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주 위생국에 따르면 뉴욕시 내 음식점 수는 3만4500곳에 달한다. 대략 인구 240명당 1곳꼴인 셈이다. 뉴욕타임스는 매년 이 치열한 전장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레스토랑을 뽑는다. 지난해 뉴욕타임스가 꼽은 '올해의 뉴욕 레스토랑' 1위는 한국인 박정현(34) 셰프와 아내 박정은(36) 대표가 운영하는 파인 다이닝(고급) 레스토랑 아토믹스(Atomix)였다. 아토믹스는 22일 발표한 세계적 권위 음식점 안내서 2020년 미쉐린 가이드 뉴욕판에서도 별 2개를 받았다. 올해 별 2개를 받은 음식점은 뉴욕 전체를 통틀어 14곳뿐이다. 지난달 뉴욕 아토믹스에서 박 셰프를 직접 만나 하루 일과부터 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일단 시장부터 갑니다. 오늘(토요일)은 유니언스퀘어에 장이 크게 서서 거기부터 다녀왔죠. 그리고 오후 3시부터는 재료를 다듬고 영업을 준비합니다. 저녁 6시와 9시에 각각 14명 정도 손님을 받는데, 끝나고 마무리를 하면 새벽 1시 정도에 집에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하죠."
아침부터 따지면 대략 17~18시간을 일하는 강행군이다. 요리를 담당하는 박 셰프와 서빙과 운영을 총괄하는 박 대표는 7년 전 뉴욕에 첫발을 디딘 후 각자 4년여간 빠듯한 수행 기간을 거쳤다. 1년 5개월 전 문을 연 아토믹스가 한끼 25만원(205달러)에 하루 28명의 손님만 받아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①지인 집에 초대받은 듯한 인테리어
아토믹스는 파인 다이닝으로는 드물게 주거 구역 안에 자리 잡았다. 시끄럽고 복잡한 맨해튼 미드타운에서 딱 한 블록만 들어가면 나오는 조용한 공동주택 단지. 조그만 금색 간판이 아토믹스로 향하는 유일한 이정표다. 문 앞을 서성이면 벨을 채 누르기도 전에 가이드가 현관을 나와 안으로 안내한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어두운 1층 복도를 지나면 곧 자연광이 쏟아지는 탁 트인 공간이 나오고, 이내 지하의 조용하고 은밀한 식당 내부로 이어진다. 점잖고 격조 높은 고급 레스토랑이 아닌 지인의 집에서 열리는 비밀스러운 저녁 자리에 초대받는 느낌을 일부러 연출한 결과다. 디귿(ㄷ) 자형 테이블과 의자는 바깥쪽에 앉은 손님과 안쪽에 서서 서빙하는 직원들이 눈을 맞출 수 있게 높이를 맞춰 따로 설계했다.
자리에 앉으면 담당 직원이 비단주머니를 펼쳐 여러 색깔의 젓가락들을 보여준다. 자개로 장식된 서로 다른 젓가락들이 펼쳐지자 손님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박 대표는 "아토믹스를 어렵고 부담스럽지 않은 파인 다이닝으로 꾸미기 위해 공연에 쓰이는 연출 기법을 세심하게 도입했다"며 "단순히 '음식이 맛있다' 같은 평가에 그치지 않고, 레스토랑 문밖을 나서도 '다시 오고 싶다'는 기억을 심어주려면 주방에선 음식을 내고, 손님은 이를 먹는 일방적인 경험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②깜깜이 메뉴로 기대감 상승 효과
아토믹스는 매일 저녁 회, 국, 전, 찜, 조림 같은 10가지 요리를 단일 코스로 선보인다. 일반적으로 레스토랑에 가면 메뉴를 보고 손님이 원하는 음식을 주문하지만, 아토믹스에서는 어떤 음식이 나올지 손님은 미리 알 수 없다. 각각의 음식을 서빙하기 직전에 요리를 상징하는 일러스트가 그려진 카드가 주어지는데, 이 카드를 봐야 어떤 요리가 나올지 짐작할 수 있다. 순서가 뒤바뀌면서 올 수 있는 파격적인 혼란이 이곳에서는 유희다.
