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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의 오페라 이야기 ⑤] 위기 상황에서조커처럼사용되는오페라 속의 약

Culture 박종호·오페라 평론가(정신과 전문의)
입력 2011.09.24 03:01
박종호·오페라 평론가(정신과 전문의)
오페라를 감상하다 보면 소재로 '약(藥)'이 자주 나오는 걸 볼 수 있다. 약은 오페라가 진행되는 동안 결정적인 순간에 획기적인 장치로서 효력을 발휘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작품은 구노(Gounod·1818~1893·프랑스 작곡가)나 벨리니(Bellini·1801~1835·이탈리아 작곡가) 등에 의해 10개 이상의 오페라로 재탄생됐다. 원하지 않은 결혼식을 올릴 수밖에 없는 줄리엣은 신부님이 구해준 약을 먹고 결혼식을 피하게 된다. 약 덕분에 40여시간의 가사(假死) 상태에 들어가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죽은 것으로 속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약은 오페라 속 위기 상황에서 마치 조커(트럼프에서 가장 센 패)처럼 사용된다.

약 중에서도 오페라에 많이 나오면서 가장 눈길을 끄는 약은 사랑의 미약(媚藥)일 것이다. 먹으면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거나 또는 내가 원하는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신비의 약이다. 미약이 나오는 대표적인 작품이 바그너(Wagner·1813~1883·독일 작곡가)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다. 콘월의 늙은 왕 마르케는 아일랜드의 공주 이졸데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왕의 조카인 트리스탄이 바다 건너 아일랜드까지 신부를 모시러 배를 타고 떠난다. 아일랜드에서 신부를 태우고 돌아오는 사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서로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다. 시조카를 사랑하면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졸데는 결혼식 전에 배 위에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하고 시녀에게 독약을 가져오라고 한다. 그러자 트리스탄 역시 함께 죽겠다며 독약을 나누어 마신다. 하지만 약을 마신 두 사람은 죽기는커녕 서로 불같은 사랑을 느낀다. 젊디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충직한 시녀가 독약 대신 사랑의 미약을 준 것이다. 미약을 마신 두 사람은 제어할 수 없는 격정의 그물에 휩싸인다.

드보르자크(Dvorak·1841~1904·체코슬로바키아 작곡가)의 '루살카'에서는 물의 요정인 루살카가 왕자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물에 불과한 그녀가 사람인 왕자와 사귈 수 없다. 그래서 루살카는 마녀에게 부탁해 약을 먹고 인간(여자)의 몸을 갖게 된다. 폰키엘리(Ponchielli·1834~1886·이탈리아 작곡가)의 '라 조콘다'에도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처럼 가사 상태에 빠지는 약이 등장해 곤경에 빠진 여인이 도움을 받는다. 도니제티의 '루크레치아 보르자'에선 독약을 먹은 아들을 살리기 위한 해독제가 등장한다.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에는 지난 기억들 중 사랑에 관한 기억만을 지우거나 기억을 되살리는 약도 나온다.

오페라에 나오는 약에 대해 어떤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약으로 이야기를 쉽게 풀어버린다"며 오페라의 단순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는 오페라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왜 약을 사용할까? 약이 복잡한 플롯을 단순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오페라에서는 플롯 자체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과정은 생략하고 짧은 공연 시간에 맞추기 위해 약을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것들을 약은 쉽게 이뤄준다.

무대가 현실과 같다면 극의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많은 예술가들은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간절한 소망, 꿈, 이룰 수 없는 사랑 등을 오페라 무대에서 이루고 싶어한다. 바로크 이전 시대의 극에서는 그것들을 이뤄주는 존재가 신(神)이었다. 신은 시대에 따라 요정·마녀·마법사·현자(賢者)·의사·과학자 등으로 변해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약인 것이다. 오페라의 약은 단순한 약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들이 소망했던 오랜 꿈의 실현을 위한 것이다. 즉 지금 그들은 시대와 제도와 권력에 의해 핍박받고 있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과 불가능한 소망이 언젠가 이뤄진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페라는 꿈꾸는 '미래의 세계'를 그리는 예술이다. 그것이 30년 후에 올지 300년 후에 올지 알 수 없다.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미래의 세계와 자유를 그릴 수 있기에 그들은 오페라를 쓰고, 우리는 오늘도 극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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