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101번 도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40㎞쯤 달리면 1930년대 미 해군 비행선 격납고로 사용된 '행어 원(Hangar One)'이라는 건물이 보인다. 행어 원이 자리 잡은 모펫필드 비행장에는 미 항공우주국(NASA) 에임스 연구센터와 대학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그중 독특한 이름의 대학이 있는데 바로 '싱귤래리티(Singularity·기술적 특이점) 대학'이다. 싱귤래리티대학은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지능 수준을 넘어서는 시점인 특이점 이론에 기반을 두고 설립됐다. AI, 사물인터넷, 로봇, 가상현실 등 기업 혁신에 필요한 인류의 미래 기술을 교육하고 창업(創業)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지난 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모펫필드에 위치한 싱귤래리티대학에서 학교 설립자인 피터 디아만디스 X프라이즈 재단 회장이 포천 500대 기업 최고경영자·임원 등을 대상으로 사내 창업과 미래 기술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위 사진). 이날 강의 내용은 수강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인드 매핑(mind mapping)’ 기법을 사용해 그림 형태로도 보여줬다. / 박원익 기자
지난 8일(현지 시각) 오전 싱귤래리티대학 강의실 583C에서는 피터 디아만디스 X프라이즈 재단 회장이 무선 마이크를 차고 강의를 하고 있었다. 수강생들은 강의실 내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를 보면서 그래픽 차트를 확인하고, 태블릿PC·스마트폰 등을 이용해 강의 내용을 꼼꼼히 기록했다. 싱귤래리티대학 수강생들은 일반 대학생이 아니다. 포천 5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임원 등으로 사내 창업을 독려하며, 제2의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싱귤래리티대학의 강사진은 디아만디스 회장을 비롯해 대부분 창업 관련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이다. 이날 강의실에서 만난 니시노 히데아키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 임원은 "수업 시간에 창업과 관련된 아이디어를 얻고자 한다"고 말했다.
강의실 한편에서는 학교 직원이 어른 키만 한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수강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인드 매핑(Mind Mapping·지도를 그리는 것처럼 이미지로 내용을 요약) 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디아만디스 회장은 "현재 인터넷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람은 30억명인데, 앞으로 7년 안에 50억명이 추가로 연결될 것"이라며 "50억명의 새로운 소비자에게 물건을 판다고 생각해보라. 소름 돋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들이 저성장 시대에 새로운 먹거리를 찾기 위해 '사내 창업' 활성화에 나서고 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술을 가진 사내기업가(Intrapreneur)를 양성해 기업 내부의 혁신을 자극하겠다는 전략이다. 사내 창업은 기업의 핵심 역량인 직원 이탈을 막고, 신사업 발굴과 기술 확보 등 긍정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구글, 사내 창업으로 신사업 발굴
증강현실(AR) 게임 '포켓몬 고'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게임회사 나이앤틱은 2010년 구글의 사내 벤처기업으로 출발했다. 존 행키 나이앤틱 CEO는 구글에서 지도 관련 사업을 담당했는데, 경험을 살려 위치기반서비스(LBS)와 데이터를 접목한 게임 개발에 나섰다. 나이앤틱은 2012년 출시한 인그레스라는 게임으로 2년 만에 사용자 1400만명을 확보했고, 독자 사업 진행을 위해 2015년 구글에서 독립했다. 나이앤틱은 2016년 일본의 유명 게임 회사 닌텐도와 손잡고 포켓몬 고를 구글플레이·애플 앱스토어에 출시했다. 5억건 이상의 다운로드 건수를 기록한 포켓몬 고가 구글플레이에서 인기를 끌자 구글은 상당한 콘텐츠 수익을 가져갈 수 있었다.
구글은 임직원의 사내 창업과 연구를 장려한다. 구글 직원이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일에 근무 시간의 20%를 투입하는 '20% 타임제'를 운영해 이메일 서비스 '지메일', 광고 프로그램 '애드센스'와 같은 핵심 서비스를 이 '업무 외 시간'에서 창조해냈다. 구글은 지난해 '에어리어 120'이라는 사내 창업 지원 프로그램도 발표했다. 구글 직원이 일단 사업 계획을 제안하면 회사 내 업무 시간에도 이 계획의 사업화 작업을 할 수 있다.
소니는 사내 신사업 육성제도인 '시드 액셀러레이션 프로그램(Seed Acceleration Program)'을 실시하고 있다.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구현할 수 있게 돕는 스타트업(신생 벤처) 육성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전자종이 기술을 활용한 신개념 시계 'FES 워치'를 개발했다. FES 워치는 시계 버튼을 조작하면 화면과 시곗줄의 디자인이 바뀐다.
오라클, 사내 스타트업 통해 신기술 조달
미국 소프트웨어 회사 오라클은 지난달 북미 조직 내에 가상현실, AI를 포함한 신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직원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지원하고 경쟁사보다 앞선 내부 혁신 역량을 축적하겠다는 포석이다. 오라클은 "사내 스타트업의 임무는 고객이 요구하는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분석, 모바일 컴퓨팅, 사이버보안, 사물인터넷 관련 최신 솔루션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라클의 공동 CEO인 마크 허드와 사프라 카츠는 마이크로소프트, 세일즈포스와 같은 경쟁 기업에 맞서기 위해 클라우드 컴퓨팅 사업을 공격적으로 키우고 있다.
영국 은행 바클레이즈는 액셀러레이터(창업 육성 기업)와 협력해 핀테크 분야 스타트업을 육성하고 있다.
니보(Nivo)는 보안용 모바일 메시징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데, 바클레이즈에서 분사한 회사다. 마이클 하트(Harte) 바클레이즈그룹 이노베이션 총괄은 "금융 서비스는 파괴적 혁신기를 경험하고 있다"면서 "사내 혁신을 통해 새로운 상품·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아모레도 사내 벤처 육성 나서
국내 대기업들도 직원들의 창의성 확산과 사업 동기부여를 위해 사내 창업을 독려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C랩(Creative Lab)'이라는 스핀오프(분사) 제도를 운영해 우수 사업 과제를 지원한다. 2015년 9개, 2016년 11개 등 지금까지 25개의 C랩 출신 스타트업이 탄생했다. 올해 삼성전자의 지원을 받는 과제는 스마트 아기 띠, 유아용 스마트 칫솔, 피부 상태를 분석해 맞춤형 화장품을 추천하는 솔루션 등 5개다.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삼성전자의 C랩 같은 대기업 사내 벤처가 글로벌 중견 기업을 키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통로이며, 우리 경제의 활력소이자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모레퍼시픽도 지난해 사내 벤처 육성 프로그램 '린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의 제안으로 시작된 프로그램을 통해 마스크팩, 선케어 브랜드 등의 사업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 회사가 자금을 대고 별도 사무공간에서 일할 수 있게 배려했다. 회의·출퇴근 등에 구애받지 않고 주어진 과제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전창록 IGM 세계경영연구원 교수는 "한국에서는 기업가 정신 부족, 창업 생태계의 한계,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로 미국의 페이스북·아마존, 중국의 알리바바·텐센트 같은 세계적 스타트업이 나오지 않고 있다"면서 "대기업들이 사내 창업으로 실력 있는 스타트업을 만들어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가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