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계속 떨어지면 기업이익·일자리 감소 악순환
서비스 시장 자유화·규제 철폐… 구조개혁 뒷받침돼야
헬렌 레이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 英이코노미스트誌 선정'2016 주목할 경제학자' / 런던=김남희 조선비즈 기자
세계경제가 작년 12월 미국 금리 인상을 기점으로 급변하고 있다. 미국이 금리를 올린 것은 2008년 금융 위기로 침체했던 경제가 이제 통화정책을 정상화할 만큼 살아났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미국 경제는 작년까지 2년 연속 2%대 성장률을 기록했다. 선진국 중 가장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중국은 연초 세계경제를 대혼란에 빠뜨린 주범으로 꼽힌다. 그러나 금융 위기 당시 세계경제를 떠받쳤던 중국 경제는 지금도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작년 중국 경제성장률은 6.9%로 25년 만에 처음으로 7%에 미달했지만,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최근 관심권에서 다소 비켜나 있지만 세계경제 회복의 또 다른 변수 중 하나는 유로존(유로화 공동 사용 19개국)이다. 유로존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유로존은 아직 재정 위기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마이너스 정책금리(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돈에 보관 수수료를 물리는 것)와 양적 완화(중앙은행이 채권을 사들이는 등의 방법으로 돈을 푸는 것)라는 극약 처방을 썼는데도 경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 유로존은 2012~2013년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한 데 이어, 2014년에도 0.9% 성장하는 데 그쳤다. 가장 최근 통계인 작년 3분기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3%였다. 급기야 지난달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작년보다 상황이 악화됐기 때문에 오는 3월 현 통화정책을 재검토하겠다"며 통화 부양책 확대 가능성을 시사했다. 유로존이 일어서야 세계경제가 다시 성장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유로존은 어디로 가는 걸까?
헬렌 레이(Rey·46) 런던비즈니스스쿨 경제학 교수는 "유로존 경제 상황은 아직도 심각한 상태"라며 "한동안은 확장적인 통화정책을 펼쳐 하루빨리 저물가·저성장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했다. "유로존의 문제는 회원국 경제가 모두 따로 논다는 것입니다.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 경제는 아주 튼튼하지만 이탈리아나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은 성장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유로존 내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로존 전체가 디플레이션(경기 침체에 따른 물가 하락)의 수렁에 빠지지 않으려면 물가를 끌어올릴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레이 교수는 환율, 자본 이동, 통화 시스템 등 국제금융 분야를 중점적으로 연구해왔다. 유럽경제학회와 핀란드 위뢰얀손재단이 유럽 경제 연구에 기여한 45세 미만 유럽인 경제학자에게 2년에 한 번씩 주는 상인 위뢰얀손상(Yrj�Jahnsson Award in Economics)을 2013년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와 공동 수상했다. 201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장 티롤 프랑스 툴루즈1대학 교수 등이 이 상을 받았으며, 레이 교수는 첫 여성 수상자다. 프랑스 국적자인 레이 교수는 프랑스 총리와 재무장관 등에게 경제 정책에 대해 조언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誌)는 레이 교수를 '2016년 주목할 경제학자'로 꼽았다. 레이 교수의 남편은 영국 유력 민간 경제연구소인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설립자로, 현재 레이 교수와 함께 런던비즈니스스쿨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은 금리를 인상하며 통화 긴축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유로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다고 보십니까.
"미국의 금리 인상 영향을 이해하려면 먼저 왜 금리를 올린 것인지를 봐야 합니다. 미국 금리 인상은 미국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는 판단이 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기를 겪고 경기가 반등하면서 고용 지표가 개선되고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의 수요가 늘어난다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에도 좋은 소식입니다.
반면 유로존은 일본처럼 장기 불황에 빠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합니다. ECB는 유로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목표치를 최고 연 2%로 정해놨지만, 올해 1월 유로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4%(전년 대비)에 그쳤습니다. ECB가 양적 완화를 도입하기 직전인 2013년 말보다 물가 상승률은 오히려 낮아지는 추세입니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1월 2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올해 첫 통화정책회의 후 기자회견을 갖고 “중국 성장 둔화, 유가 하락, 지정학적 위험까지 겹쳐 세계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졌다”며 “인플레이션을 목표치인 2%로 끌어올리기 위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에는 제한이 없다”고 말했다. / 블룸버그
―ECB가 시행 중인 통화 부양책이 기대만큼 경기 부양 효과를 못 내고 있는 건가요?
