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한 '미켈란젤로'인가… 그렇게 믿고싶을 뿐인가
미술가 제프 쿤스(Jeff Koons·56)는 '마케팅'이란 말을 꺼렸다. '예술가로서 마케팅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를 묻자, 싸늘하게 "예술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상업적이 아니라 철학적"이라고 답변을 끊었다. 하지만 '마케팅' 용어를 '비즈니스'로 바꾸자, 말이 청산유수처럼 이어졌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그(비즈니스) 위에서 돌아가지 않습니까? 비즈니스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만나는 흥미로운 플랫폼입니다." 그는 "예술, 사회적 책임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마술 같은 공간이 비즈니스"라고 말했다.
쿤스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값에 작품을 파는 작가로 유명하다. 지난 5년 동안 '세계 최고 경매가'(생존 작가 작품) 기록을 두 번 갈아치웠다. 그의 작품 '풍선 꽃'(Balloon Flower)의 2008년 낙찰가는 2570만달러(280억원). 스테인리스로 만든 2.7m 높이의 조각이다.
쿤스는 미술가이자 뉴욕 맨해튼 첼시의 '제프 쿤스 유한책임회사'에 조수 100여명을 둔 경영자이기도 하다. '풍선 꽃'을 실제로 제작한 것은 '아르놀드'라는 독일 건설·기계 부품 제작회사다. 쿤스는 조수와 하도급업자에게 영감과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지시한다. 35년 전 시카고예술대를 졸업한 그는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표 파는 일에서 출발했다.
회색 휴고 보스 정장을 입고 나타난 쿤스는 30대처럼 보였다. 시스티나성당 천장에 '창세기'를 완성하는 신들린 미켈란젤로의 이미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쿤스에 대해 미술평론가 로버트 휴스(Hughes)는 "스스로 미켈란젤로라고 말하고 다니고, 그의 작품을 가진 컬렉터들도 그가 미켈란젤로라고 믿고 있다"고 야유한다.
그래도 쿤스는 세계 거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당대 최고가(價) 예술가로 꼽힌다. '예술과 도덕까지 품 속에 끌어들이는' 현대 비즈니스의 마술같은 플랫폼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결과인지 모른다.
지난 4월 30일 쿤스를 1시간 동안 만났다. 그의 작품 '세이크리드(Sacred·성스러운) 하트'가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 옥상에 공개된 날이었다. 신세계는 그를 테마로 비즈니스를 전개했다. 쿤스가 들려준 '아트'이야기를, 비즈니스 성과와 함께 전한다.
예술 천재 vs. 마케팅 천재
조수에게 아이디어 주면 부품회사가 전부 만들어… “수백억원 가치 있나” 논란
“현대 사회의 불안 치유” 극찬·팬들도 만만치 않아
그러나 그들 모두 동의한다… ‘제프 쿤스를 빼고 현대 미술을 논할 수 없다’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것이 성공한 마케팅이라면 제프 쿤스는 단연 예술계 최고의 마케터다. 그는 지난 30년간 미술계 인물로는 이례적으로 큰 화제를 몰고 다녔다.
1991년 쿤스는 유명 포르노 배우 출신으로 나중에 이탈리아 정치인이 되는 치치올리나(본명 일로나 스탈러)와 결혼했다. 이듬해 두 사람이 이혼하기로 했을 때 치치올리나는 갓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로마로 떠났고 쿤스는 "납치"라며 10년 넘게 양육권 소송을 벌이다 패소했다. 쿤스는 이 경험을 계기로 납치·학대 아동을 돕는 '국제미아착취아동센터'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신세계와 공동 마케팅을 할 때도 제품 판매액의 10%를 이 센터에 기부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저는 단지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로 남기는 싫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많은 아이가 성적 학대, 노예 노동에 시달리고 있죠."
그의 작품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현대 사회의 불안을 치유한다"는 극찬부터 "비싼 가격 때문에 유명해진 키치(kitsch·싸구려 취향)"라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수십억원을 넘는 작품 가격도 화제와 논란거리다.
하지만 그에 대해 비판적인 평론가들조차 제프 쿤스 없이는 미국 현대미술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은 인정한다. 쿤스는 팬 사인회를 하는 몇 안 되는 예술가다. 이번에 처음 한국에 방문해서도 신세계를 통해 예약한 고객 100명에게 사인을 했다.
◆누가 사나
"노(No), 노, 노, 노!"
인터뷰 내내 활짝 웃는 얼굴이었던 쿤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본인을 컬렉터(수집가)를 사로잡는 데 뛰어난 마케터로 보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대목에서다. 그는 "그 이야기는 정말 이해 못 하겠다"고 했다.
