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비즈

기업 범죄는 개인보단 잘못된 관행의 문제, 기업의 탐욕 감시할 법·제도 개혁이 관건

People 더럼(미국)=남민우 기자
입력 2016.10.01 03:06

[Cover Story]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엔론 사태' 특별 수사팀 선임 검사 새뮤얼 뷰엘 듀크대 로스쿨 기업범죄 담당 교수

미국이 9·11 테러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2001년 말, 앨런 그린스펀(Greenspan)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매출액 기준으로 미국 7위 대기업인 엔론(Enron)의 켄 레이(Lay) 회장이었다. "엔론이 무너지면 미국 금융시장도 위기에 처할 겁니다." 엔론이 대규모 분식 회계 의혹을 받고 있던 미묘한 시점에 걸려온 전화였지만 그린스펀 의장은 곧바로 수화기를 내릴 수 없었다. 레이 회장이 조지 부시 대통령과 친분이 두텁다는 사실은 워싱턴의 유력 인사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린스펀 의장은 아무런 대꾸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수십분 동안 계속된 통화에서 레이 회장은 "구제 금융에 나서달라"고 노골적으로 요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엔론의 다급한 사정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속사정을 조금만 들어봐도 그린스펀 의장은 레이 회장이 전화를 걸었던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그린스펀 의장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털어놓은 내용이다. 그린스펀 의장은 이 전화를 받기 한 달 전쯤인 2001년 11월 엔론에서 '성공한 공직자상(賞)'을 받았다는 이유로 엔론 회계 부정 사건 수사가 시작되자 검찰 조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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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문을 연 에너지 기업 엔론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8년부터 2000년 사이 시가총액이 5배나 늘었고, 미국 서부 에너지 시장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기세등등했다. 1990년대 초반 100억달러였던 연간 매출 규모는 2000년대 들어서 1000억달러로 9배 커졌다. 엔론 경영진은 인도, 중국 등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발전소를 세웠다. '가장 혁신적인 미국 기업'(포천), '최고의 에너지 기업'(파이낸셜타임스) 등 엔론에 붙는 수식어도 화려했다. 2001년 발생한 엔론의 분식 회계 사건은 그래서 더 극적이었고,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왔다. 분식 회계 규모가 임계점을 넘어선 것을 느낀 엔론은 그해 10월 말 4년 만에 6억1800만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기록했다는 내용을 담은 수정 재무제표를 발표했다. 이때가 엔론의 결정적인 변곡점이었다. 한때 90달러에 육박했던 주가는 1달러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엔론은 한 달 뒤인 12월 2일 돌연 파산보호 신청을 냈다. 대다수 직원은 파산보호 신청 당일에도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됐다. 그러나 분식 회계 설계자였던 제프 스킬링(Skilling) 최고경영자(CEO)는 넉 달 전 보유 주식을 팔아치우고 유유히 회사를 떠난 뒤였다.

엔론 스캔들은 미국 기업사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9·11 테러의 상흔이 가시지 않았던 미국을 또다시 충격에 빠뜨린 것은 물론, 남다른 전략과 가파른 성장으로 존경받던 기업이 대규모 회계 부정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엔론에 이어 월드콤 등 다른 대기업들의 회계 부정도 고구마 줄기처럼 드러나면서 미국 여론의 분노가 들끓었다. 규제 강화를 머뭇거리던 미국 정부와 의회는 사베인스-옥슬리법(Sarbanes-Oxley Act)이라는 엄격한 기업회계법을 만들었다.

새뮤얼 뷰엘 듀크대 로스쿨 교수. / 듀크대 제공
엔론 사건이 터진 지 15년이 흐른 지금 미국은 당시 상황을 어떻게 기억할까. 당시 미국 법무부 엔론 특별수사팀의 선임검사(lead prosecutor)였던 새뮤얼 뷰엘(Samuel Buell·52) 듀크대 로스쿨 교수는 "엔론 사태로 미국 기업의 회계 시스템에 큰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모두가 깨닫게 됐고, 정부나 의회는 '제2의 엔론'을 막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며 "그러나 성난 여론을 급히 잠재우려 엔론과 비슷한 수법의 분식 회계를 막는 데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고 회계 부정을 폭넓게 규제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밝혔다.

