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이 1월 마지막 주 '마이너스 정책금리'라는 깜짝 부양 카드를 꺼내 들었다. 도쿄 증시에서 주가가 상승했고 엔화 가치는 하락했다. 통화 가치의 지속적 하락은 수출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결국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것이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가 기대하는 효과다.
하지만 일본은행의 정책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행은 시중은행과 중앙은행 사이에 적용하는 금리를 연 0.1%에서 -0.1%로 내렸는데, 인하 폭만 따지면 상당히 미미한 편이다. 다만 마이너스 금리 정책은 예상하지 못했던 사안이라 금융시장에선 주가가 오른 것이다.
유럽중앙은행(ECB)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ECB는 수백억 유로 규모의 국채를 매입 중이고 기준 금리는 이미 낮아질 대로 낮아졌다. 계속된 양적 완화 정책에도 물가 상승률이 목표치(2%)까지 오르지 않아, 디플레이션 우려만 커지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지난 1월 21일 열린 통화정책 회의에서 추가 양적 완화 정책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강조했다. 드라기 총재의 발언은 금융시장에 바로 반영됐다. 주가는 상승했고 유로화는 약세를 보였다.
최근 중앙은행들은 주기적으로 '의외의 발언'을 내놓으면서 물가 상승에 대한 기대감을 지속시키려는 듯하다. 투자자들이 일본은행이나 ECB가 물가 상승률을 끌어올릴 의지나 능력이 충분한지에 대해 의심을 가지면, 중앙은행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는 말을 통해 신호를 보낸다.
구로다 총재만 봐도 그렇다. 그는 일본은행 통화정책 회의가 열리기 1주일 전 "금리를 제로 이하로 낮출 계획이 없다"고 말했는데, 며칠 만에 생각을 바꾼 것 같다. 가계 지출과 산업 생산 등 경기 지표가 워낙 안 좋게 나온 것이 불을 지폈는지도 모른다. 상대방을 놀라게 하려면 미리 그렇지 않은 척해서 안심시키는 게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긴 하다. 일본은행 내부에선 마이너스 금리 정책이 5대 4로 가결됐는데, 이 역시 금리 인하 결정이 극적으로 이뤄졌다는 느낌을 줬다.
문제는 중앙은행이 극적인 효과를 노리고 한 발언들이 한두 번은 금융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여파가 오래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시간이 갈수록 발언의 '약발'이 떨어지고 구체적 행동을 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
일러스트=김의균 기자
이제 금융시장은 다음 달에 열릴 일본은행과 ECB의 통화정책 회의를 예의주시하면서 "이제 남은 수단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일본은행과 ECB는 운신의 폭이 좁아진 상태다.
일본은행은 마이너스 금리를 지금보다 더 낮추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한 국가는 유로존(-0.3%), 덴마크(-0.7%), 스웨덴(-0.35%), 스위스(-0.7%) 등이다. 이 방법은 정치적 반발이 심해지고 금융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마이너스 금리는 개념을 설명하는 것조차 힘들다. 마이너스 금리가 도입되면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돈을 맡길 때 오히려 수수료를 내야 한다. 시중은행이 일본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 거꾸로 이자 수익을 받는다.
일본은행과 ECB가 국채 매입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방법도 있지만 국채 매입은 효과가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수많은 경제정책 전문가와 경제학자는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고자 양적 완화 규모를 더 늘리는 방침에 대해 회의적이다.
만일 일본과 유럽에서 물가 상승률이 목표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미국 경제 회복세가 지난해 멈춘 것으로 파악되면,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은 더 이상 충분치 않을 것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복합적(하이브리드) 거시 경제정책을 펼쳐야 한다.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 정책과 통화정책을 합쳐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가 세율을 낮추고 공공 부문 지출을 확대하는 데 필요한 돈을 빌려 쓰는 게 아니라 새로 돈을 찍어내는 방식을 고려해볼 수 있다. 이른바 '헬리콥터 머니' 정책이다. 중앙은행이 경기 부양을 위해 직접 돈을 뿌리는 것이다.
요즘처럼 저성장 시대엔 일반적인 경기 부양책이 전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지출을 늘리고 현금 순환을 유도하는 단도직입적인 정책이 경기 회복 방안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헬리콥터 머니 정책에 대한 제도권의 반감은 매우 강하다. 중앙은행의 정책적 독립권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현재 글로벌 경기 침체가 일반적 상황이라면 중앙은행의 독립권은 당연히 보장돼야 하고 헬리콥터 머니 정책은 고려해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적 상황이 아니라 비상시다. 미국에선 헬리콥터 머니 정책에 대한 저항이 클 것이고 유로화를 쓰는 나라 사이에선 현금을 찍어내 방출하는 것이 금지돼 있다. 헬리콥터 머니 정책은 일본은행의 구로다 총재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려해야 할 방안일지도 모른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중앙은행 총재 발언 일지]
1월 15일 "양적 완화 정책 확대 계획 없어" 1월 21일 "마이너스 금리 고려 안해" 1월 24일 "실물 경제 우려 크지 않아" 1월 29일 "마이너스 금리 도입 결정"
☞헬리콥터 머니(Helicopter Money)
중앙은행이 경기 부양을 위해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듯 시장에 통화를 공급하는 것을 빗댄 말로,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만든 말이다. 2006~2014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지낸 벤 버냉키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전례없는 규모로 통화를 공급해 ‘헬리콥터 벤(Helicopter Ben)’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