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적 통화 완화 정책을 계속 쓰다 보면 세계경제가 자연스럽게 위기에서 탈출할 것이라고요? 그렇게 쉽게 생각해선 안 되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의 눈빛은 매서웠다. 세계경제가 혼돈에 빠졌던 2008년 누구보다 가장 공격적으로 통화 완화 정책을 썼던 인물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머빈 킹(King·68) 전 영국중앙은행(이하 영란은행) 총재는 "중앙은행들이 저금리 정책을 펴다 보면 경제가 좋아지리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며 "(위기를 빠져나와 경제를 정상화하는 것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킹 전 총재는 2003년부터 2013년까지 영란은행 총재를 지내며 세계 금융 위기와 경기 침체로부터 영국 경제를 지켜낸 인물이다.
그는 2008년 4월 5.0%이던 영국 기준금리를 11개월 만인 2009년 3월 0.5%까지 가파르게 인하하며 공격적인 통화정책을 펼쳤고,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20%에 해당하는 총 3750억파운드의 대규모 양적 완화 정책을 실시했다.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위기 초기부터 공격적으로 양적 완화 정책을 쓴 덕분에 상대적으로 경기 부양 효과를 볼 수 있었다. 2012년 연 1.2%이던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연 1.2%, 2013년 2.2%, 2014년 2.9%로 개선되고 있는 한편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 성장률은 각각 -0.8%, 0.3%, 0.9%로 회복세가 더디다.
연초 세계 금융시장 불안은 일단 가라앉았지만 저성장과 장기 침체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모든 정책 수단을 써서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요구가 어느 나라에서든 거세다. 재정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견해가 많고, 중앙은행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금리 정책 이외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에서도 '한국형 양적 완화' 등으로 더 적극적인 중앙은행의 역할을 요구하는 아이디어가 등장했다.
퇴임 후 영국 런던정경대(LSE) 교수로 있는 킹 전 총재를 지난 3월 말 만나 앞으로 중앙은행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세계경제 전망에 대해 물었다. 재임 시절 공격적 통화 완화 정책을 썼던 킹 전 총재는 요즘 같은 저성장 시기에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불황이나 위기를 완전히 종식시킬 것이란 환상은 갖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 세계가 '불균형(disequilibrium)'에서 벗어나 '균형(equilibrium)'으로 나아가기 위해 각국의 경제적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무실은 런던정경대 건물 복도의 가장 끝 구석진 곳에 있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작년 12월 기준금리를 올렸는데, 올 들어 다시 미국의 경제 전망이 불확실해졌습니다. 중앙은행들이 썼던 양적 완화 정책이 그다지 효과가 없었단 말도 나옵니다.
"양적 완화 정책이 전혀 효과가 없던 건 아니고 어느 정도 효과를 봤습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구사하는 통화 완화 정책의 효과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건 맞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을 '계속 가팔라지는 언덕을 오르는 사이클리스트'와 같다고 봅니다. 올라가면 갈수록 더 빨리, 더 힘차게 페달을 밟지 않으면 예전 같은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인 상황에서 통화정책의 효과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면 세계 경기가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문제라고 봅니다. 통화정책은 전 세계 경제가 균형으로 나아가기 위한 임시적이고 단기적인 수단일 뿐입니다."
―전 세계가 저성장·저수요를 겪고 있습니다. 균형에 도달한다는 것은 어떤 상황인가요.
"많은 국가가 심각한 경제적 불균형을 겪고 있습니다. 중국은 수출에만 의존하고 있는데 앞으로 내수에 집중해야 합니다. 미국과 영국은 무역 적자인데 다시 순수출국으로 회귀하고 소비를 조금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기본적 경제적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고 균형으로 가기 위해서 각국의 경제 구조를 재편해야 합니다. 구조적 재편 없이는 세계경제가 지속 가능한 성장세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금융 위기 이후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국민의 지갑을 열게 하고 수요를 늘리기 위해 다양한 완화 정책을 내놨습니다. 하지만 각국이 장기적으로 가야 하는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예를 들면 영국은 장기적으로 소비를 늘리는 게 아니라 절약하고 저축해야 합니다. "
―미국이나 영국 같은 국가가 소비를 줄이게 되면 경제성장률에도 타격을 주지 않을까요.
"단기적으론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완화 정책은 임시로 통증을 줄여주는 진통제에 불과합니다. 제대로 된 의사라면 장기적으로 근본적 원인을 찾아내고 치료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지금 금리를 올려야 합니까. 미국 연준이 올해 네 차례까지 금리를 올릴 것으로 예상됐는데, 그 전망도 바뀌고 있습니다. 언제쯤 다시 기준금리를 올릴 것이라고 예상하십니까.