당시 뷰엘 교수는 미국 정부를 대표해 엔론의 CEO 스킬링과 엔론의 회계감사를 맡은 회사 아서앤더슨을 법정에 세웠다. 법원은 2006년 스킬링 CEO에게 징역 24년 4개월 중형을 선고했고, 아서앤더슨은 증거인멸죄로 형사 기소돼 공중 분해됐다. 뷰엘 교수는 엔론 특별수사팀을 끝으로 공직을 떠나 학계로 진출해 기업 범죄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9월 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의 듀크대 로스쿨을 찾아 뷰엘 교수를 만났다. 그는 부드러운 인상에 캐주얼 차림으로 나타나, 한때 나라를 뒤흔든 대형 사건을 수사했던 날카로운 검사의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자 날카로운 눈빛으로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가며 답했다.

―엔론 사태가 발생한 지 15년이 지났는데, 기업의 회계 부정은 사라졌나.

"엔론 경영진이 이익을 챙기기 위해 주가와 회계장부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여론은 들끓었다. 경영진을 처벌하고, 기업 회계 부정을 막아야 한다는 요구가 거셌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머리를 맞대어 사베인스-옥슬리법을 만들었다. 내부 회계 관리를 강화한 이 법은 대규모 회계 부정을 막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금융 위기가 왔을 땐 제 역할을 못했다. 리먼 브러더스는 2008년 파산 직전까지 엔론과 빼닮은 수법으로 어마어마한 빚을 지면서도 이를 교묘히 숨겼다. 엔론 사태는 한 기업의 잘못된 탐욕이 경제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경고한 사건이었지만, 정부나 의회 모두 시야를 앞으로 돌리지 못한 채 제대로 된 예방책을 만들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제프 스킬링(왼쪽) 전 엔론 CEO와 리처드 풀드 전 리먼브러더스CEO. 엔론과 리먼브러더스는 대규모 회계 부정으로 미국 경제에 큰 충격을 줬다. / 블룸버그
2008년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은 글로벌 금융 위기의 시발점이었다. 리먼브러더스도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상품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이 났다. 여기까지는 다른 금융회사와 같았다. 하지만 다른 금융회사들이 2007년부터 서브프라임 모기지 상품 투자를 줄일 때 리먼브러더스는 오히려 투자를 확대, 손실이 커졌다. 이때 리먼브러더스 경영진은 빚을 줄이려는 노력 대신 엔론처럼 분식회계로 은폐하는 방법을 택했다. 분식회계 규모는 총 1조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리먼브러더스 파산이 금융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준 것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투자 실패에 회계 부정까지 결합돼 한꺼번에 폭발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리먼브러더스는 복잡한 재무 기법과 회계 규정의 허점을 악용해 반복적으로 부채를 숨겼는데, 이는 엔론의 수법과 빼닮았다고 뷰엘 교수는 분석했다.

―리먼브러더스 파산도 엔론처럼 회계 부정이 문제였다는 것인가.

“그렇다. 리먼브러더스의 분식회계 수법은 2010년 3월 미국 파산 법원에 제출된 2000쪽 분량의 보고서를 통해 전말이 드러났다. 리먼은 일명 ‘레포105’라고 알려진 분식회계 기법을 사용했다. ‘레포 105’란, 장부상 부채 비율을 줄이기 위해 레포(환매조건부채권) 거래를 통해 제공한 자산을 매각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105달러짜리 채권을 담보로 100달러의 돈을 빌린다고 하여 105라는 숫자가 붙었다. 리먼브러더스는 이 같은 수법으로 엄청난 돈을 빌리면서도, 수천억달러의 부채를 은폐했다. 이는 리먼의 재무제표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하기 어려웠던 주요 원인이었다. 엔론도 마찬가지였다. 엔론이 파산 신청을 내기 직전까지 장부상으로는 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던 이유는 천문학적인 부채를 수익으로 포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엔론은 선불선물계약(pre-paid forward)이라 불리는 파생 상품을 담보로 빌린 돈을 회계 장부엔 수익으로 적을 수 있었다. 두 회사 모두 어마어마한 돈을 빌리면서도 한 푼도 부채라고 장부에 기록하지 않았다. 리먼브러더스도 엔론처럼 재무제표를 조작하다 손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늘어나 한순간에 무너졌다. 문제는 엔론과 달리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은 전 세계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줬다는 것이다.”

―엔론 사태 이후 회계 부정을 막으려 엄격한 법을 제정했는데, 왜 같은 문제가 반복됐나.

