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제약사는 R&D가 거의 유일한 성장 전략이었다. 신약 개발에 회사 명운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 제약사 '머크'는 2000년대부터 빌려오기 전략에 집중했다. 이유가 있었다. 머크는 2002년 개발 중인 신약 후보군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임상시험 단계에 있는 약이 총 16개였는데, 소규모 제약사라면 몰라도 수십억달러 매출을 거두는 제약사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치였다.
머크는 신약 후보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외부 자원 의존도를 높이기로 결정했다.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다른 회사의 제품을 가져와 팔거나 제휴 계약을 맺고 경쟁사와 함께 신약을 개발했다. 그 결과 2006년 머크는 55개의 신약 후보군을 마련했다. 머크는 해당 라이선스 계약을 공동 개발 계약으로 이끌어가며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난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구글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Google IO)’에서 데이비드 싱글턴(Singleton) 구글 안드로이드 웨어 총괄이사가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구글 안드로이드 웨어는 스마트워치용 운영체제(OS)로, 전자 결제부터 드라마 시청까지 다양한 기능을 갖췄다.
/블룸버그
로렌스 카프론 인시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한 가지 성장 전략에만 매여 있다면 지속 가능한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신성장 동력은 한 가지 수단만으로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속 성장하는 기업들은 '키우기, 빌리기, 사들이기'의 세 가지 전략을 상황에 따라 적용하는 '포트폴리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기존 성장 전략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자연스럽게 새로운 전략에 눈을 돌린 경우가 많았다. 설령 같은 전략을 유지하더라도 그 스타일을 크게 바꾸는 시도를 했다.
구글 X는 R&D, 안드로이드는 M&A
최근 키우기, 빌리기, 사들이기 전략을 고르게 사용해 뚜렷한 성장을 이룬 기업은 '알파벳', 즉 옛 '구글'이다. 지난 10일 구글의 창업자 래리 페이지는 구글의 명칭을 알파벳으로 바꿔 지주회사로 삼고 여러 사업부를 자회사로 분사했다.
알파벳은 구글 시절 자체 R&D 조직인 '구글 X'를 통해 사람 없이 저절로 굴러가는 무인(無人) 자동차, 눈앞에 필요한 정보를 띄워 주는 구글 글라스 등을 개발했다. 구글 X는 직원 5만여명의 머릿속에서 나온 '엄청나게 크고 황당한 아이디어'를 현실로 이끌어내는 연구소다. 알파벳은 구글 X를 통해 숨겨져 있는 기업 내부 역량을 극대화한다.
그러면서 쉴 새 없이 M&A도 시도했다. 2005년 스마트폰 운영체제(OS)를 개발하는 스타트업 '안드로이드'를 5000만달러에 인수했다. 지금은 애플 iOS와 스마트폰 운영체제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거대 플랫폼이지만 10년 전만 해도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2003년에는 어플라이드시맨틱스를 1억200만달러에 인수했는데, 당시 직원 45명에 불과한 이 스타트업에 너무 큰 금액을 투자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현재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료 광고 플랫폼'을 제공한 것이 어플라이드시맨틱스다.
'빌려오기'에도 적극적이다. 구글 플레이스토어에는 올해 초 기준 약 140만개의 앱이 올라와 있는데, 대부분 다른 기업이나 개발자들이 제작한 다음 제휴를 맺고 올린 것이다.
컨설팅 업체 베인앤컴퍼니의 강희석 파트너는 "성장의 이면에는 구글식(式) 포트폴리오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엔지니어는 기업의 핵심 기술인 '검색과 광고' 분야에 업무 시간의 70%, 이 핵심 기술을 보조하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개발 등에 20%를 쓰고, 나머지 10%는 각자가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연구 분야에 투자한다. 10%의 시간 투자로 '정말 쓸 만한 아이디어'가 나오면 구글 X 등이 이를 현실로 만든다. 즉, 현재부터 미래까지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생기는 것이다.
사서 합치고 사서 합쳤다
미국 종합 의료 기기 업체인 '존슨앤존슨'은 1975년부터 1997년까지 87개의 제품을 선보인 88개 사업 부서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54곳이 인수를 통해 확보한 곳이고, 34곳은 내부적으로 만든 곳이었다.
사실상 R&D와 M&A 모델, 즉 키우기와 사들이기의 전략을 결합한 셈이다. 이 경우 난제는 '통합'이었다. 새로 사온 회사는 기존 회사와 유기적으로 결합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그러나 존슨앤존슨은 내부 사업 부서를 인수해온 사업 부서와 합쳐 큰 성장을 이뤄냈다.
존슨앤존슨은 1983년 자사가 인수했던 기업 3개를 한 개의 사업 부서로 통합해 심장 판막과 심혈관 치료에 쓰이는 의료 기기를 내놨다. 이듬해에는 수요가 많은 심혈관 치료 제품군은 확대하고, 시장 수요가 적었던 투석 치료 제품군은 떼어내 매각했다.
한동안 심장 질환 기기 시장에서 떠나 있었던 존슨앤존슨은 1990년 들어서 다시 사업 부서를 재편한다. 심장 보조 장비 업체 하나, 혈관 장비 업체 하나, 일회용 의료 기기 업체 하나를 잇따라 인수, 1996년 심장 스텐트 제품을 개발해냈다. 존슨앤존슨은 외부 인수와 내부 개발이 섞이면서 수십억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핵심 경쟁력만큼은 지켜내야
일본의 자동차 제조 기업 '혼다'의 해외 사업 케이스는 다소 특이하다. 빌려오기 전략으로 시작했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확보하자 키우기 전략으로 전환해 해외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1984년 인도의 오토바이 제조 기업 '히어로'는 혼다의 고성능 엔진 제조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 당시 인도에는 해외 기업이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 현지 파트너를 둬야 한다는 규제가 있어 혼다 입장에서도 좋은 제안이었다. 양사가 세운 합작 벤처 회사는 세계 최대 이륜 오토바이 생산 업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밀월은 오래가지 않았다. 히어로는 엔진 설계 및 제조 기술을 배울 수 없었다. 엔진은 일본에서 생산돼 인도로 공급됐고, 이는 계약 조건상 문제가 없었다. 반면 혼다는 인도 현지 유통망과 시장 지식을 습득했다.
결국 2004년 인도가 경제를 개방하면서 혼다는 직접 자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혼다는 인도에서 시장 점유율 2위를 차지하게 됐다.
카프론 교수는 "섣부른 제휴는 경쟁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제휴와 같은 빌려오기 전략을 사용해야 할 때는 가급적 자신들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