"중앙은행들이 언제 금리를 올릴지는 제가 예측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세계경제에 대한 답은 더 이상 중앙은행에만 달린 것도 아닙니다. 주요 중앙은행들은 지금 '죄수의 딜레마(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한 선택이 결국 자신과 상대방 모두에게 불리한 결과를 유발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어느 한 곳이라도 먼저 금리를 올리기 시작하면 다른 나라들은 경기 둔화를 겪거나, 더 나아가 침체를 경험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러니까 (중앙은행들이) 방법이 없어서 통화를 평가절하하기 시작했죠. 일본은행이 그랬고, 유럽중앙은행이 그랬습니다. 미 연준도 달러화 강세에 대해 걱정하게 될 겁니다. 이렇게 다들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려고 하면 제로섬 게임밖에 안 됩니다."
―죄수의 딜레마를 어떻게 돌파해야 합니까.
"저는 나라마다 각자 어느 부분에서 균형을 찾아갈지에 대해 동의할 수 있는 '일정표'를 함께 짜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은 어느 한 국가의 중앙은행이 혼자서 금리 인상을 한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다른 국가들이 옳은 수단을 도입할 것이란 믿음을 토대로 우리도 옳은 수단을 쓰겠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신뢰 체계가 필요합니다. 미국이라고 해서 다른 나라들의 보조를 맞추지 않고 혼자서 균형을 찾아갈 순 없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경제 구조를 재편할지는 각 국가에 달렸지만, 그 타이밍에 대해선 공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국가 간의 중개인 역할을 국제통화기금(IMF)이 해야 한다고 봅니다."
―왜 IMF입니까.
"오랫동안 각국 중앙은행들은 제 각기 안정적 통화·재정정책을 추구하면 전체적으로 최선의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세계경제가 심각한 불균형에 빠져있을 땐 그런 믿음이 작동하지 않아요. IMF 같은 국제적 관리인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어느 한 국가(미국)만 거부권을 갖는 IMF의 표결 제도를 먼저 개혁해야겠죠. 무엇보다 기준금리를 정상적인 수준으로 복귀시키는 시점에 대해 의견을 맞춰야 할 겁니다."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중앙은행들은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영웅’이 된 듯하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과거 인플레이션을 막는 데 초점을 맞췄지만 이제는 경기를 부양하고 고용을 늘리는 역할까지 떠맡고 있다. 2015년 현재 전 세계 32개국 중앙은행은 ‘물가 안정 목표제(싱글 목표제)’를 채택하고 있고 한국은행도 여기에 속한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물가 안정’과 ‘완전 고용’을 모두 목표(듀얼 목표제)로 삼고 있다. 킹 전 총재는 중앙은행들이 싱글 목표제(물가 안정)를 삼든 듀얼 목표제(물가 안정과 완전 고용)를 채택하든, 시장에 장기적으로 신뢰를 심어주는 정책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중앙은행이 전통적인 물가 안정 기능만 맡을 게 아니라 고용이나 구조조정에까지 개입해야 한다는 논쟁이 있습니다.
“연준처럼 듀얼 목표제를 도입한 곳이나, 싱글 목표제를 채택한 중앙은행들이나 사실상 크게 다를 것은 없습니다. 가계와 기업이 ‘장기적으로 물가가 안정될 것’을 믿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명확하게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같이 불확실성이 높은 시대엔 어제는 좋아 보였던 정책이 내일이면 다른 정책으로 바뀔 수 있으니까요. 연준과 영란은행이 2013~2014년에 겪은 일이 있습니다. 두 은행은 기준금리 인상을 고려할만한 지표가 되는 실업률 수준을 발표했습니다. 2013년에 봤을 때는 ‘실업률이 이 정도면 기준금리를 올려도 되겠다’고 추산했던 것이, 2014년엔 ‘기준금리를 올려도 될 만한 수준이 전혀 아니네’로 바뀌었죠.”
