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천연가스 시대… 석유만큼 값 오를 것"

입력 2010.10.16 03:46 | 수정 2010.10.16 08:52

세계 천연가스 산업의 '실세' 메드베데프 가즈프롬社 부회장

세계 경제위기 이후 안정세를 보여왔던 석유·가스 가격이 최근 신흥국들의 경제 회복세와 함께 다시 불안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작년 한때 33달러대까지 떨어졌던 국제 유가는 최근 80달러를 넘어섰고, 천연가스 가격도 작년 최저치에 비해 50% 이상 올랐다. 2008년과 같은 에너지 위기가 재연되는 것은 아닐까?

세계 최대 천연가스 기업인 러시아 가즈프롬(Gazprom)의 알렉산데르 메드베데프(Alexander Medvedev) 부회장을 만나 그 답을 구해 보았다. 그는 세계 천연가스 산업의 '실세'로 통한다. 작년 말 타임지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100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 자원 가격이 하락할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원유 생산에 대한 투자가 지속되지 않으면 석유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가능성이 큽니다. 가스의 적정 가격도 최소한 유가 수준이 될 것입니다." 현재 천연가스 가격은 열량 기준으로 볼 때 석유의 40~50% 수준이다.

자원 확보가 절실한 한국으로선 결코 바라지 않는 시나리오다. 그는 "그때를 대비해 러시아와의 전략적 제휴 관계를 통해 에너지 공급선을 다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윈윈(win-win)의 파트너십'과 '상호주의'를 유난히 강조했다.

인터뷰는 서울 하얏트 호텔 1층 커피숍에서 이뤄졌다. 조용한 인터뷰룸이 아니었다. 그는 굳이 커피숍 한복판, 일반인들 사이에서 인터뷰를 하려 했다. 테이블에는 콜라 캔 하나와 유리컵만 놓여 있었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21세기는 천연가스의 시대

―자원 확보 전쟁이 격화되고 있는데, 석유·가스 등 자원시장 전망은 어떤가요?

"저는 전통적인 탄화수소(석유와 천연가스의 주성분) 연료 없이는 경제 성장을 지속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특히 가스는 연료 효율성이 좋고 이산화탄소 배출이 적어 발전(發電)에선 최고입니다. 앞으로 100년 이상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 세기가 석유의 시대였다면 이번 세기는 천연가스의 시대가 될 겁니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극복되면 천연가스와 원유 가격은 크게 올라갈 겁니다."

한국이 이 같은 자원전쟁의 파도를 어떻게 넘어야 할지 물어봤다. 그는 러시아에서 북한을 경유해 한국까지 육로로 오는 파이프라인 가스(PNG) 프로젝트를 강조했다. 이 프로젝트는 2004년 한·러 정상회담 이후 본격 추진됐지만, 남북 관계 경색으로 전혀 진척이 없는 상태다.

그는 "경제적 이득이 크기 때문에 정치적인 타결이 이뤄진다면 가능한 한 빨리 사업을 진행하고 싶다"며 강한 의욕을 보였다. "한국에 가장 좋은 방법은 러시아와 전략적 제휴 관계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기업들의 전문성과 노하우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조선(造船)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공동사업이 이미 추진되고, 합작투자회사도 만들려 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자신과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한국과 가까운 사할린에서 태어났고, 선경(SK의 전신)의 최종현 회장 등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자원 무기화 의도 없다"

가즈프롬이 세계 에너지 선두 기업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고객 우선주의입니다. 고객과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양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국제 거래에서 일방적인 관계는 미래 협력을 어둡게 합니다."

그러나 이 대목은 선뜻 동의하기 힘들었다. 가즈프롬은 2008년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국가들이 가스 가격 인상 요구를 수용하지 않자 가스 공급을 중단했다. 이에 동유럽 국가들이 유럽으로 가는 자국 내 파이프라인을 잠가버려 가스대란이 일어났다.

―러시아가 자원을 무기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잖습니까.

"때때로 그런 소문에 직면합니다만 실제는 아닙니다.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에 우리는 오랫동안 저가에 가스를 공급했습니다. 계약대로 돈을 내라고 하자 그들이 파이프라인을 잠가 우리를 협박한 것입니다. 가스 사업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가스 구매자가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수입(收入)을 의존합니다. 그것은 상호 의존이며 '윈윈'의 파트너십이 돼야 합니다. 냉전의 시기에도, 한국의 민항기가 격추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우리의 천연가스는 스위스 시계처럼 정확하게 유럽에 공급됐습니다. 에너지가 국가 안보의 핵심요소지만 이를 불필요하게 정치화해선 안 됩니다."

