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영화상 신인 감독상 트로피를 손에 들고, 윤가은 감독은 말했다. “영광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생애 한 번 기회가 주어지기에 가장 영광스러운 상이 무섭기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2016년 ‘올해의 데뷔작’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우리들〉만의 이야기를 응원하는 관객들을 위해 장기 상영에 들어갔지만 5만 명이 조금 못 되는 관객만 이 영화를 만났기 때문일까. 영화라는 산업이 남자들의 판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영화 속 이야기마저 남자들이 점령한 지 오래에, ‘여성영화제는 있는데 남성영화제는 왜 없냐’는 남성 네티즌의 질문까지 받아야 하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그 안에서 ‘반짝’하고 빛나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윤가은 감독. 우리들 안의 무서움을 같이 이야기해보기 위해서 오늘도 여성 영화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윤가은 감독을 만났다.
영화감독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한 건 언제부터인가?윤가은: 인문대를 졸업했는데 사실 그때도 영화를 하려고 들어갔던 거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영화를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유언비어를 들어서. (웃음) 영화를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으니까 재능이 없으면 다른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있어서 나에게 준 유예기간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에는 스물아홉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학사 졸업과 한예종 전문사 입학 사이 기간에는 무슨 일을 했나?윤가은: 졸업하고 2년 정도 대학로 연극의 조연출 생활을 했다. 논술학원 선생님도 했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여행도 다녔는데, 사실 한가롭지는 않았다. 마음이 요동치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방황을 많이 했다. 전문사 입학 당시에 전년도에 6개월 과정의 독립 단편영화 제작과정을 들은 게 경력의 전부였다. 학부 영화과의 경우 학생 성비를 보면 보통 여자가 더 많은데, 졸업 후로 이어지면 역전된다. 전문사는 어떤가?윤가은: 내가 알기로도 예술사(학사) 때는 여자 비율이 높다고 들었다. 학사에서 전문사로 넘어올 때 어떤 과정을 지나올 텐데, 거기서 어떤 일들을 겪었을 수도 있고 스스로 포기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고 실질적인 벽에 부딪히기도 하는 것 같다. 내 동기들 같은 경우 연출 전공은 20명 중 여자가 6명이었다. 그게 많은 편이라고 했다. 그 정도면 외롭지 않다고 느낀 숫자였던 것 같다.
여성 감독이라서더 계속 질문을 던지고여러 가치와 싸우게 된다
2016년이 드물게 여성 감독 영화가 많이 개봉한 해이기도 했다. 여성 감독들끼리의 대담도 많았고, 만날 기회도 많았던 것으로 아는데 어떤 느낌이 들었나?윤가은: 정말 좋았다. 영화제나 영화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면 힘이 됐다. 한 영화지에서 나눈 대담 때, 여성 감독으로서 이야기한 게 처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여성 감독들과는 본질적으로 동지의식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나보다 앞서서 이 시스템을 경험하신 분들이니까 그런 면에서의 믿음도 있었다. “다음 영화를 어떻게 할까요?” 같은 질문도 좀 더 편하게 물어볼 수 있었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태도로 작업을 해나가는지도, 같은 여성이라 묻는 게 수월했다. 여성 감독으로 영화를 만들고 투자를 받고 개봉을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염려가 되는 상황들이 있었을 것 같다.윤가은: 복합적이다. 나 같은 경우는 단편부터도 계속 여자아이들 이야기를 해왔다. 〈우리들〉 찍기 전에도 여자아이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장편도 계속 여자아이들 이야기를 할 거냐”라는 질문이 들어오는 거다. 아이들인데, 심지어 여자인 거지. 이게 상업적으로 소화가 안 된다는 조언을 여러 번 받았다. 이게 꼭 여고생 이야기여야 해? 회사 이야기여도 되잖아. 여자여야 해? 남자여도 되잖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늘 내가 ‘여자’ 감독이라서인지, 그냥 나라는 사람이 부족해서인지 헷갈리는 거다. 이중으로 질문하게 되는 거네.윤가은: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이다. “여자 감독인데 감정적이고 섬세한 이야기를 하는 게 도움이 돼?” 지금까지 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로 장편을 찍을 수 있는 감독임을 어필하라는 거지. 나는 내가 가진 특징이 여성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네가 여자니까 여성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프레임을 씌우고 나를 보고, 거기 매몰되어있다고 말하는 거다.나는 남자 캐릭터들이 떼로 나오는 영화에 피로감이 있고,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시장에서 요구한다고 하면서 “다른 걸 원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라는 말을 못 하게 해버리니까 답답한 것도 있었다. 여자 감독이 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아무렇지 않게 일단 ‘여자 감수성’ 이렇게 생각해버리는 건데, 다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하더라. 늘 그걸 이해시켜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현장에서는 어땠나?윤가은: 〈우리들〉 같은 경우는 성비가 반반이었다. 억지로 그걸 지키려고 하지는 않았고 계속 함께 작업해왔던 스태프들이다. 여자아이들이 나오고, 배우들의 어머님들도 오시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여자가 많은 환경이었다. 그런데도 현장에서는 강하게 내 의견을 피력해야 하는 상황이 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꼭 ‘내가 여자라서 이런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해야 했다. ‘그 여자 감독은 신경질적이다’ 같은 평가를 너무 많이 들어온 거지. 이상한 일인데 여자 감독이 많지 않으니까 내가 여자 감독들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추가로 하게 되는 거다.그래서 그냥 바로 솔직하게 풀어놓으면 되는 걸 머릿속으로 가능한 한 감정을 빼고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그런데 원래 감정적인 일이라 풀려고 하는 거니까, 의미 없는 에너지 소모를 추가하게 되는 거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남자 감독들은 이런 고민 안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많다. 소재 면에서도 그런 고민을 하게 될 수 있을 것 같다.윤가은: 그게 시나리오 쓸 때 항상 부딪히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가 만약에 남자 감독이고 큰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데 감정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영화를 찍는다고 한다면, 이게 상업적인 소재인지 아닌지는 고민하겠지만 ‘내가 남자라서 남자영화 만든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은 안 할 것 같다. 나는 늘 ‘내가 여자라서 이렇게 섬세한 영화만 만든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냥 나라는 사람의 성향이 드러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일 뿐인데, 아이러니한 마음이 든다. 복잡한 생각 안 하고 이야기에만 집중하기도 힘든데, 계속 질문을 던지고 여러 가치와 싸우게 된다. 두 번째 영화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윤가은: 작년에 감독들을 만날 기회만 있으면 두 번째 영화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질문했는데 하나같이 빨리 만들라고 하더라. 첫 영화는 독립영화에 학교와 연계되어있었고, 자전적인 면이 있었으니까 그 이야기를 빨리 털어내야 다음으로 갈 수 있다고. 청룡영화제 신인상 탔을 때 변영주 감독님이 문자로 ‘축하해 너 이제 7년 논다’ 이렇게 보내셨는데. (웃음) 이경미 감독님처럼 7년 만에 〈비밀은 없다〉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을 것 같다. 지금 쓰고 있는 초고는 여자아이들이 주인공이기는 한데 〈우리들〉과는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삶의 주인공이 되는 멋진 여자아이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