―중앙은행들이 섣불리 숫자를 예측하거나 전망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1991년 처음 영란은행에 합류했을 때 폴 볼커(Volcker·1979~1987년 미 연준 총재)에게 조언 한마디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신비주의(mystique)’라고 말했습니다. 과거엔 그랬다는 겁니다. 요즘에는 가계, 기업, 투자자들에게서 중앙은행이 신뢰를 얻으려면 훨씬 더 투명한 방법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미국 연준이 기준금리 수치와 금리를 올릴지 내릴지를 시장에 공개하기 시작한 건 1994년 2월입니다. 그 전까지 투자자와 연구원들은 시장 금리를 보고 연준이 금리 정책에 변화를 줬는지 여부를 추측해야 했죠.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연준은 모든 통화정책 회의의 의사록을 공개하고 통화정책 결정에 대한 이유까지 덧붙여서 설명해주지요. 이제는 시장과 투자자들이 중앙은행이 공개하는 전망치를 너무 확대해석하거나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미래에 ‘서프라이즈’가 없다는 것을 지금 알아버리면 금리는 전망했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중앙은행 스스로가 낸 전망치가 앞으로 정책 방향과 어긋나는 겁니다. 중앙은행이라고 미래를 내다볼 수는 없습니다.”
킹 전 총재는 유로화 비관론자다. 유로화가 생겨난 이후로 유럽 내 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불균형이 심화했다고 본다. 그는 인터뷰에서 “유럽연합(EU)과 유로화 통화 동맹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며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대해선 즉답을 피했다. 대신 그는 “올해 출간한 책 ‘연금술의 종식(The End of Alchemy·국내 미출간)’에서 유럽이 재정 위기에서 소생할 방법 네 가지를 제안했지만, 그걸 참고하느냐 마느냐는 각국 리더의 몫”이라고 말했다.
―만일 브렉시트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주변국 금융시장 혼란도 커질 텐데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그건 앞으로 서서히 고민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전 세계 경제에는 브렉시트뿐 아니라, 경기 불황 등 훨씬 더 큰 문제가 많습니다. 한국도 다른 문제들에 대비하고 고민해야 하죠.”
―‘뱅크런(예금 인출 사태)’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이 ‘모든 은행의 전당포(PFAS·pawnbroker for all banks)’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생소한 주장으로 들립니다.
“자동차 운전자들이 도로를 주행하기 전에 반드시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것처럼, 은행이 소비자들에게서 예금을 받기 전에 먼저 중앙은행에 보험을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소비자들이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준비금을 두고 있고 중앙은행이 언제든지 예금주들에게 돈을 돌려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믿게 되면 뱅크런을 막을 수 있습니다.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영란은행은 시중은행들에 더 많은 지급 준비금을 쌓도록 했습니다. 위기 직전엔 1%였던 지급준비율이 위기 이후엔 20%까지 올라갔습니다. 현금 지급준비율이 이렇게 많이 올라간 것은 1960~1970년대 이후 처음입니다. 위기가 발생해도 예금자들이 은행에 몰려가 돈을 빼지 않을 수준의 보증 제도를 갖춰야 한다는 겁니다.”
―유럽 재정 위기국들의 외채 상환 능력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위기의 끝이 안 보입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재정 위기국의 은행들은 자국 국민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지 않고선 자력으로 살아남을 힘이 없습니다. 저는 네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봤어요. 재정 위기국은 임금과 물가가 완전히 낮아져서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을 때까지 높은 실업률을 견디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독일에 일정 기간 인플레이션을 일으켜서 다른 국가들이 혜택을 보게 할 수 있는데 아마 반발이 심하겠죠. 아예 유로존 내 경쟁력을 회복시키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북쪽 국가(독일 등 경제 강국)가 남쪽(재정 위기국)에 무한대로 자금을 공급하든가요. 마지막으론 유로화 동맹을 일부나 전부 해체할 수 있겠죠.”
―개혁 없이는 또 다른 금융 위기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미국 월가나 영국 런던처럼 금융 위기 이후 어느 정도 제도적인 장치를 갖춘 곳은 미래 위기의 근원지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불균형을 일으켜 위기의 발원지가 되는 곳이 있습니다. 부채가 과도하게 늘어난 신흥국, 균열이 보이는 유럽 국가, 은행권 손실이 커지는 중국, 정치적 긴장감이 더 돌고 있는 중동 지역이라든지요.”
☞영란은행
영란은행(英蘭銀行)은 영국 중앙은행(Bank of England)을 말한다. 잉글랜드를 한자 ‘英蘭’으로 표기했을 때 중국식 발음이 ‘잉란’이다. 영란은행은 1694년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창립됐다. 스웨덴 중앙은행과 함께 세계서 가장 오래된 중앙은행으로 꼽힌다. 현재 영란은행 총재는 마크 카니(Carney·캐나다 국적)다. 그는 영란은행 역사상 첫 비(非)영국인 총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