재료에는 국경이 없다. 이날 상에 오른 생선은 일본과 스페인에서 왔다. 3개월마다 바뀌는 재료들은 두세 군데 공급처에서 나눠 받는다. 여러 공급처에서 받은 재료 중에 더 좋은 재료가 상에 오른다. 한식의 핵심인 장(醬)류는 전라남도 담양에서 공수한다. 박 셰프는 "산지에서 항공편으로 냉장 배송을 하면 아토믹스 주방까지 2박 3일이면 도착한다. 제철 두릅 같은 구하기 어려운 재료를 한국에서 같이 공부한 친구들이 먼저 챙겨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재료는 박 셰프 손안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고급 재료로 손꼽히는 푸아그라에 호박과 된장을 섞어 만든 넙치찜처럼 한식 조리 방법과 양식 재료를 기발하게 재해석한 요리가 어우러진다. 평범한 메뉴인 감자전도 발효시킨 감자로 전을 부친 뒤 다양한 허브로 장식하고 유자 드레싱을 곁들여 내거나, 회를 참기름 등으로 양념한 배추김치와 김으로 싸서 멕시코 타코처럼 내놓는 식이다. 박 셰프는 "전통 한식이 좋은 재료를 건강하게 활용하는 지혜를 개인적으로 해석해 이 자리에서 조달할 수 있는 최선의 재료로 풀어내는 데 중점을 둔다"며 "미국에서 '서울에서 먹던 한식을 그대로 재현해 보여주겠다' 같은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요리사 스스로 한계선을 긋는 것"이라고 말했다.
요리마다 제공하는 카드 뒷면에는 박 셰프가 해당 요리의 의미를 직접 정리한 짧은 소개를 실었다. 34년간 박 셰프가 직접 먹어온 매끼니가 소재다. 전을 소개하면서 대학 시절 학교 앞에서 먹었던 파전과 막걸리에 대한 기억을 짤막하게 기술하거나, 고등어 요리에 '한국에서는 어머니가 해주는 가장 평범한 반찬 가운데 하나'라는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 식이다. 주방장 본인이 풀어놓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아토믹스만의 독창성과 공감을 자아낸다. 박 대표는 " 카드는 외국인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한국 음식에 대한 정보를 더 풀어내고, 개인적인 옛 경험을 공유하는 데 적합한 장치"라고 말했다.
③글로벌 콜라보 통해 새로운 영감 얻어
카드 한 귀퉁이를 자세히 보면 해당 요리에 쓰이는 그릇을 디자인한 사람 이름이 적혀 있다. 모두 한국의 신진 작가들이다. 이들이 디자인한 그릇은 아토믹스 음식을 소개하는 뉴욕타임스와 미쉐린 가이드 같은 미디어를 타고 전 세계에 알려졌다. 박 셰프를 포함한 주방의 요리사들과 직원들은 한국계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한복 느낌의 유니폼을 입는다. 수저부터 그릇, 복장까지 이어지는 총체적인 이색 문화 체험 뒤에는 아토믹스가 추구하는 상생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미국 요식업계의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음식점들은 금세 콧대가 높아지기 마련이지만, 박 대표와 박 셰프는 다른 요리사들의 협업 요청을 마다하지 않는다. 인기 요리사 두 명이 함께하는 포핸즈(four hands), 세 요리사가 함께하는 식스핸즈(six hands) 같은 행사는 클래식계 거장들의 합주처럼 좀처럼 찾아보기 드문 이벤트다. 그러나 뉴욕에서 벌어지는 협업 리스트에서 아토믹스 이름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한국은 물론 홍콩과 덴마크 주방장들을 포함한 전 세계 요리사들과 수시로 협업 자리를 연다. 일 년에 두세 차례 다니는 해외 음식점 탐방과 협업이 새 메뉴 아이디어를 얻는 영감의 원천이다.
박 셰프는 "메뉴 개발은 꾸준히 하지만, 억지로 요리책을 뒤적이진 않는다"며 "아토믹스의 음식이 독창적인 콘셉트를 가지려면 세계적인 요리사들의 노력과 기술을 옆에서 보는 기회를 최대한 갖고 수차례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