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파괴(Digital disruption)' 여파를 가장 크게 받은 산업은 뭘까. 전통 미디어산업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19년 TV 광고 매출은 전년보다 3.6% 감소하고, 인쇄 광고 매출은 19.6% 급감했다. 반면 디지털 광고 매출은 14.9% 증가했다. 이런 시대 눈부신 성장을 이룬 미디어 기업이 있다. 독일 악셀 스프링거다. 빌트(Bild)나 디벨트(Die Welt) 같은 신문이 주력인 미디어그룹인데, 매출이 2009년 21억유로에서 2018년 32억유로로 늘었다. 특히 디지털 분야 매출이 전체 매출의 71%에 이른다. 디지털 분야 이익 기여도는 84%. 디지털 전환에 성공한 대표적 미디어 기업으로 꼽히는 이유다.
재즈 연주자 꿈꾸던 CEO가 변화 주도
이런 변화를 이끈 건 2002년 39세에 CEO 자리에 올라 지금까지 재임 중인 마티아스 되프너다. 예술을 전공했고, 재즈 밴드 베이스 연주자를 꿈꾸던 그는 음악 평론가로 언론에 입문했다. 처음 CEO가 됐을 때 젊은 나이와 예술을 전공한 전력 때문에 회의론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재즈 연주자처럼 창의적이고 실험적이며 열린 마음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변화를 이뤄냈다. 많은 언론사가 수십년 전부터 디지털화를 이야기했지만, 종이신문 콘텐츠를 온라인에 옮기는 데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되프너는 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노력과 다양한 시도를 펼쳤다.
가장 두드러진 건 공격적 기업 인수. 2000~2013년 기업 인수·합병 건수만 82건, 합작투자가 10건에 이른다. 2013년 이후엔 언론과 직접 관련 없는 초기 비즈니스에도 많이 투자했다. 2016년 상반기까지만 90여건에 이른다. 대부분 인터넷·모바일 스타트업이다. 미국 기업 뉴스 사이트 비즈니스 인사이더, 유럽 여성 포털 사이트, 온라인 가격 비교 사이트, 할인 쿠폰 사이트, 구인·구직 포털 사이트를 인수했다. 온라인 비디오게임 플랫폼, 온라인 축구 커뮤니티를 인수하고, 에어비앤비에 지분 투자도 했다.
미디어 출판업계에서 디지털 시대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마티아스 되프너 악셀 스프링거 CEO(최고경영자). 재즈 연주자를 꿈꾸던 음악평론가 출신이다. 오른쪽은 독일 베를린에 있는 악셀스프링거 본사.
/악셀 스프링거·건축사무소 에이럽(ARUP)
온갖 디지털 미디어 서비스 실험
파괴적 혁신 이론을 창안한 크리슨텐슨 교수는 "존재하지 않는 시장, 다시 말해 신시장은 분석할 수 없으며, 학습하고 발견해야 한다"고 했는데, 악셀 스프링거가 바로 그랬다. 미디어의 디지털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다양한 판매 방식, 과금 방식, 제휴, 콘텐츠 제공 방식을 실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조였다.
악셀 스프링거는 '저널리즘의 아이튠스'라 불리는 네덜란드 스타트업 브렌들(Blendle)을 인수했다. 아이튠스가 노래를 한 곡씩 나눠 팔듯이 기사를 하나씩 나눠 파는 모델을 시험하기 위해서다. 레드리(Readly)라는 스타트업과 제휴해 월 구독료를 내면 전 세계 수백개 언론사 기사 수천개를 볼 수 있는 서비스에 참여했다. 음악 구독 서비스 스포티파이(Spotify)의 언론 버전을 시험한 것. "어느 방식이 승자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한 가지 도그마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속내다. 빌트 온라인판을 공짜로 보여주면서 프리미엄 콘텐츠에는 돈을 내야 하는 프리미엄(Freemium·free+premium) 모델을 독일 언론 중에서는 가장 먼저 시도했고, 유료화를 유도하기 위해 독일 축구 분데스리가 하이라이트 동영상을 온라인에서 쓸 권리를 4년간 확보해 프리미엄 콘텐츠로 제공했다. 페이스북·트위터·스냅챗 등 각각의 소셜미디어마다 전담 팀을 만들어 거기에 최적화된 콘텐츠와 광고를 기획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런 기업 인수 전략을 DICE로 요약한다. 스스로 개발하고(Develop), 부족하면 다른 기업에 투자하고(Invest), 다른 기업과 협력하며(Collaboration), 사업을 확대한다(Expand)는 것이다.
