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자에게 코로나 사태가 무서운 것은 돈이 생산 현장에 잠겨 버리기 때문이다. 공장 짓고 재료 사고 사람을 써 물건 만드는 것은 전부 돈을 쓰는 일. 물건이 시장에 팔려 돈이 들어와야 회사가 살아난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해 수요가 증발해 버리면, 회사는 끊임없이 현금을 소진하는 '돈 먹는 하마'일 뿐이다. 수요 자체가 줄었을 때 제조업이 살아남으려면 적은 생산량으로도 이익을 낼 수 있게 체질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코로나발(發) 수요 격감 시대에 '제조업이 사는 법'을 보여 주는 기업이 있다. 96년 역사의 일본 에어컨 전문 회사 다이킨공업(이하 다이킨)이다. 에어컨·냉동기 등 공조(空調) 사업에 집중하는 전통 제조업체이지만, 10년 연속 매출·영업이익이 증가했다. 10년간 매출은 2.5배, 영업이익은 6배 늘었다. 하지만 다이킨이 대단한 이유가 10년 연속 증수증익(增收增益)에만 있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코로나 사태에 따른 수요 급감, 이후 바뀔 시장 상황에 제조업이 어떻게 대응할지 시사점을 준다는 게 더 중요하다.
다이킨이 수요 급감에 기민한 대응력을 갖게 된 것은 일본 내 경쟁사들보다 더 빨리 해외시장에 눈을 돌린 덕분이었다. 다이킨의 일본·해외 매출 비중은 20년 전 8대2였지만 지금은 2대8로 해외가 압도적. 해외에서 급성장한 덕분에 다이킨은 2000~2007년 최고 실적을 매년 경신했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로 2008·2009년 연속으로 실적이 급락하며 큰 교훈을 얻었다. 생산 부문이 성장을 당연하게 여기면 갑자기 수요가 급감했을 때 대응력이 떨어지게 되고, 성장 때 번 돈보다 오히려 더 큰돈을 까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때 큰 교훈을 얻은 다이킨은 생산 체제를 어떻게 유연화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도가와 마사노리(十河政則·71) 다이킨 사장은 고민의 결과를 '스몰(small) 제조'로 요약했다. 그는 "수요 변동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고 소량 생산에도 채산성을 맞추는 생산 라인을 목표로 하는 개혁"이라고 했다. 스몰 제조의 키워드는 ①모듈화 ②N분의 1 ③코스트 오토메이션 등 세 가지. 코로나 사태 이후 대량 생산 제조업이 가야 할 방향, 다이킨의 스몰 제조 전략을 정리했다.
전략① 모듈화
어떤 자동차 회사가 한 지역에 연산 30만대짜리 공장을 몇 년 만에 서너 개 연달아 지었다고 가정해 보자. 마지막 공장은 아예 연산 40만~50만대의 매머드급으로, 고가의 최신 자동화 설비까지 완비했다. 공장을 크게 짓는 것은 물건이 잘 팔릴 때는 물론 효과적이다. 그러나 안 팔릴 때는 재앙으로 바뀐다. 고정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정작 팔리는 차만 소량으로 싸게 만드는 것도 불가능해지는 이중고(二重苦)에 빠지기 십상이다.
다이킨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게 생산 라인의 모듈화다. 레고 블록처럼 떼었다 붙였다 하는 식의 설비 모듈 증감만으로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제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고객이 원할 때 필요한 제품을 필요한 양만큼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생산 라인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다이킨의 주력 제품인 에어컨은 난도가 높다. 에어컨은 기후·경기에 따라 수요가 크게 변동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상이변으로 무더위가 심해지면 단번에 대량 주문이 몰린다. 또 어떤 돌발 상황, 재해 상황 때문에 주문에 급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 급격한 수요 변동에 대응하지 못하면 수요를 못 대 매출·이익을 올릴 기회를 경쟁사에 갖다 바치거나, 반대로 대량의 악성 재고를 남기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 다이킨이 고안한 게 '시장 접근 전략'이다. 각 나라·지역 요구를 만족하는 제품을 현지에서 생산해 바로 공급한다는 개념이다. 생산 장소가 시장에 가까우면 그만큼 고객에게 제품을 전달할 때까지의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날씨·경기 변화로 수요가 출렁거려도 더 빠르게 대처하면서 판매 기회를 넓히고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게다가 환율 변동의 리스크에 강하다는 부가적인 이점도 있다.
이 전략을 생산 차원에서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모듈화다. 생산량에 따라 그에 맞는 수의 설비 모듈을 준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이킨의 최신 공장은 빌딩용 에어컨을 1년에 6만대 생산한다. 이 생산량에 맞추기 위해 생산 라인은 설비 모듈 44개로 구성되어 있다. 설비 모듈 수를 줄이면 소량 생산, 늘리면 대량생산에 대응할 수 있게 미리 설계돼 있다. 따라서 이 공장은 연간 5000대에서 10만대까지 매우 큰 폭의 수요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기존 컨베이어 라인 방식의 공장에서는 빌딩용 에어컨은 연간 5만대, 가정용 에어컨은 연간 20만대의 생산 라인을 구축하지 않으면 채산성을 맞출 수 없었다.