■새로운 화석에너지 개발이 신성장엔진

가즈프롬은 2008년 시가총액 세계 3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경영난을 겪으면서 지금은 36위로 내려앉았다. "우리 주식은 투기의 변덕 때문에 부적절하게 타격을 받았습니다. 가즈프롬 주식은 내실에 비해 매우 저평가돼 있습니다. 가즈프롬은 올해 가장 이익을 많이 올리는 회사가 될 것입니다."

민감한 정치적 주제로 들어갔다. 러시아에서 '정치권력은 가즈프롬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가즈프롬 회장을 지냈다. 그는 "러시아 정부는 가즈프롬 지분 50% 이상을 소유한 지배주주지만, 우리는 크렘린(대통령궁)의 전화 한 통으로 좌지우지되는 회사가 아니라 이사회에 의해 경영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사 중 다수는 러시아 정부 소속 아닙니까?

"한국·프랑스·캐나다·노르웨이도 정부가 에너지 기업을 관리하잖아요. 중요한 것은 경영의 질입니다."

푸틴 총리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부담을 느낀 듯 말이 느려졌다. 단어 선택에도 신중했다. 콜라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켠 뒤 말을 이어갔다. "아니에요. 푸틴 총리가 가즈프롬을 몇 차례 방문했지만…. 그런 개인적 관계가 아닙니다."

그는 대통령과 성이 같다. 그래서 혹시 친인척 관계가 아닌지 물었다. "메드베데프는 러시아에서 아주 흔한 성(姓)입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김(金)'이나 '이(李)'씨라고 해야 할까요." 비로소 웃음이 터졌다.

타임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뽑힌 이유를 묻자 농담으로 받았다. "제가 대륙 간 아이스하키 리그 회장인데, 타임지가 아이스하키에 관심이 많았나 봅니다." 가즈프롬 CEO가 아닌데도 선정된 이유를 다시 캐물었다. "동료들의 노력이 반영된 거지요."

그는 자신의 경영 원칙이 '규율과 창의성의 조화'라고 했다. "과거를 잊지 말되, 미래를 함께 봐야 합니다." 그는 가즈프롬의 신성장 엔진으로 새로운 화석 에너지를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 "화학적으로 석탄에서 가스를 뽑아내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오일샌드와 해저에 깔려 있는 메탄 하이드레이트(불타는 얼음)도 경제성이 생길 겁니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그는 뜻밖의 말을 했다. "자원도 중요하지만 혁신과 인적자원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자원으로 번 돈을 이제는 경제 혁신에 활용하려고 합니다. 세계적 기업과 인재들을 적극 끌어들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특히 인적 자원은 하루아침에 키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육에 투자해야 하는 겁니다."

그는 한국이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말하는 듯했다. 자원 확보를 위한 국제적 파트너십을 쌓으면서 인적 자원에 승부를 걸라는 것이었다.

가즈프롬, 러시아 GDP 25% 차지
메드베데프 부회장, 푸틴과 친해

가즈프롬은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 생산 기업으로 1989년 설립됐다. 세계 천연가스 매장량의 17%, 생산량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서시베리아와 러시아 북부 지역에 매장된 가스를 유럽 등 전 세계 3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직원 수는 43만명에 달하며, 소유한 파이프라인 길이만 15만㎞가 넘는다.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러시아 경제에선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 1993년 민영화됐다가 2004년 다시 국영화됐다. 주요 경영진은 정부가 장악하고 있으며,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이 회사 회장을 지냈다. 그래서 '러시아 정계의 돈줄'이라든가 '최고의 경제 권력'으로 불리기도 한다. 근래 들어 사업 영역을 가스에서 원유와 발전 분야 등 에너지 전 분야로 확대하고 있다. 일간 신문인 '이즈베스티야'와 3대 전국 방송의 하나인 NTV 등 러시아 언론사를 비롯, 해외에도 100여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2008년 중반 시가총액이 3000억달러를 넘으면서 엑손모빌과 GE에 이어 세계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 경제위기 여파로 그해 말에는 러시아 정부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알렉산데르 메드베데프(55) 부회장은 알렉세이 밀레르(Miller) 회장에 이어 가즈프롬의 이인자지만, 천연가스 수출과 공급 부문을 총 책임지고 있는 실세다. 동유럽 국가들과 가스 분쟁 과정에서도 가스 공급 중단 여부를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등 대외 분야의 '칼자루'를 쥐고 있다. 푸틴 총리와도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오스트리아 도나우 은행 등에서 국제경제 및 금융 전문가로 일하다 2002년 가즈프롬 경영진으로 영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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