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갈라파고스 신드롬' 혁신한 라인 성공신화… 상황따라 골키퍼가 골 넣을 수 있는 '축구型 경영'의 힘
Analysis도쿄=이혜운 기자
입력 2016.07.02 03:11
모리카와 아키라 '심플을 생각한다' 저자
경영은 심플한 것… 최고 인재 뽑아 전권 주고 회사 성장하게 하면 돼
나쓰노 다케시(夏野剛) 일본 게이오대 교수는 지난 2007년 일본 경제가 '갈라파고스 신드롬'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보통신(IT) 기업들이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갖고도 고립된 시스템 때문에 외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세계화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전 세계 230개국, 2억명이 사용하는 모바일 메신저 '라인'은 일본 경제의 이례적인 성공 사례다. 사업 자금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흘러왔다는 것도 특이하다.
모리카와 아키라(森川亮·49) 라인 전(前) 최고경영자(CE0·현 라인 고문 겸 C채널 대표)는 2003년 라인 전신인 한게임 재팬으로 입사해 2007~2015년 한게임 재팬·라인 CEO를 지내며 라인의 성공을 이끈 인물이다. 그가 지난해 3월 CEO에서 물러난 후 당시의 경험을 담아 '심플을 생각한다'를 출간해 일본에서 반향을 얻었다.
모리카와는 라인만큼이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쓰쿠바대를 졸업한 후 모두가 부러워하는 기업 '니혼TV'에 취직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10년 만에 퇴직하고 소니에 입사했다. 하지만 소니에서도 기업 문화에 실망해 직원이 30명에 불과했던 한게임 재팬으로 이직했다.
모리카와는 일본에서 '혁신적인 기업인'으로 꼽힌다. 라인 CEO 재직 당시 기업 내 연공서열을 없애는 등 일본 기업의 관습에 칼을 댔다.
지난달 8일 일본 도쿄 C채널 본사에서 만나 그가 경험한 비교적 젊은 한국기업의 문화와 일본 기업문화, 기업들의 강점과 약점을 물었다. 반골 기질이 있다곤 하지만 편안한 인상이었다.
―이력이 특이합니다.
"일본인들은 안정된 삶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늘 변화가 큰 쪽을 선택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입사 초기부터 꿈이 좌절됐기 때문입니다. 전 음악을 좋아해 음악 방송을 만들려고 니혼TV에 취직했는데, 회사는 절 컴퓨터 시스템실로 발령냈습니다. 처음엔 '이왕 맡은 것이니 잘해보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인터넷과 TV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목표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 꿈마저 좌절돼 소니로 옮기게 됐습니다."
―하지만 소니에서도 3년 만에 나오셨습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당시 소니는 직원들이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자유롭게 하도록 놔두는 분위기였습니다. 워크맨도 그런 분위기에서 탄생했습니다. 전 음악·영화 등의 콘텐츠를 인터넷을 사용해 TV로 연결하는 사내 벤처를 만들었고, 이 회사는 얼마 안 돼 수백억원의 연매출을 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본사는 퇴직을 앞둔 사람들을 내려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더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한게임 재팬으로 이직했습니다."
―한게임 재팬에서 한국 직원들과 일하게 됐습니다. 벤처 출신 기업이라 한국에서도 대기업적인 관료주의가 덜하고 좀 더 개방적이라고 합니다만 어떤 점이 일본 기업과 다르던가요. 보통은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건 한국인 사장이 한번 내린 결정을 자꾸 번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한번 내린 결정은 끝까지 해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한국인들이 모든 걸 빨리 결정하는 문화도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인들은 항상 결정이 늦다'며 불만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결정을 번복하는 건 더 나은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자신의 의견을 바꾸길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었죠. 빨리 결정하고 시행하는 것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전 CEO가 된 후 이런 한국 기업의 장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CEO로 재직할 때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입니까.
"나이, 직장 경력, 직무에 관계없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연공서열식 호봉제를 없앤 후 성과 중심의 연봉제로 바꿨습니다."