"제가 다른 예술가들보다 상대의 필요(needs)를 더 잘 읽긴 해요. 월스트리트에서 일한 적이 있고 아홉살 때부터 용돈을 벌기 위해 집집이 다니며 장난감과 캔디를 팔았죠. 거기서 사람과 교류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예술이란 결국 사람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것이잖아요? 저는 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뿐입니다."
쿤스의 '고객 명단'에는 오늘날 세계 비즈니스계를 주름잡는 기업가들로 가득하다. 여기에는 구찌(의류), 크리스티(미술경매업체)를 보유한 프랑스 PPR그룹의 창업자 프랑수아 피노(Pinault), 미국의 억만장자 부동산 개발업자 일라이 브로드(Broad), 그리스 부동산 거물인 다키스 조아노(Joannou)가 있다. 기업으로는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치뱅크, 이탈리아 의류 기업 프라다, 벤츠 브랜드 가진 독일 자동차회사 다임러도 포함돼 있다. 쿤스는 주요 컬렉터의 명단을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서유럽 중심이었던 '쿤스 컬렉터'는 최근 아시아 등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국 컬렉터 사이에서도 쿤스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2009년 삼성그룹 미술관 리움은 '리본 묶은 매끄러운 달걀'(Smooth Egg with Bow)을 사서 전시했고, 신세계 이명희 회장 역시 몇해 전부터 제프 쿤스에 관심을 가져왔다. 작년 말 서미갤러리에서 "쿤스가 '세이크리드 하트'의 구입자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을 때 이 회장 측은 구매의향을 밝혔다.
이후 구매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쿤스 측에서 먼저 희망 가격을 보냈고 이 회장 측도 자체 조사를 통해 원하는 가격을 서미갤러리를 통해 쿤스 측에 전달했다. 인수 협상은 한 달이 안 돼 끝났다. 신세계 관계자는 "쿤스 작품이 자주 나오는 게 아니고 인수 희망자가 많기 때문에 협상을 길게 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구매 가격은 300억원 전후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액수는 아니다. 신세계갤러리 황호경 관장은 "300억원 이야기는 2007년 '세이크리드 하트'와 형태가 비슷한 '매달린 하트'의 경매가(217억원)를 기준으로 그간 쿤스 작품의 가격 상승 추이를 대입해 언론에서 추정한 가격"이라며 "경매를 제외하면 미술품 거래에서는 금액은 공개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말했다.
◆세계적 브랜드가 되는 법
지금은 세계적 브랜드가 됐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도 제프 쿤스는 파산을 걱정해야 하는 작가였다. '세이크리드 하트'가 포함된 연작(聯作) '축하'(Celebration) 시리즈를 만들 때는 작품 제작을 의뢰한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주물업체가 도산(1995년)하면서 제작비를 날렸다. 1999년에는 70명이 넘던 스튜디오 직원을 단 2명만 남기고 모두 해고했다.
하지만 같은 해 미국 출판 재벌 피터 브랜트(Brant)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쿤스의 도자기 조각 '핑크 팬더'를 180만달러(20억원)에 사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전까지 쿤스 작품의 최고 경매가를 4배 이상 뛰어넘은 금액이었다. 유명한 미술품 컬렉터이기도 한 브랜트는 1980년대 중반부터 쿤스의 작품을 수집해 왔다. 경매가 화제가 되면서 덩달아 브랜트가 가진 다른 쿤스의 작품도 값이 오르는 상황이 됐다.
만들어진 스타인가
“작품값 올라야 득 보는 컬렉터·딜러·경매회사 전부 합심해 몸값 띄워”
“난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다른 작가보다 잘 알뿐… 예술, 결국 소통 아닌가”
미국 예술전문지 '아트뉴스'의 선임기자 켈리 토마스(Thomas)는 "현대 예술 시장에서 유명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예술가의 재능뿐 컬렉터, 미술 딜러, 경매회사로 이뤄진 강력한 컨소시엄이 필수"라며 "제프 쿤스는 피터 브랜트, 일라이 브로드 같은 기업인 컬렉터, 래리 가고시안(Gagosian) 같은 미술 딜러, 소더비·크리스티 같은 경매회사가 이너서클(inner circle)을 이뤄 몸값을 띄운 경우"라고 평가했다. 이들 모두 쿤스의 작품 가격이 높아야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2008년 쿤스는 현대미술가로는 처음 프랑스 베르사유궁 안에서 전시를 열어 전 세계 뉴스의 주목을 받았다. 190만유로(33억원)가 든 전시 비용의 절반은 PPR그룹 창업자이자 쿤스 작품을 대거 보유하고 있는 프랑수아 피노가 댔다. AFP 통신은 "이 전시로 누가 이득을 보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쿤스는 시리즈 작품 가운데 제1호를 저명한 컬렉터에게 가격을 할인해주면서까지 팔고 '누가 사들인 작품'이라는 광고 효과를 노리는 등 뛰어난 사업 수완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쿤스는 "작품을 사준 컬렉터들에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관심은 작품 가격을 올리는 게 아니라 "오로지 현대미술의 경계를 넓히는 데 있다"고 말했다.
