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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나는 학자라면 이단아도 영입" 시카고학파 100년간의 변신

Analysis 이혜운 기자
입력 2016.06.04 03:07

시카고학파 혁신의 역사

"시카고학파는 이론적으로 무너졌다."(브래드 드롱 UC버클리 교수)

"시카고학파는 거시경제학 암흑시대의 산물이다. 굿바이 시카고학파."(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

2008년 미국에서 금융 위기가 발생하자 30년 넘게 미국 경제계를 주도해온 시카고 학파에게로 비난의 화살이 꽂혔다. 시카고학파는 시장의 자율을 중시하고, 규제 완화와 작은 정부를 주장한다. 정부의 개입은 오히려 시장을 왜곡시키기 때문에 극도로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신(新)자유주의의 배경이 됐다. 금융 위기로 경제가 무너지자 밀턴 프리드먼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책임론이 대두됐다. 당시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프리드먼의 이론과 명성은 파산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2013년 유진 파마와 라스 피터 핸슨이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데 이어,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존 리스트가 지목되면서 '시카고학파'가 다시 부활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 외에도 넛지(행동을 유도하는 것)로 유명한 행동경제학의 대가 리처드 탈러, 괴짜 경제학의 스티븐 레빗 등이 차기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거론된다.

시카고대는 1890년 석유 재벌 존 록펠러의 기부금으로 설립됐다. 이 학교의 경제학과는 지난 세기 동안 세계 경제학계의 흐름을 바꾸고, 노벨경제학상을 휩쓸었으며, 1980년대 레이건과 대처 정부가 주도한 경제 개혁의 이론적 뿌리를 제공했다. 최근엔 개발도상국들의 경제정책 이론으로도 뒷받침됐다. 1971년 경제 사상사에 최초로 시카고학파라는 용어가 기록된 이후 가장 긴 기간 그 영향력을 유지했다.

금융 위기 이후 폐족(廢族)으로 평가받던 시카고학파는 어떻게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일까. 시카고학파 진화의 특징은 오래 가는 기업의 경영 비법과 닮았다. 학문적 신세계의 확장(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실증 분석과 이론 체계의 유기적 통합(시장 상황에 맞는 연구 개발) 등의 중심을 지키면서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시도한 것이다.

시카고학파의 진화
다른 DNA를 받아들여 외연 확장

최근 시카고학파를 이끄는 주인공들은 전통 시카고학파의 주류와는 연구 주제가 다소 다르다.

대표적인 인물이 리처드 탈러다. 그는 프리드먼·유진 파마 등으로 유명한 신자유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학자다. 1990년대 시카고학파가 황금시대를 누릴 때, 가장 강력하게 공격한 것도 코넬대에 재직 중이던 탈러였다. 그러나 당시 시카고대의 주류는 그를 기꺼이 동료로 받아들였다.

그를 영입한 시카고대 인사는 "탈러의 영입에는 시카고적인 특징이 묻어난다"며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그의 작업 수준은 매우 높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명문대 출신으로 종신교수직을 받지 못해 떠돌던 존 리스트를 스카우트해 스타로 키운 곳도 시카고대 주류들이다. 김화균 텍사스 A&M대 메이즈 비즈니스 스쿨 교수는 "당시 시카고학파는 존 리스트 교수의 실험경제학 연구를 높게 평가해 종신교수직을 보장했다"며 "연구 성과만 우수하다면 주변 배경과 상관없이 인재를 영입했다"고 말했다.

인도 출신인 아닐 카샵과 이탈리아 출신인 루이지 징갈레스, 지금은 시카고대를 떠난 라구람 라잔 인도중앙은행 총재 등은 경제학의 국제적인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영입한 인물들이다. 199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루카스 교수는 탐나는 학자가 있으면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직접 전화해 스카우트하곤 했다. 미국 내 주류면서 이단아들을 끌어안는 포용력을 보여준 것이다.

라스 스톨은 MIT 출신이지만 모교가 아닌 시카고대를 선택한 이유로 한 외신 인터뷰에서 "시카고대에서 가장 매력을 느낀 부분은 학문적 경계가 확장되는 곳이라는 평판이었다"고 말했다.

