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셔의 작품 '그리는 손'
한 손이 다른 손 잉태하는 순환의 패러독스 표현
경제에 반복되는 모순적 순환
위기 극복 위한 양적 완화 또 다른 위기 가능성 잉태
'그들'의 입장서 봐야 보인다
그림이 잘못 된 것은 그림을 벗어나야 보이듯
한국 경제도 더 잘 보려면 외국인의 시각으로 봐야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 원장
그림과 수학, 정말 관련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예술가들 못지않게 수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예술가가 있다. 바로 천재 판화가 모리츠 에셔(Escher)다. 수학적 난제들을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해 미술계뿐 아니라 수학계, 과학계 심지어 철학계에도 충격을 준 화가다.
그림이 그림을 그리는 순환의 패러독스
그림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바로 에셔가 그린 유명한 작품 '그리는 손'의 주제다. 위쪽 손이 펜을 들고 아래쪽 손을 그리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위쪽 손이 동시에 아래쪽 손에 의해 그려지고 있지 않은가. 어느 손도 다른 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에셔가 그리고자 한 것은 손 자체라기보다 한 손이 다른 손을 잉태하고 있는 모순적 순환 관계이다. 순환의 패러독스는 에셔 그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그림이 이상하고 모순적이라고 느끼는 것일까. 그림 밖에서 그림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진짜 손은 그림 바깥에 있는 에셔의 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에셔는 "진정한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닌) 그들이 되기 전에는 절대 그 이상을 볼 수 없다"는 말도 했다. 그림 속에 함몰돼 있으면 그림 안의 잘못을 절대로 인식할 수 없다. 그림에서 벗어나서 봐야 비로소 잘못이 보인다. 한 단계 높은 바깥 세계의 시각이야말로 에셔가 말한 '그들'의 시각이다.
글로벌 경제에도 모순적 순환이 반복된다. '그리는 손'처럼 기존 위기 해결을 위해 그려진 양적 완화란 손이 동시에 또 다른 위기의 손을 그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 경제에 주는 시사점도 있다. 경제 위기도 에셔의 말처럼 우리가 아닌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에셔 그림에서 '그들'은 화폭 너머에 있는 화가요 관람자다. 한국 경제에서 '그들'은 외국인 투자자들이다. 우리가 아무리 불평하고 반론을 제기해도 그들은 항상 그들의 관점에서 한국을 본다. 그림을 벗어나야 그림의 잘못이 보이듯 우리의 시각을 벗어나야 한국 경제의 문제가 더 잘 보일 수 있다.
'그들'이 한국 경제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대표적 지표는 경상수지 흑자, 단기 외채 비율, 예대 비율, 국가 신용등급 그리고 외평채 프리미엄이다. 최근 양적 완화 축소 논의로 인한 충격에도 한국 경제가 든든한 것은 이 지표들이 모두 좋기 때문이다.
그리는 손 / 천사와 악마 / 하늘과 바다
경계 허물기와 주객의 전도
에셔는 대립하는 두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독특하다. '천사와 악마'란 그림을 보면 하얀색 천사와 검은색 박쥐로 표현된 악마가 서로 겹치지 않고 정확히 아귀가 맞아떨어지며 공간을 채우고 있다. 천사의 형상은 정확히 그를 둘러싸고 있는 악마의 형상에 의해 규정된다.
천사와 악마는 적이지만 상대방이 없으면 스스로 존재 가치가 없어진다. 에셔 그림에서 대립은 싸움과 적대감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그래서 상대방이 없으면 나도 존재할 수 없는 관계, 즉 서로가 서로를 품고 있는 관계다.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 여와 야 그리고 경제에서 재정과 금융의 관계가 바로 이런 관계다. 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친구 관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셔는 특정 대상이 전혀 반대되는 대상으로 변해가는 과정도 기발하게 표현했다. '하늘과 바다'를 보자. 바다 속 물고기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새로 변해간다. 하얀색 물고기는 하늘 배경으로 변하고, 원래 배경이었던 검은 바닷물은 검은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간다. 주류가 비주류가 되고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것이다. 물속에 잠겨 있던 미국 경제가 양적 완화 축소를 통해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반면 싱싱하게 헤엄치던 신흥국 물고기는 점차 주변의 배경으로 전락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테셀레이션과 투자 위험 헤지
주제가 아닌 회화 기법 차원에서 보면 에셔 그림의 가장 큰 특성은 테셀레이션(tessellation)이다. 동일한 기하학적 모양을 겹치지 않고 반복적으로 배열함으로써 평면을 빈자리 없이 채우는 공간 분할 방식이다. 모자이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에셔는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궁의 이슬람 아라베스크 무늬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들어가고 나오는 반대 모양을 갖는 두 형태가 정확히 끼워 맞추어져 반복되며 전체 공간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테셀레이션은 금융에서의 헤지, 특히 동적 헤지(dynamic hedge)와 유사하다.
헤지란 주식을 사면 선물(先物) 같은 파생상품을 팔고, 주식을 팔면 선물을 사서 주가 변화에 관계없이 수익 구조의 모양을 일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고파는 들쑥날쑥한 모양이 정확히 테셀레이션을 닮았다. 동적 헤지는 주가가 변할 때 지속적으로 아귀를 맞추어 수정해 가는 것이다. '천사와 악마'에서 주변으로 갈수록 천사와 악마가 결합된 모양이 작아지듯 주식 투자 규모가 작아지면 맞물린 파생상품 규모도 같이 작아진다.
최근 한국 사회에는 갈등과 대립이 많다. 1인당 GDP가 2만달러를 넘어설 때 흔히 경험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갈등과 대립을 아름다운 조화로 그려내는 에셔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