“사베인스-옥슬리법은 기업 내부 감사위원회가 최종 재무제표뿐만 아니라 재무제표를 작성하는 과정까지 꼼꼼히 살피도록 했다. 기업 경영진이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시치미 떼는 것을 막기 위해 최종 회계보고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또 회계감독위원회(PCAOB)라는 기구를 신설해 외부 감사인의 감시 기능도 강화했다. 그 결과 회계 부정을 막는 데는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법 제정 당시 회계 부정 문제를 과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엔론과 리먼브러더스 모두 경영진의 탐욕이 거대 기업 몰락으로 발전하는데 최초 발화점은 기업 금융(corporate finance) 분야였다. 두 회사 모두 부채 비율을 높이지 않으면서 수십억달러의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엔론 사태 직후 정부와 의회는 ‘제2의 엔론’을 막으려는 데만 집중해 무수한 규제를 만들면서도 기업이 돈을 쉽게 빌리는 행위에 제동을 거는 데는 실패했다. 큰 그림에서 보면 정부와 의회 모두 금융 안정이라는 더 큰 의제에는 다가가지 못한 것이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사전에 이런 문제를 파악하지 못했나.

“아수라장의 한복판에서 사태의 핵심을 꿰뚫기란 쉽지 않다. 정부나 의회 모두 시야를 앞으로 돌리지 못한 채 과거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문제였다. 물론 처벌 규정을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고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무작정 규제만 늘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새로운 규제를 만들다 보면 으레 ‘산업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항의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런 공격에 맞서다 보니 어떤 허점이 부정을 부추겼는지, 어떻게 하면 다른 형태의 위기를 막을 수 있을지 등의 사회적인 고민은 부족했다고 본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지고 나서야 금융 안정을 목표로 한 도드-프랭크법(Dodd-Frank Act)이 만들어졌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일반 대중은 골치 아픈 법이나 규제보다는 ‘누구를 감옥에 보내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곤 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정부와 의회가 여론에 휩쓸려 규제법을 폭넓고 심도 있게 논의할 여력이 부족했다.”

―엔론을 수사할 당시 검찰에 대한 일반 국민의 기대는 무엇이었나.

“정치권에선 ‘검사들이 제대로 일을 하게 하라’고 말했다. 우리 팀은 각계각층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그 결과 엔론은 물론 아델피아(Adelphia), 월드콤(Worldcom), 헬스사운드(Health Sound) 등 회계 부정을 저지른 많은 기업의 임원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뿐 아니라 부시의 핵심 참모였던 칼 로브, 딕 체니 부통령, 톰 딜레이 하원 원내대표, 돈 니클스 의원 등 당시 실세들을 샅샅이 조사했다. 엔론 사태가 부시 정부가 연루된 사건인지 논란이 많았으나 정권이 엔론을 비호했다는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사실 검찰의 엔론 수사는 부시 정부에게는 해독 주사와 같았다. 검찰 조사는 기업과 백악관을 향한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는 역할을 했다. 오죽했으면 우리 팀을 두고 ‘부시 대통령 재선 위원회’라고 했겠는가. 실제로는 수사팀 대다수가 민주당원이었는데도 말이다.”

―수사 과정에선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엔론 사건 전에 뉴욕 갱단, 보스턴 갱단 등 수많은 흉악범을 법정에 세워봤지만, 엔론 사건은 달랐다. 기업 범죄 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최고 경영진의 증언이라는 것을 새롭게 느꼈다. 기업 경영진은 서류에 자신의 행적을 남기지 않는다. 이메일도 거의 안 쓰고 대부분 전화로 업무 지시를 내린다. 엔론은 앤디 패스타우(Fastow) 최고재무관리자(CFO)의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직원을 조사하다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몇몇 직원들이 CFO가 지휘하는 사업의 수상한 점을 실토했다. 패스타우에게 이 문제를 집중 추궁하자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고 협조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많은 규제법이 있음에도 기업 범죄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기업 범죄는 대부분 법의 허점을 찾아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한국에선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 사건을 엔론 사태와 비교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대우조선해양에는 다른 회사보다 나쁜 임직원이 많아서 분식회계 의혹이 불거졌다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그 회사 직원이나 다른 회사 직원이나 윤리 의식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 직원은 자신이 범죄에 가담한 사실도 모른 채 업무 지시를 따른다. 결국 회사를 둘러싼 규제 환경과 관행적인 기업 운영 방식 속에서 문제가 쌓여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징역형과 같은 강력한 형사 처벌이 경영인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기업(조직)의 행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기업을 둘러싼 전반적인 법제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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