이는 설립 초기부터 내려오는 문화다. 시카고학파의 거목인 게리 베커도 당대 최고의 이단아였다. 당시 베커가 관심을 가진 주제는 차별과 범죄, 중독, 가족과 결혼 등이었다. 본인조차 "사회학에 관심이 많아 경제학자로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합리적 기대이론을 통해 케인스학파를 비판하고 정부의 인위적 경제 개입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 루카스 교수도 처음 논문을 낼 때는 괴짜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 로버트 배로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저서를 통해 "노벨상을 받은 루카스의 논문에 대해 당시 '미국경제비평' 편집자는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스톡홀름대 퍼 스트롬버그 교수는 한 외신 인터뷰에서 "시카고학파가 자유 시장주의 등으로 유명하지만 오늘날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며 "시카고대의 열성적인 연구자들을 보면 매우 폭넓은 관점을 가진 광범위한 스펙트럼의 경제학자들이 포진해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개성 강한 사람들을 모았지만 '시카고학파'라는 공동체 의식은 다른 동부 대학들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 이유로 교수와 학생들은 지리적 고립을 거론하기도 한다. 동쪽은 미시간 호수, 주변은 우범지대라는 환경 때문에 대부분이 캠퍼스 내에서 생활하고, 그러다 보니 교내 식당 등에서 만나는 빈도가 높다는 것이다. 남시훈 시카고대 박사는 "다른 학교의 경우 노벨상 수상 교수들을 학생들이 만날 확률이 낮은 반면 시카고대는 교수들을 커피숍이나 식당에만 가도 쉽게 볼 수 있어 평소 궁금한 걸 묻거나 붙잡고 토론하는 걸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인간적' 워크숍서 철저한 내부 검증

미 시카고대 경제학과 건물 베커프리드먼연구소 1층에 있는 ‘시카고 경제학 체험관’. 이곳에서는 시카고 경제학과가 배출한 역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소지품과 노벨 경제학상 메달, 이들 이론에 대한 주요 내용 등을 인터뷰 영상 등을 통해 볼 수 있다./시카고=이혜운 기자
시카고학파를 강하게 만든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로 워크숍 토론 문화가 꼽힌다.

제임스 헤크먼 시카고대 교수가 "지적(知的)으로 발가벗기는 비인간적인 분위기여서 심약한 사람은 맞지 않는다"고 말했을 정도로 격렬한 학문적 토론이 벌어진다. 선임 교수들의 참석률도 다른 대학보다 월등히 높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시카고대 워크숍은 '투우'나 '총잡이들의 결투'와 비슷하다. 하버드대 워크숍이 모두가 조용히 발표에 귀를 기울이는 분위기라면 시카고대에서는 신랄한 비판이 쏟아진다"고 보도했다. 시카고대 워크숍 토론만 통과하면 외부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의 치열한 내부 검증 절차다.

이기석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는 "논문 발표자는 모멸감을 느낄 만큼 철저한 검증을 받았기 때문에 논문의 허점은 사라지고 질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이런 전투적인 워크숍의 전통은 시카고대가 학문에 대한 연구와 그 결과물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왔다고 시카고대 관계자들은 말한다. 19세기 독일 대학의 영향을 받았는데, 연구 결과의 명확한 해답을 얻는데 효과적인 제도라고 평가된다.

스티븐 레빗 교수는 하버드대에서 시카고대로 이직한 이유로 "하버드대에서는 내가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뻔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시카고대로 옮긴 후 미 경제학회가 40세 이하 경제학자에게 주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수상했다.

현실 경제에는 참여, 정치와는 거리

1982년 심각한 불황으로 정치적 공격을 받던 레이건 정부는 경제정책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던 조지 스티글러 시카고대 경제학과 교수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시카고대 교수라면 자신들의 자유시장경제 정책에 대한 대변자가 돼 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였다. 하지만 출입기자단 앞에 선 스티글러는 "레이건 정부의 경제정책은 속임수에 불과하다"며 "그런 실책이 불황을 가져왔다"고 가차 없이 비판했다.

시카고파 경제학자들은 정치와는 거리를 뒀다. 프리드먼은 "연구하는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질병은 '포토맥(Potomac·워싱턴을 흐르는 강) 열병'이라며 학자들이 정치권에 발 담그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벨기에 경제학자인 요한 판 오페르트벨트는 저서 '시카고학파'에서 정부 조직 몸 담은 시카고파 경제학자들도 많지만 이들에게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젊을 때 일했다는 것, 둘째 전쟁 등 특수한 상황이었다는 것, 셋째 정치적 야심보다는 연구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정혁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정치 비개입이라는 특징은 하버드대와는 대조적인데, 시카고학파가 정치라는 수단을 통해 이 세상을 이해하고 돕기보다는 숨겨진 진실에 대한 지평을 넓힘으로써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신념이 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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