"유로존 경제 회복을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도 높은 통화 완화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CB는 아직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작년 월간 물가 상승률이 수개월간 마이너스를 기록했을 정도로 목표치에 턱없이 모자랍니다. 물가가 이렇게 오랜 기간 낮은 것은 위험한 일이죠. 경기 침체 속에 물가가 계속 떨어지면 소비·투자 정체로 기업 이익이 줄고 일자리가 감소하는 악순환이 거듭됩니다. 물가 상승률을 2% 선으로 확실히 높이려면 뭐든 더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ECB가 추가 완화 조치를 내놓아도 금융시장에서는 실망스럽다는 기색을 보입니다.
"금융시장은 늘 대단히 크고 마법 같은 것을 기대합니다. 중앙은행들이 새로운 부양책을 내놓을 때마다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이죠. ECB는 물가 상승률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당분간은 완화적인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봅니다. 다만 몇 차원으로, 어느 수준까지 밀어붙일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유로존은 회원국들의 처지와 입장이 제각각이라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독일은 양적 완화에 계속 반대하는 입장입니다만.
"독일 내 일부 세력은 'ECB가 양적 완화 정책을 하면 안 된다'는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당장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크다고는 해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겪었던 초(超)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들 입장에선 중앙은행이 직접 돈을 푸는 것이 원칙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문제는 ECB의 양적 완화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물가 상승률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대안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공격적인 통화 완화 정책을 시행해 시중에 돈이 활발히 돌게 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레이 교수는 "통화정책의 효과를 높이고 경제 성장의 기회를 잡으려면 구조 개혁과 재정 정책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유로존에서는 현재 이 두 가지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정치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구조 개혁과 재정 정책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건가요.
"흔히 구조 개혁이라고 하면 임금 삭감처럼 근로자에게 불리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조 개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비스 시장을 자유화하고, 시장 진입을 막는 규제를 철폐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디지털 경제와 관련된 새로운 경제 활동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리스에 요구하는 개혁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징세 제도를 정비하고 사법·행정 체계를 개선하라는 것입니다. 기득권 때문에 개혁이 쉽지 않은 부분이죠.
재정 정책 면에서는 재정 여력이 상대적으로 더 큰 국가들이 지금보다 재정 지출을 늘려야 합니다. 독일 같은 재정 흑자국이 나서야 합니다. 유로존의 문제는 국가 간 격차가 너무 크다는 겁니다. 유로존은 이질적인 시스템을 가진 국가들이 인위적으로 묶여 만들어졌다는 태생적 결함을 갖고 있습니다. 유로존 내 격차를 줄이고 전체의 성장을 위해서는 독일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유로존이 결국 한 덩어리로 살아남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라는 비관론도 있습니다.
"저는 쓸모없는 기존 정책을 개선하고 더 나은 정책을 시행하면 유로존이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적으로 정책의 문제입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강력한 은행 동맹(banking union)을 갖추는 것입니다. 은행 동맹은 유로존에 속한 5000여 개 은행을 개별 국가와 상관없이 모두 동일한 규정에 따라 관리·감독하는 제도입니다. 유로존의 재정을 일원화하는 재정 동맹이 결실을 맺기 전까지는 은행 동맹이 유로존 결속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은행 동맹은 그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은행 동맹은 세 가지 축으로 이뤄집니다. 이 중 부실 은행 처리 역할을 맡을 단일 정리 체제와 감독 기능을 담당하는 단일 은행 감독기구 설립에는 합의했지만, 아직 공동 예금자 보호는 합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독일의 반발이 큽니다. 그리스나 스페인의 부실 은행 예금을 독일 국민이 보호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불안감이 크기 때문이죠.
그러나 금융 산업 위기와 국가 파산 사이의 치명적인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은행 동맹이 필수입니다. 2008년 미국발(發) 금융 위기가 어떻게 유럽으로 전염됐는지를 보세요. 미국의 악성 자산을 보유한 유럽 은행들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금융 위기가 재정 위기로 번졌습니다. 아일랜드는 은행이 쓰러지자 나라 전체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납세자인 국민이 은행을 구제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남유럽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죠. 유로존 존속을 위해서는 금융 분야를 철저히 분리해 관리하는 은행 동맹이 뿌리 내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