 광학 분야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자기만의 비밀을 갖게 되지 않겠나. 칼 자이스에도 많은 비밀들이 있다"고 했다.

"렌즈 폴리싱 과정에서 사용하는 파우더의 성분과 액체의 온도, 렌즈의 회전 빈도 같은 것은 오랜 경험에서 얻은 결과다. 고품질 렌즈는 마지막 광택 단계에서 아직 손으로 최종 점검을 한다. 손이 느끼는 압력과 부드러움을 이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촉각만큼 훌륭한 기계가 없다. 우리의 렌즈 제조술은 직원에서 직원으로 옮겨지면서 이어져 온 장인정신의 결과다."

(위)칼 자이스가 만든 플라네타리움(Planetarium·천체투 영기)인‘SKYMASTER ZKP 4’의 모습. / 칼 자이스 제공
순익의 20% 학술 분야에 투자

칼 자이스는 비상장기업이다. 외부 주주가 없다. '칼 자이스 재단'이 회사 전체 재산을 소유한다. 에른스트 아베는 동업자인 칼 자이스가 사망한 뒤 1889년 동업자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 회사 재산을 모두 귀속시켰다. 카슈케 CEO는 칼 자이스 재단을 "침묵의 가족"이라고 표현했다. 상장회사의 주주처럼 돈벌이를 위해 시끄럽게 굴지는 않지만 이익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한 가족이라는 것이다.

"아베는 재단을 통해 기업의 이윤을 올바르게 활용하길 원했다. 일부는 투자 자금으로 기업에 남기고, 일부는 직원들의 임금과 보너스를 지급하고, 나머지는 과학과 기술 발전을 위한 학술 분야에 지원한다는 게 원칙이었다. 현재 연간 순익의 약 20%가 재단으로 들어가 대학, 연구기관, 지역사회를 위해 쓰이고 있다."

재단은 한때 동서독 칼 자이스 사이에 갈등의 소재이기도 했다. 오버코헨과 예나의 칼 자이스가 각각 '칼 자이스 재단'의 적자(嫡子)임을 주장하며 상표권을 주장했다. 그만큼 재단의 존재는 칼 자이스에서 특별하다. 카슈케 CEO는 "재단은 외부 투자자나 주주보다 안정적"이라며 "회사가 장기적 관점에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든든한 보호막"이라고 설명했다.

통합 이후 경영 상황이 안정되면서 칼 자이스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2002년 예나에 있는 의료 기기 부문 자회사인 칼 자이스 메디텍(Meditec)을 독일 기술주 전문 증시 텍닥스(TecDAX)에 상장했다. 자회사 가운데 첫 상장기업이다. 2004년엔 법률상 주식회사의 형태를 갖추기 위해 재단 헌장을 수정했다. 카슈케 CEO는 "해외 시장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표준화된 회사 구조를 갖출 필요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주식회사의 모습을 갖췄지만 재단은 여전히 유일한 주주이다. 단 한 주의 주식도 거래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업 관련 의사결정이 보다 신속하게 이뤄지게 됐고, 실적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100년이 넘은 낡은 소유구조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런 소유구조를 사랑한다. 안정적인 주주가 있다는 건 과학과 기술, 학술 분야에 꾸준히 투자할 수 있다는 걸 뜻한다. 칼 자이스는 기술 기반 기업 아닌가."

놓치면 안되는 기사

팝업 닫기

WEEKLY BIZ 추천기사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