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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양적 완화, 경기 회복 목적이라면… 금융기관 넘어 경제 전반에 돈 풀어야

Opinion 성태윤(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입력 2016.04.30 03:06
성태윤(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총선 공약으로 등장했던 '한국판 양적 완화'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판 양적 완화'를 둘러싼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핵심은 장·단기 신용 완화

'양적 완화'라는 생소한 단어를 일상용어로 만든 이는 벤 버냉키 전(前)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다. 버냉키 전 의장은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양적 완화가 화폐를 마구 찍어서 헬리콥터에서 뿌리는 식의 임시방편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양적 완화는 단순히 돈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다. 양적 완화의 핵심은 단기금리를 더 낮출 수 없는 제로 수준까지 낮춘 후, 중앙은행이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장기금리를 낮추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직접 낮출 수 있는 것은 단기금리뿐이지만 양적 완화 정책을 실시하면 장기금리까지 낮추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즉 단기금리와 장기금리를 모두 낮춰 대출자들의 이자 상환 부담을 낮추는 일종의 '신용 완화' 정책인 셈이다. 자산 가격 하락을 막고 소비와 투자를 촉진시켜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 양적 완화의 핵심이다.

성패는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

하지만 양적 완화 시도가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 일본은 양적 완화를 추진했지만 효과가 없어 결국 중단했다. 반면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이 실시한 양적 완화는 효과가 있었다.

미국과 일본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마이클 우드포드(Woodford) 미 컬럼비아대 경제학 교수는 2012년 발표한 논문에서 "채권을 사는 것 자체보다는 채권을 사는 행위로 미래 통화정책에 대한 기대감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채권 매입보다는 채권 매입으로 형성되는 기대감이 양적 완화의 성패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디플레이션을 막고 경기를 회복시킬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을 시장에 심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미국 경기 회복에 크게 기여했던 3차 양적 완화의 경우 연준이 실업률 6.5%와 인플레이션 2.5%를 양적 완화 지속 조건으로 미리 천명한 점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런 정책 지속 조건을 '선제적 안내'라고 한다. 이는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일본 중앙은행이 소극적으로 대응해서 '잃어버린 20년'에 빠졌다고 비판한 것과 연결된다. 크루그먼 교수는 일본 은행이 경기 회복 기대감을 만들지 못해 실패했다고 여러 차례 지적했다.

흥미로운 점은 버냉키 전 의장이 일본 역사에서 힌트를 얻어 과감하고 선제적인 양적 완화 정책을 펼치게 됐다는 것이다. 버냉키 전 의장은 2003년 일본 금융경제학회 강연에서 "1931년(만주사변 발발) 일본의 통화 공급을 크게 늘려 금리를 인하하고 엔화 가치를 떨어트린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대장상(大藏相)의 통화재팽창(reflation) 정책이 일본의 대공황 탈출에 기여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물론 당시 중앙은행의 '선제적 안내' 개념은 정립되지 않았지만 일본은 만주사변 발발 후 전쟁 비용으로 통화 수요가 계속 증가할 것을 예측하고 통화 재팽창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전시 통화 증발(增發)이 마치 선제적 안내처럼 여겨져 양적 완화의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한국판 양적 완화'는 정책 금융에 가까워

'한국판 양적 완화'는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만들 수 있을까. 현재까지 논의된 내용을 보면 한국판 양적 완화는 경기 회복보다는 특정 정책 금융기관에 자금을 공급하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들에 대한 자본 확충으로 가계·기업 부채의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한국판 양적 완화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빈사 상태의 금융기관에 자금을 공급해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은 미국의 1차 양적 완화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디플레이션 탈출과 경기 회복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일 한국은행이 주택금융공사와 산업은행의 채권을 인수해 유동성 공급을 늘리면 시장 금리는 하락 압력을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 1.5%로 설정된 기준 금리를 유지하려면 한은이 다른 쪽에서 다시 유동성을 흡수해야 한다. 그러면 경제 전체로 볼 때 자금 공급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다른 부문의 자금이 주택금융공사와 산업은행으로 재배치되는 결과가 발생한다. 특정 부문에만 신용을 할당(credit rationing)해주는 셈이 되는 것이다.

'한국판 양적 완화'는 '양적 완화'라기보다는 중소기업 대출용으로 한국은행이 저금리 자금을 공급하던 기존의 '금융 중개 지원 대출'이라는 정책금융이 대기업과 주택담보 대출까지 확대된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특정 부분에 자금 지원을 대규모로 지속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평성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 상황에서 경기 회복을 위한 과감하고 지속적인 통화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형성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한국판 양적 완화가 성공하려면 ①추가 금리 인하 이후 ②특정 분야 할당이 아닌 경제 전반에 대규모 유동성을 지속적으로 공급함으로써 ③장기금리를 낮춰 소비와 투자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④디플레이션 저지와 경기 회복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는 적극적인 선제적 안내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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