모듈 라인은 또 '빠르고 싸다'는 특징이 있다. 종래와 달리 새 공장을 만들 때마다 라인을 재설계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공장 지을 때 돈이 덜 든다. 또 공장 세우는 기간도 종전의 절반으로 단축할 수 있다. 공장을 수요 변화에 유연하게, 빨리, 싸게 지을 수 있다는 게 시장 개척에 주는 이점은 크다. 성장이 예상되지만 시장이 아직 작아 소규모로 시작해야 하는 신흥국 등에 낮은 비용으로 빠르게 참여할 수 있고, 또 수요 감소로 공장을 축소·철수해야 할 때도 최소 비용으로 단행할 수 있다.
전략② N분의 1
기존 대형 설비를 2분의 1, 3분의 1로 나눠 운영하는 것이다. 가정용 에어컨의 경우 기존엔 연산 30만대 기준의 대형 프레스기를 사용했는데, 그 정도 생산량을 유지해야 이익이 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가 침체됐을 때나 신흥국에 새 공장을 지을 때, 이런 대규모 생산량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를 N분의 1로 줄이면서도 이익이 나는 구조, 즉 연산 30만대 프레스기를 3분의 1로 소규모화 해 연산 10만대 기준 프레스기로도 이익이 나는 구조로 바꾸는 것이다. 다이킨은 현재 연산 5만대 기준 프레스기로도 수익이 나는 구조를 확립했다. 이런 개혁을 계속해 생산량이 줄어도 어떻게든 이익을 낼 수 있는 공장을 만들면, 코로나 사태와 같은 수요 급감 상황에서도 경쟁사보다 피해를 훨씬 줄일 수 있다.
전략③ 코스트오토메이션
코스트오토메이션이란 무조건적인 자동화를 하지 않고 모든 부분에 비용 대비 효율을 철저히 따져 자동화를 진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해서 효율적인 부분까지 굳이 자동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로봇 등을 대량 투입해 전부 자동화해 버리면 스몰 제조에 최적화된 공장으로 진화하는 것을 오히려 저해할 수도 있다. 생산 현장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미세 조정이 잘 안 돼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태가 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다이킨은 생산 현장의 진화 여지를 남기는 자동화를 선호한다.
“말단부터 임원까지 의견은 다 듣는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내가 한다”
문제 사원에서 CEO로 … 다이킨공업 일으킨 이노우에 회장
세계 1위 공조 기업 다이킨공업(이하 다이킨)을 만든 인물은 이노우에 노리유키(井上禮之·사진) 회장이다. 1994년 사장 취임 이후 2002년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 2014년 CEO 퇴임까지 글로벌 금융 위기가 있었던 2008·2009년을 뺀 모든 기간에 연속 성장을 이끌었다.
이노우에 경영의 핵심은 중의독재(衆議獨裁)다. ‘사람은 내치지 않는다. 말단부터 임원까지 의견을 듣는다.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이해·설득시킨다. 그러나 최종 판단은 사장 독단, 책임도 스스로 진다’이다.
그는 대학 졸업 때까지 꿈이 없었다. 교토대 교수로 토론을 즐기는 인텔리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열등감이 많았다. 교토대 출신이 즐비한 수재 집안에서 교토대를 못 간 것도 작용했다. ‘어디 취직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름도 몰랐던 오사카금속공업(현 다이킨)에 들어간 것도 아버지 연줄이었다. 들어가서도 담배 피우고 술 마시며 노는 게 좋았다. 영업직을 희망했지만 총무과에 배속, 자존심도 의욕도 사라졌다. 입사 1년 후 싫증이 나 무단 결근했다. 술과 마작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돈도 갈 곳도 없어진 열흘 뒤 조용히 다시 출근했는데 동료들이 아무 말 없이 받아주었다. 그 포용력, 귀속할 장소가 있다는 안도감. 회사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사람을 좋아했던 이노우에는 그 뒤 총무·인사 업무에 혼신을 다했다. 회사 안팎 갖은 문제를 사람들과 부딪쳐 가며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서 차츰 인정을 받게 됐다.
1994년 그는 창업자 장남인 야마다 미노루 당시 사장의 지명을 받아 차기 사장에 올랐다. 회사 주력인 공조 사업을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총무·인사 전무를 사장으로 임명한 일은 사내에 큰 충격이었다. 그가 임명된 것은 회사가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20년간 사장으로 재임한 마지막 5년의 야마다는 측근에게 둘러싸인 벌거벗은 왕이었다. 부문장들은 파벌을 만들어 군웅할거. 이 상황을 부수고 구성원 마음을 한데 모아 회사를 살리라는 명을 받은 게 이노우에였다.
신임 사장을 기다린 것은 17년 만의 적자였다. 버블(거품) 붕괴로 39억엔 적자. 그러나 그때부터 글로벌 금융 위기 직전인 2007년까지 이노우에가 이끈 다이킨은 14년 연속 증익을 달성했다. 비결은 직원에게 책임과 권한을 부여해 스스로 목표를 제안하고 성과를 내게 한 것이었다. 본인이 입사 초기 방황했을 때 회사가 믿어준 덕분에 실력을 발휘한 것을 직원들에게 그대로 대입한 것이었다.
이노우에는 야마다 전 사장의 명을 신속히 이행했다. 가정용 에어컨 사업을 재건했다. 이전 경영진이 공산국이라 싫어했던 중국 시장 진출도 성공시켰다. 계속 적자였던 신규 사업도 정리했다. 사업 철수로 200여 명이 남았지만 일일이 면담해 다른 일을 맡겼다. 떠난 사람은 몇 명뿐이었다. 이전 사장 시절 측근이었던 ‘군웅’들도 잘라내지 않고 전원 직급 정년까지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