"돈이요? 제 작업을 지속하고 내 가족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플랫폼에 불과합니다. 그 나머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전 21세기 예술을 이끌어 가고 싶을 뿐이에요."
◆기업과 예술
쿤스는 "기업과의 콜래보레이션(collaboration·협업)은 국제미아착취아동센터 기금 마련을 위한 자선사업"이라고 했지만, 콜래보레이션 역시 그의 작품 활동과 밀접히 연결돼 있었다.
"1994년 의류 업체 휴고 보스 광고에 참여한 게 처음이었어요. 휴고 보스는 제 작품 '강아지(Puppy)'의 제작 비용을 지원해 줬죠." '강아지'는 높이 12m의 철근 구조에 흙을 채우고 그 위를 꽃과 풀로 덮어 만든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쿤스는 이후에도 갭(의류), 일리(커피), 키엘(화장품), BMW(자동차) 같은 유명 브랜드의 콜래보레이션에 참여했다. 구글의 검색 화면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기업과의 콜래보레이션에 거부감이 없었느냐고 하자 그는 "오히려 반대"라고 했다. "예술 작품을 만들 때는 내 비전을 완벽하게 반영하기 위해 주변과 분리된 상황에서 일하게 되지만 기업과 함께 작업하면 경험과 책임을 공유하고 서로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우리와 접촉하는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술로 비즈니스 될까
쿤스 작품 산 신세계백화점, 작품 이미지로 매장 장식… 한 달간 매출 14% 늘어
기업들은 제프 쿤스라는 브랜드를 마케팅에 이용한다. 제프 쿤스의 이름이 들어가면 스위스 중소기업이 만든 플라스틱 시계가 최고 5500만원(스위스 업체 이케포드, 제프 쿤스 시계 1만5118~5만1833달러)에 팔리고, 꽃병에도 800만원이 넘는 가격표가 붙는다(가고시안 갤러리, 제프 쿤스 화병 7500달러). 미디어에 소개되는 것은 물론이다.
신세계는 제프 쿤스의 작품 구입을 계기로 5월 한 달간 '쿤스 마케팅'을 벌였다. 쿤스 작품의 이미지가 들어간 목걸이, 셔츠, 컵, 마카롱(과자의 종류)을 한정판매하고, 쿤스의 이름이 들어간 풍선 1만개를 백화점 곳곳에 설치했다. 일반인으로 대상으로 작품을 선보이기 전날인 4월 28일 밤에는 비공개로 VIP 초청 파티를 열었다. 초대된 150명은 제프 쿤스로부터 직접 작품 설명을 들었다.
장재영 신세계 백화점 부문 고객전략본부장은 "단기적인 매출 증대 효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트렌드세터이자 고급스럽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강화해 롯데나 현대 같은 경쟁업체와 차별화하는 브랜드 전략에 중점을 두겠다"며 "앞으로 매년 몇 차례씩 예술 마케팅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쿤스는 기업과 콜래보레이션이 자신의 주된 활동에서 벗어난 "곁가지"라고 말하면서도 "신세계와의 협업이 환상적이었고, 이런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늘날 예술계의 문제는 좋은 작품일수록 대중이 보기 어려워진다는 데 있습니다. 인기가 올라가면 가격이 높아지고 (컬렉터들이 사들이면서) 일반인들의 눈앞에서는 사라지죠. 콜래보레이션을 통해서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게 좋아요."
인터뷰 말미 쿤스에게 기업이 예술과 만날 때 어떤 접근이 필요한지 물었다. 그는 30여초를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기업은 예술을 제품을 더 팔기 위한 마케팅으로만 보지 말고 더 넓고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나 커뮤니티를 풍성하게 만들어야 하죠. '풍성하게 한다'는 뜻은 예술을 촉매로 사람들을 교류하게 하고, 동시에 사람들에게 힘을 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