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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흑사병은 서유럽의 발흥과 동유럽의 몰락을 가져왔다

Culture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입력 2020.02.07 03:00 수정 2020.02.21 00:19

홍춘욱의 경제사 여행 (5) 세계사 전환점 된 전염병 대유행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최근 중국에서 '우한 폐렴'으로 일컫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지면서 세계적인 대유행(pandemic)에 대한 공포가 높아지고 있다. 2003년 중증 급성호흡기질환 증후군(SARS) 사례를 거론하며 충격이 금방 진정될 것이라고 지적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2003년과 비교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여행산업이 훨씬 커진 만큼 경제에 무시 못할 충격을 미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역사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세계적인 전염병 대유행 이후 세계사의 전환점이 출현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 사례가 바로 흑사병(Black Death)이다. 역사에 기록된 첫 번째 흑사병은 6세기 중엽, 동로마 제국이었다. 당시 유스티아누스 대제는 게르만족으로부터 로마제국 시절의 영토를 다시 빼앗으면서 전성기를 열고 있었지만, 흑사병이 이 모든 행로를 바꾸어 놓았다.

유럽 패권 지도를 바꾼 흑사병

"병은 발열로부터 시작했다. 첫날이나 둘째 날에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와 목에 림프선 종양이 생겼다. 열은 폭발적으로 오르고 림프선은 더욱 부풀어 올랐다. (중략) 추운 겨울이 오자 이 병은 폐페스트로 형태를 바꾸어 기침을 통해 퍼져 폐를 망가뜨렸다. 사람들은 피를 토하고 몸을 떨며 죽어갔다."(아노 카렌 '전염병의 문화사')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만 하루에 사망자 1만 명을 넘어갔으며, 이 역병이 종식되었을 때 도시 인구의 40%가 사망해 서로마제국의 옛 영토를 되찾으려던 유스티아누스 대제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어떤 역사가들은 7세기 후반, 이슬람 세력이 그토록 신속하게 많은 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역병이 이미 그 나라들을 물리쳐 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로부터 800년이 지난 1300년대 무렵 대유행의 발판이 다시 만들어졌다. 6세기 동로마제국에 못지않게 도시 인구가 늘어난 데다, 십자군 전쟁 이후 중동과 빈번하게 접촉하기 시작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1346년 흑해 돈 강 하류에 자리 잡은 무역 도시 타나(Tana)부터 흑사병이 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347년 초 흑사병은 콘스탄티노플을 덮쳤고 1348년 봄에는 프랑스와 북아프리카 등으로 번져나갔다. 1348년 중순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는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기도회를 주관해달라고 당부했고, 다음과 같은 서한을 신도 앞에서 낭독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죄를 씻고자 하는 아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 보좌에서 천둥과 번개 같은 불행을 내리치신다. 이럴진대 동부에서 비롯된 흑사병의 재앙이 인근 왕국에 당도했다 하니 성심을 다해 쉴 새 없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병마의 손실을 이곳까지 뻗쳐 재난을 부르고 주민의 생명을 앗아갈 것임을 두려워할지어다."(대런 애스모글루·제임스 로빈슨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동유럽 몰락과 서유럽 발흥은 전염병 영향

17세기 로마에서 흑사병 치료를 하러 돌아다녔던 의사 '닥터 쉬나벨 폰 롬'. 감염 방지를 위해 새부리 가면을 쓰고 긴 검은 겉옷을 입었다. [위키피디아]
기도는 간절했지만, 흑사병의 예방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흑사병의 원인균은 쥐들이 옮기는 벼룩에 의해 전파되기 때문이다. 병원체는 벼룩을 죽이지 않으며, 감염된 벼룩이 숙주인 쥐를 물어 병을 옮긴다. 만일 쥐가 페스트로 죽으면, 벼룩은 새로운 숙주를 찾아 이동하며 이 과정에서 전염이 확산된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전염 과정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전염병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잉글랜드 인구는 흑사병 상륙 이후 단 100년 만에 577만 명에서 227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사회 및 경제 시스템은 뿌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흑사병이 가져온 변화는 사회마다 달랐다.

서유럽은 봉건제가 해체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노동력이 급감하는 가운데 농노의 협상력이 높아졌던 것이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에서는 1381년 와트 타일러가 이끄는 농민 반란이 발발해 런던 일대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타일러가 이끄는 반란군은 결국 무릎을 꿇고 타일러도 처형되고 말았지만, 농노들을 예전처럼 구속하려는 시도는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봉건적인 노역이 자취를 감춘 가운데 잉글랜드 국민소득은 가파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이탈리아 로마에서 키지 추기경이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 로마 바르베리니 궁전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이다. [조선일보 DB·Corbis]
반면, 동유럽은 정반대 일이 벌어졌다. 서유럽에 비해 동유럽 영주는 더 넓은 땅을 보유하고 있었던 데다, 도시가 발달하지 못해 농노들이 자유를 찾아 이탈할 기회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농노들은 그나마 있던 자유마저 빼앗기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폴란드 코르친 지역에서는 1533년만 해도 영주에 대한 노역 대신 돈을 지불하고 있었지만, 1600년경에는 다시 강제 노역으로 환원되었다고 한다. 결국 흑사병이 유럽에 오기 이전만 해도 동유럽과 서유럽의 경제와 제도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지만, 이후의 대응이 두 지역 간에 성취를 결정적으로 갈라놓는 분기점이 되었던 셈이다.

백신 발명 이후 위험 줄긴했으나 대응 불안 
한편으로는 서유럽의 발흥을, 한편으로는 동유럽의 몰락을 불러온 전염병은 과거에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었고 결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질병의 감염원조차도 알 수 없었던 14세기와 비교해서 지금은 어떤가? 더욱 진보된 의료 체계와 방식, 그리고 백신이라는 강력한 무기의 등장은 전염병의 위험을 눈에 띄게 감소시켰다. 이전보다도 전염병이 '결정적 분기점'이 될 수 있는 기회는 현저하게 낮아진 것이다.

다시 중국 우한 폐렴 이야기로 돌아가면, 아무리 체계가 향상되었어도 물동량과 교통량은 14세기에 비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기에 새로운 전염병의 확산이 시작된 나라의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03년 사스(SARS)와 2013년 조류독감, 그리고 2020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어지는 흐름은 중국 당국 대처가 적절한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한 번은 실수이지만, 계속 반복되면 결국 ‘법칙’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역사적 전환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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