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우리나라에서 첫 여성 대통령이 취임한다. 이는 대통령제 발상지인 미국은 물론 민주공화정의 진원지인 프랑스조차 이루지 못한 일이다. 동양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여제(女帝)는 측천무후이다. 그는 치세 중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당나라 전성기를 열었다.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태후와 청조 말기의 서태후도 사실상 여제였으나 세평은 좋지 않다.
사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송하는 여제는 섭정을 하며 요나라를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만든 소태후(蕭太后)이다. 983년, 30세에 과부가 된 그의 곁에는 12세의 어린 아들만 있었다. 그는 비상한 지혜와 담력으로 황권을 굳건히 다지며 엄한 교육으로 아들을 요나라 최고 명군(성종·聖宗)으로 키웠다. 출발점은 국방 분야였다. 사방이 온통 적국인데도 요나라 군대는 총 20만을 넘지 못했다. 그는 종족 간 구별을 없애고 정예군을 편성해 직접 지휘했다. 관직 세습 관행을 철폐하고 과거제를 실시해 천하 인재도 모았다.
그는 986년, 송나라 대군을 하북성 탁현 인근 '기구관(岐溝關) 전투'에서 격파하는 등 뛰어난 용병술을 구사했다. 당시 송 태종 조광의(趙匡義)는 패주하느라 급급했다. 사람들은 소태후를 '철마를 탄 미녀'란 뜻의 철마홍안(鐵馬紅顔)이라 불렀다. 소태후의 공세에 밀려 송나라는 화친을 구걸, 1004년에 전연지맹(�G亶淵之盟)을 맺어 요나라를 형님 나라로 섬기며 매년 은 10만냥과 비단 20만필을 바치기로 맹세해야 했다. 요나라는 그 덕분에 막대한 부까지 축적해 부국과 강병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었다.
새 정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관자'의 '목민'편에 나오는 "주는 것이 도리어 받는 것임을 아는 것이 다스림의 요체이다"라는 구절이다.
명나라 숭정 14년(1641) 초 일이다.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은 북상하면서 낙양의 복왕(福王)을 표적으로 삼았다. 복왕을 총애한 만력제가 혼인 비용으로 내린 황금 30만냥과 많은 하사품을 노린 것이다. 복왕은 재물을 목숨보다 아껴 매년 기근이 이어지는데도 백성의 고통에 눈과 귀를 막았다. 당시 낙양성은 성벽이 튼튼해 반란군의 거센 공격에 끄떡없었다. 이를 과신한 복왕은 수차례 장령들의 요청에 겨우 은 3000냥을 내주었으나 중간에 누군가 가로채 버렸다. 그가 다시 은 1000냥을 내주자 배분 문제를 놓고 큰 소동이 일어났다. 분노한 병사들이 성루에 불을 질러 반란군을 성 안으로 맞아들였다. 적은 재물을 아끼려다 가문 전체가 멸망했다.
장자의 '거협'에는 이런 경고가 등장한다.
"궤짝을 끈이나 줄을 당겨 단단히 묶고 튼튼한 빗장이나 자물쇠로 채우는 것이 흔한 방범(防犯)의 지혜이다. 그러나 거도(巨盜)가 오면 쓸모가 없다. 이들은 궤짝을 통째로 등에 지고 달아난다." 공자도 '논어'에서 "나라를 보유한 제후와 저택을 보유한 경대부는 재물이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한다"고 했다. 2013년 한국의 경제·정치 지도층도 '나눔의 미학'을 기초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각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