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아이폰의 한국 발매가 국내 IT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처럼 2005년 국내 1호 매장을 낸 유니클로는 한국 패션 시장을 완전히 재편했다. 스마트폰이 IT 부흥을 이끌었듯, 유니클로는 빠른 제품 순환 주기와 대중성으로 IMF 이후 불황과 침체 늪을 헤매던 패션 업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2005년만 하더라도 패션 업계에서 단일 브랜드 하나로 연매출 1조원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상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여겨졌는데, 해방 이후 60년간 넘지 못했던 이 기록을 유니클로는 한국 상륙 10년 만에 보란 듯이 넘어섰다.
이후 2008년 자라와 2010년 H&M이 잇따라 한국 시장에 뛰어들면서 한국은 글로벌 패스트패션(SPA) 브랜드의 전쟁터가 됐다. 해외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이 안방에서 승승장구하자 국내 패션 공룡들은 4~5년이 지난 후에야 뒤늦은 반격에 나섰다. 2009년 이랜드가 출시한 스파오, 2012년 선보인 신성통상의 탑텐과 삼성물산 패션 부문(제일모직)의 에잇세컨즈 등이 대표적인 한국형 패스트패션 브랜드다.
하지만 국내 매출이나 매장 수는 물론 해외 진출 현황 등을 따져보면 해외 SPA 브랜드에 경쟁력이 많이 뒤처진 상황이다. '한국 SPA 브랜드 빅3(스파오·탑텐·에잇세컨즈)'의 지난해 매출 합산액은 국내외를 합쳐 약 7100억원 수준. 같은 기간 유니클로는 국내에서만 이 빅3의 2배에 가까운 1조3732억원을 팔았다. 해외시장까지 놓고 견줘보면 비교가 무색하다. 자라(인디텍스)·H&M·유니클로의 해외 매장을 합치면 1만4000곳을 웃돌지만, 한국 SPA 브랜드 3사의 해외 매장은 총 30곳에도 못 미친다.
대기업 주도… 신속한 의사 결정 안 돼
패션 업계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세계적 패스트패션 브랜드가 나오지 못한 원인으로 브랜드 정체성 부재를 꼽는다.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사업 속성상 글로벌화가 필수적이다. 수만 장 단위로 원단을 주문해 원가를 낮추고, 디자이너 수천 명이 한 사람당 매주 수십 가지씩 디자인을 뽑아내야만 박리다매로 이윤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소비자가 '이 브랜드에 가면 내 옷이 있다'고 느낄 만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뚜렷한 색깔을 지녀야 한다. 국내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아직 유니클로의 히트텍(발열 내의)과 같은 글로벌 히트 상품을 내놓거나, H&M이 보여준 디자이너 협업과 같은 독특한 프로젝트로 반향을 일으키는 데 실패했다.
브랜드 이미지가 불분명하니 히트 상품이 나타나지 않고, 이 때문에 악성 재고가 생기는 것도 문제다.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판매 현장에서 얻은 다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소비자 반응을 예측해 생산량·배송물량·판매가·할인방법 등을 결정한다. 매장에서 팔릴 만큼만 생산·배송하는 마케팅 전략은 소비자에게 '지금 사지 않으면 다시 살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데 에잇세컨즈를 포함한 국내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재고 상품 할인전을 따로 열 정도로 상품 수요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디자이너 1만8000여 명이 활동한다는 동대문 생태계가 존재하지만, 이 역량을 부가가치가 높은 글로벌 패션 분야로 확장하지 못한 것도 고전 원인으로 지목된다. 글로벌 패스트패션을 위한 거대한 소싱 단지가 이미 구성돼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창업 초기 제품을 만들어 줄 공장을 전전해야 했던 자라와 H&M에 비하면 국내 브랜드들은 사정은 나은 편이지만, 대기업 특유의 경직된 조직 구조와 느린 의사 결정 과정이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 관계자는 "패스트패션이 성공하려면 기업 차원에서 개인 디자이너와 소규모 디자이너 팀을 규합해 '이게 뜬다' 싶은 상품을 골라내야 하는데, 대기업들이 주도하는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대기업의 기존 브랜드들과 겪을 충돌을 우려해 밀어붙이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