―호봉제를 연봉제로 바꾸는 건 한국 기업들도 직원들의 반발로 못 하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직원들을 설득했나요.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반발하는 직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의 양에 비해 급여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들과의 논의를 거부했고, 그들 대부분은 회사를 나갔습니다. 하지만 남아 있던 (연봉이 높아진) 직원들의 사기는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갈등이 없는 것을 팀워크가 좋다고 착각합니다. 싸움을 하더라도 일을 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시끄러워질까봐 비판을 하지 않으면 결국 곪아서 터져버리게 됩니다. 일본 기업들은 기본적으로 화합을 중시하기 때문에 싸움을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和)의 문화'라고 하죠. 제가 일했던 기업들에서도 회의 때면 아무도 발언하지 않고 높은 사람의 지시에 '네'라고만 답하고 끝냈습니다. 이는 일본인들의 화법과도 연결됩니다. 일본인들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해 에둘러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그런 일본인들의 미묘한 뉘앙스를 이해하지 못해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 직원들에게 '한국인처럼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일본 언론들은 라인 직원 중에 독특한 사람이 많다고 보도하더군요.
"제가 CEO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똑똑하지만 모난 사람들이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 나가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습니다. IT 분야는 1위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어중간한 인재는 필요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고의 인재들을 뽑아 그들에게 전권을 주는 방식으로 경영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캐릭터 스티커 등 각종 히트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전 경영자가 신(神)이 될 수도 없고, 신이 돼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방식을 '축구형 경영'이라고 합니다. 야구처럼 포지션이 명확히 정해진 곳에서는 혁신이 탄생하지 않습니다. 축구처럼 상황에 따라 골키퍼가 골을 넣기도 해야 하는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IT 업계는 변화의 속도가 더 빠르고 고객 연령층도 어립니다. 이제 저도 아저씨인데, 고교생 대상 서비스 디자인에 대해 '빨간색은 좀 아닌 것 같다' 식으로 토를 달아봐야 현장에서는 '못해 먹겠다'는 말만 나오게 됩니다."
―CEO로 재직하시는 동안 회의를 줄이고, 경영 이념 명문화를 없앤 건 이슈였습니다.
"일본에는 '출세하고 싶으면 회의에 많이 참석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회의에서 잘될 것 같은 프로젝트에는 숟가락을 얹고, 안 될 것 같은 프로젝트는 신랄하게 비판해 두각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전 이런 사람들이 회사를 망치는 '악(惡)'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회의를 줄이기 위해 이런 사람들을 찾아 배제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하는 일 없이 회의만 해왔기 때문에, 회의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회사를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경영 이념을 명문화하지 않는 것도 직원들이 형식적인 부분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경영 이념을 명문화해서 외우도록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못 외우면 혼내야 하나요? 그런 형식적인 걸로 비난을 받으면 누구나 넌더리가 납니다. 우수한 사람들일수록 회사를 떠날 확률이 높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라인에 재직하는 동안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가입자 수가 1억명이 넘었을 때입니다."
―라인이 세계 시장에서 성공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인은 세계 진출을 하면서 자국 메신저 기업이 없던 동남아시아, 남미 등을 중심으로 진출했습니다. 다행히 이런 나라에서는 일본 기업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에 쉽게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라인이 한국 기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본 기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시아 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일본 기업들은 소니도 부진하고, 도시바·샤프 등은 중국 기업에 인수됐습니다. 미쓰비시, 닛산 등은 도덕적 해이 논란에 빠졌습니다.
"소니는 기업 확장 과정에서 음악이나 영화 산업에 투자를 많이 했기 때문에, 저작권 사업을 지키려다 혁신에 실패했습니다. 반면, 도시바와 미쓰비시 등은 오래된 기업인 탓에 생각 자체가 낡아 몰락한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일본 기업들은 늙고 변화에 약한 것 같습니다. 중국 기업 관계자들을 만나다 보면 대부분 일본인보다 연령대가 낮고 더 진보적입니다. 일본 기업들은 제품을 만들 때 기술을 가장 중시합니다. 하지만 그 기술을 모두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TV 리모컨만 봐도 수많은 버튼이 있지만, 그걸 다 사용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라인을 출시할 때 무료 전화 기능이나 사진 공유 기능 등을 함께 넣어 출시할 수 있었지만, 이용자들이 메시지 전달 기능에 익숙해진 이후에야 추가로 서비스를 출시했습니다. 일본 기업의 또 다른 문제는 사내에 '자칭 전문가'가 많다는 것입니다. 소니에서 제가 TV와 인터넷을 연결하려고 하자 'TV는 그런 기계가 아니다'며 혁신을 막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경영자는 누구입니까.
"소니의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井深大)와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입니다. 소니가 지금은 어렵긴 해도 항상 혁신적인 것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카피는 머리가 좋으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혁신적인 것은 천재가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