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짓는 것보다 낫다
어정쩡한 컬렉션으론 운영에 어려움만 겪을 뿐
미술관 건립보다 후원을
김상훈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서울 서촌에 자리 잡은 대림미술관은 언제나 젊은 관객으로 북적인다. 사진, 디자인, 패션 등 신세대 취향에 맞춘 전시를 매번 기획한 덕분에 관람객의 93%가 20~30대라고 한다. 대림미술관은 작품들을 촬영하는 것도 허용하며 인증샷을 남길 경우 무료 재입장이 가능하다. 대림그룹은 얼마 전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지역에 또 하나의 미술관을 개관했다.
많은 기업이 미술관 건립을 통해 미술을 후원해 왔다. 소장하고 있는 미술 작품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거나 기획 전시를 통해 교육과 감상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 사립 미술관의 설립 취지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마케팅 효과가 큰 예술 후원 활동인 '아트 스폰서십(art sponsorship)'이 인기를 얻고 있다. 아트 스폰서십이란 특정 전시회나 아트 페어, 비엔날레, 혹은 기존 미술관을 후원하는 것을 말한다. 미술을 후원하는 기업이 많아진 이유는 간단하다. 미술을 사랑하는 고객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에 다소 편중되었던 국내 기업의 예술 후원이 미술 쪽으로 옮겨 가고 있는 양상이다.
스위스 금융 기업인 UBS는 아트 바젤과 구겐하임미술관을 후원하고 있는데 아트 스폰서십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 특히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의 작가들을 후원하고 작품을 구입하는 '구겐하임 UBS 맵 프로젝트'는 UBS 국제화 전략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UBS자산운용의 유르겐 젤트너 최고경영자(CEO)는 해당 프로그램이 해당 지역에서의 UBS 브랜드 가치를 상승시킨 것은 물론이고 각 지역 유력 인사들, 특히 부유층 고객과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말한다.
국내 기업 중에서는 현대자동차의 아트 스폰서십 활동이 독보적이다. 현대자동차는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을 10년 동안 후원하는 파트너십을 맺었고, 이듬해에는 영국 최고의 현대미술관인 테이트 모던, 작년에는 미국 LA 카운티미술관과 장기 후원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미술관을 새로 짓기보다는 번듯한 미술관을 후원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테이트 모던의 초대형 전시실인 터바인홀에서 전시되는 '현대 커미션' 프로젝트의 후원이나 LA 카운티미술관의 '아트+테크놀로지' 전시는 현대자동차의 혁신적 이미지와 브랜드의 품격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세계 최대 아트페어인 스위스 '아트바젤'.
이 외에도 독일의 도이치방크는 프리즈 아트 페어를 후원하고 있다. 폴크스바겐도 뉴욕 현대미술관(MoMA), 독일 내셔널갤러리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으며 상하이 유즈(Yuz) 미술관과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의 전시를 후원하고 있다.
아트 스폰서십은 첫째, 미술관을 짓는 것보다 비용 측면에서 훨씬 효율적이다. 어정쩡한 컬렉션으로 시작한 미술관들 중 상당수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나. 둘째, 아트 스폰서십은 브랜드의 품격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미술 애호가들이 세계 최고의 아트 페어인 아트 바젤을 떠올릴 때 UBS의 선명한 로고를 함께 연상하게 되는 것만 보더라도 미술 후원의 마케팅 효과는 은근하고 장기적이다. 아트 스폰서십의 기업 이미지 상승 효과는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올 초에는 영국에서 석유회사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의 테이트 모던 후원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자들은 환경을 오염하는 BP가 미술관을 후원하면 기업 이미지가 좋아진다며, 이를 반대했다. 생활용품 회사인 유니레버는 테이트 모던에서 매년 1명의 컨템퍼러리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전시인 '유니레버 시리즈'를 후원한 후 반응이 좋아 브랜드 이미지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애초 5년의 계약을 연장하기도 했다.
(사진 왼쪽부터)서울 대림미술관·뉴욕 현대미술관(MOMA)
셋째, 아트 스폰서십은 수퍼 리치 고객을 위한 마케팅에 최적이다. 이것이 도이치방크와 같은 금융 기업들이 유독 아트 스폰서십에 적극적인 이유다. 상류층 고객에게 집중하는 전략을 펼치는 독일 기업 몽블랑과 BMW,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 토즈(Tod's), 루이비통 등이 끊임없이 각종 미술 전시를 후원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트 스폰서십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고품격 고객의 예술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문화예술의 저변을 확대하는 의미 있는 투자다. 좀 더 많은 국내 기업이 미술관 건립보다 양질의 미술 전시와 미술관 후원에 적극 나서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