기업 인수는 '학습'의 의미도 강했다. '새로운 피'와 교류하고 배우는 기회라는 얘기다. 악셀 스프링거는 2013년 미국 액셀러레이터 기업과 손잡고 베를린에 악셀 스프링거 플러그 앤드 플레이를 창립했다. 스타트업에 창업 공간과 자금, 멘토링을 제공하는 기관으로 새로운 기술과 인재, 투자 기회를 접하는 기회였다. 2015년엔 삼성과 손잡고 뉴스 취합 플랫폼 업데이(Upday)를 론칭했다. 되프너는 예술을 전공한 게 시간 낭비가 아니며 "서로 다른 영역 사이 아이디어 교환, 아주 다른 것에서 배우는 것은 언제나 값지다"고 평가했다.
핵심 경영진을 실리콘밸리 연수 보내
되프너는 악셀 스프링거 비전을 "유럽 미디어산업의 디지털화 승자"로 내걸었으며, "퀄리티 저널리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신문은 종이에서 해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가 쉽게 이뤄질 리 없다. 무엇보다 오랜 종이 시대 사고에 젖어 있는 구성원들 마인드세트를 바꿔야 했다. 되프너는 이를 위해 핵심 경영진을 업무에서 손떼게 하고 실리콘밸리에 연수를 보냈다. 빌트 편집국장과 그룹 최고마케팅책임자, 디지털 자회사 이데알로 CEO 3명이 대상. 삼인방은 실리콘밸리에서 10개월을 머물며 그곳 기업가들이 위험 감수와 실패를 독일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기술을 두려워하기보다 끌어안아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기업 문화가 독일에 비해 훨씬 덜 위계적이고, 커뮤니케이션이 수평적이라는 점도 알게 됐다. 3인방은 연수 후 되프너 사장에게 미디어 분야 디지털화를 더 재촉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뒤를 이어 악셀 스프링거 최고경영진 70명이 실리콘밸리에서 3일간 워크숍을 가졌는데, 그 구호는 '안전지대를 떠나라(Leaving the comfort zone)'였다.
악셀 스프링거는 2019년 미국 사모펀드인 KKR을 전략적 투자자로 받아들였다. KKR은 악셀 스프링거 소액주주 지분 44%를 공개 매수해 악셀 스프링거 사주 가족과 마티아스 되프너(지분 합계 50.6%)와 회사를 공동 경영하기로 하고, 기존 경영진은 유임했다. 단기적인 주가 움직임에 구애받지 않고 디지털 분야 투자를 가속화하려는 의도다.
미래에 대해 겸손한 리더십 강조
디지털 파괴 시대에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첫째는 겸손이다. 되프너는 미래에 대해 겸손했다. 미래를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며 대비했다. 또 그는 무지에 대해 겸손했다.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배움에 대해 열려 있었다. 실패에 대해서도 겸손했다. 파괴적 기술의 진로는 사전에 알 수 없기에 다양한 실험을 했으며, 실패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되프너는 스스로 단기적 비관주의자지만, 장기적 낙관주의자라고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부정적인 놀라움을 피하기 위해 최악의 경우를 늘 생각하고 모든 것에 의문을 가지지만, 그렇게 잘 준비하면 미래가 낙관적일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